꿈속의 꿈

                                                                                             孔 德 龍

 내가 사는 분당 K 아파트 단지 정문을 들어서면 왼편에 작은 인공 연못이 있다. 큰 바위로 둘레를 쌓고 여름이면 바위 사이로 물이 떨어지고 분수도 물을 뿜는다. 흔히 있는 조경이다. 지나던 손자가 물고기를 발견하고 손가락질을 하며 기뻐한다.

그런데 며칠 전 꿈에 본 그 연못은 몰라볼 정도로 황폐해 있었다. 물은 황갈색으로 고인 채, 수면에는 초조(草藻)가 덮이고 무슨 날벌레가 부유하고 있었다. 누군지 연못의 물을 퍼내니 바닥에 녹쓴 깡통과 빈 병, 그리고 온갖 잡동사니 쓰레기가 쌓여 있는데, 놀랍게도 내 책이 몇 권 나왔다.

여기서 꿈이 깼다.

이 꿈의 해몽은 간단하다. 바로 전날 저녁 TV 프로에서 본 광경이다. 어느 유원지에선가 어깨에 띠를 두른 환경보호 봉사대원이 오염된 물가를 청소하는데 깡통과 빈 병이 어지러이 깔리고, 바닥엔 오물이 쌓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내가 꿈에 본 연못의 황폐함과 더욱이 내 책이 쓰레기에 섞여 있었다는 사실을 얼핏 설명할 수 없다.

나는 문득 내 나이를 떠올렸다. 70년 후에는 연못이 저렇게 변했을 것이고, 읽고 나서 혹은 읽지도 않은 채 내 책을 연못에 버릴 사람도 있을 게 아닌가.

이 꿈은 그 예언적 암시가 분명하다. 70년 후엔 연못은 그렇게 변모해 있을 것이고, 내 책의 일부는 쓰레기 틈에 끼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면서 꿈이 잦아졌는데, 시간은 흔히 새벽녘이다. 엷은 잠에서 깨어날까 하는 시간에 꿈은 찾아와서 나의 의식을 깨운다. 하늘을 나는, 혹은 높은데서 떨어지는 그런 꿈이 아니고 현실과 관계가 있는 꿈이고 보니, 꿈속에서도 긴장을 하게 된다. 나를 스쳐간 인물들, 죽은 사람, 살아 있는 사람, 벌써 인연이 끊어진 인물들인데 새삼 내 꿈길에 등장하다니… 내가 꿈을 꾸고 있는 시간에 그도 내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을 떠올리곤 눈을 번쩍 뜬다. 뒷맛이 개운치 않다.

나는 한때 ‘꿈일기’를 써봤다. 머리맡에 공책과 필기도구를 놔두었다가, 눈을 뜨면 몇 줄씩 적어 두곤 하였다. 물론 현실성이 있는 꿈뿐이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꿈은 잽싸게 꼬리를 감춘다. 마치 조개가 입을 벌렸다가 사람의 손이 닿으면 날쌔게 오므리는 꼴이다.

꿈을 꾸고 있는 동안 ‘아 이건 꿈이로구나’ 하고 지각할 때가 있다. ‘비몽사몽’이랄까. 이럴 때 나는 피부를 꼬집어본다. 아프지도 가렵지도 않으면 꿈이고, 감촉이 있으면 현실이라 하는데 잠든 채 제 살을 꼬집을 수도 없을 것이다.

일본에는 『꿈일기』를 남긴 사람이 있다. 마시키(正本) 히로시라는 변호사인데, 지난 50년 동안 약 1만의 꿈을 묶어낸 것이다. 내가 이 사람의 이름과 책을 기억하는 이유가 있다. 김희로(金嬉老)라는 재일교포가 억울하게도 살인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었을때, 마시키 변호사가 자진 무료 변호를 맡았기 때문이다. 그는 김 피고인이 무죄라는 심증을 얻어, 판정에 일기책을 제출하였지만, 증거로서 채택되지 않았다고 한다.

