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  지

                                                                                        羅 熙 子

 편지를 쓴다.

이름만 떠올려도 외로움에 묻힌 듯한 친구에게 편지를 보내고 싶었다. “외로움이란 글을 쓰는 밑천이다.”라고 얘기하던 친구였다. 내가 요즘 얼마나 외롭다고 투정을 부렸는지 친구의 대답을 듣고서야 가벼운 전율이 인다. 그 대답이 그렇게 풍요롭게 들렸다. “외로움을 더 견뎌라. 한달만 말도 하지 말고 침묵해 보아라. 철저한 외로움에 있어 보면 외로워서 글을 더 많이 쓰게 될 거다.” 내게 이런 친구가 있음이 얼마나 축복된 일인가. 주고받는 대화의 시간이 삶의 리듬이요, 향기다. 대화의 정곡을 찌를 줄 알고 곱디 고운 해맑은 미소로 말을 대신하기도 하는 친구다. 모처럼 샘물같이 맑고 정갈한 얘기를 나눈 것 같아 몸이 날아갈 것 같다. 참 별것도 아닌 얘기 몇마디 속에 이런 즐거움도 있다. 우울한 마음을 곧잘 회복시켜 놓는 그 친구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었다.

“그 동안 앞만 보고 달려왔다. 넘어야 할 장벽으로 판단되면 무조건 싸워 이기려 했다. 일이 생기면 잘잘못을 따졌고, 부당하다고 생각되면 반드시 고치려 했다. 하지만 이제는 여유를 갖고 천천히 살피는 습관을 길러야겠다…….” 이 세상에서 가장 고운 단어를 고르고, 정말 고마운 표현을 쓰려 했지만 엉뚱하기만 했다.

언제나 낮은 책상에 그렇게 다소곳이 앉아서 무언가 쓰고 있는 모습은 아이들 보기에도 낯설지 않은 모습이다. 아이들은 의자가 있는 책상에 앉아 있는 엄마보다는 방바닥에 앉아 있는 모습을 더 좋아한다. 가끔씩 글을 들여다 보기 위해 옆으로 와서 무릎을 마주 앉을 때도 있고, 무릎에 머리를 대고 누울 때도 있으니 그저 편한 모양이다. 가까이서 서로의 마음을 잘 읽어내는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 글이 안 써지는 날 긴장과 날카로운 표정을 많이 보아온 아이들이다. 그런데 오늘은 행복한 편지를 쓰고 다듬고 있으니 어느 때보다 얼굴이 밝아보였던지 스스럼없이 말을 건네왔다.

“엄마, 오늘은 유서를 써보세요.” 주춤대며 놀라며 아이를 보았다. 무심코 던진 말은 아닌 표정이다. “언젠가 우리는 다 죽을 텐데 살아 있을 때 유서를 멋있게 써 놓으면 그것도 괜찮을 것 같아요. 곧 죽는다는 생각을 하면 세상을 보는 것도 달라질 것 같구요. 오히려 더 긴장되고 열심히 살아간대요.” 어느 새 대화가 될 정도의 논리를 가지고 있었다. 갑자기 아이의 나이가 훨씬 많아 보였다. 그렇구나 살아온 이야기에 연연했고, 살아갈 시간들에 그럴듯한 의미를 던졌지만 막상 나의 죽음을 위한 유서는 단 한 번도 써 볼 생각은 못했구나. 그런데 왜 아이가 글을 쓰고 있는 엄마의 모습에서 유서를 써 보도록 권했을까 하는 것이 궁금했다. 알고 보니 어제 읽었던 책 가운데 죽음에 관한 얘기가 많았던 것 같았다.

요즘 베스트 셀러에 오른 『그는 언제 오는가』를 어제 읽었다. ‘그’는 죽음을 말한다. 나이가 주는 무게와 느낌 때문이었을까. 살아 있음과 죽음이 모두 다 매혹적이었다. ‘죽음 그 자체를 살아가는 삶의 방식으로 선택’하는 작가의 세계에 대해 아이들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이다. 공감을 갖는 것만으로 즐거웠다. 그런 대화가 오고간 뒤의 ‘유서’ 얘기는 자연스러움이었다.

유서를 쓰기 위해 많은 생각에 잠긴다. 다른 어떤 제목보다 마냥 공허했지만 그만큼 절실해졌다. 초조해지는 마음으로 원고지 위를 서성인다. 뒤죽박죽이 된다. 파란의 세월을 겪은 나의 이야기가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별 어려움없이 평범하게 자란 부분보다 더 많기에 그저 난감하다. 주위에선 “앉아서 글이나 쓰고…” 하며 분에 넘치는 행복한 사람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무언가를 기대하며 던져오는 말이지만, 나는 할말이 없다. 분명한 것은 많은 작품을 남긴 작가들의 천재성도 드라마틱한 인생도 지니지 못했지만, 수없이 구겨지는 원고 속