스위스의 융(Jung, 1875~1961)이라는 꿈 학자는 서너 살 때 본 꿈 이야기를 그의 전기 『추억·꿈·사상』에 소상히 적어 놓았다.

…나는 꿈속에서 목장에 있었다. 구멍이 있어 계단을 내려가 보니 길이 10미터나 됨직한 장방형 방이 있고, 중앙의 받침판 위에는 훌륭한 황금의 옥좌가 놓였고, 붉은색 방석이 얹혀 있었다. …옥좌 위에는 터무니없이 높은 물체가 문득 서 있었다. …가죽과 벌거벗은 살덩어리인데 정수리에는 얼굴도 모발도 없고 눈 하나가 박혀 있을 뿐이었다. …나는 무서워서 꼼짝 못하고 서 있었다. 그때 어머니의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

“잘 봐두어라. 사람 잡아먹는 괴물이란다.”

이 말을 듣고 겁에 질려 깨어나 보니 몸은 흠뻑 젖어 있었다.

이 괴물이 남자의 심벌임을 후일 깨닫게 되지만, 그것을 깨닫고부터 꿈 연구에 평생을 바치게 된다. 융뿐 아니라 그 선생격인 프로이드도 꿈은 사람의 잠재의식 혹은 무의식의 발현이라 설명하는데, 그 의식의 바닥에는 흔히 남녀의 ‘性’이 깔려 있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꿈속에서 가끔 둥근 빵 ─ 한 개도 세 개도 아닌 언제나 두 개 ─ 을 보면 바로 여성의 앞가슴을 동경하는 의식의 발로라고 설명한다. ‘빵’ 하면 얼핏 사람의 허기를 상징하는 양 생각해 왔는데 말이다. ‘꿈보다 해몽이 좋다’고 해두자.

문학작품에 꿈 이야기가 자주 나오는데, 작가의 상상에는 한계가 있으므로 꿈을 원용하게 되는 것이리라. ‘햄릿’의 막이 열리면 선왕의 망령이 성곽 상공에 나타난다. 손짓을 하며 서성거린다. 햄릿이 꿈에서라도 보고 싶었던 생전의 모습 그대로다. 사실 햄릿은 꿈속에서 부왕을 보곤 하였다.

꿈과 현실 사이를 넘나드는 좋은 예가 있다. 19세기 영국의 에세이스트 찰스 램의 『꿈에 본 아이들』이다. 램의 첫사랑 앤 시몽즈(작품 속에서는 ‘W-n’, 즉 Alice Winterton으로 나온다)―평생을 짝사랑으로 끝난―그녀와 만일 결혼했다고 가정하고, 또 그 사이에서 두 남매가 태어났다고 가정하고, 돌아가신 할머니와 큰아버지 이야기를 들려주는 서술로 시작한다. 마지막 대목에서 두 남매는 입을 모아 “우리들은 앨리스의 아이들도 아니고 당신의 애들도 아니다. 우리들은 바트럼(앤 시몬즈가 시집간 남편)을 아버지라고 부른답니다.” 하며 뒷걸음질치며 사라진다. “나는 독신자의 안락의자에 조용히 앉아서 잠들어 있었던 것이다.”

이 꿈 이야기도 따지고 보면 융의 잠재의식 속의 ‘性’ 문제로 풀이 할 수 있겠지만, 그 잠재의식이니 무의식의 세계를 쉽게 밝힐 수 없으니 답답한 노릇이다.

나는 꿈에 관해서 ‘맞느냐 안 맞느냐’의 명제라면 나름대로 해답을 가지고 있다. 사람은 수없이 꿈을 꾸는데, 맞지 않는 꿈은 깡그리 잊어버리고, 어쩌다 맞는 꿈이 있으면 그 꿈만 기억하고 되뇌인다. 그래서 꿈은 맞는다는 아전인수격 추론을 하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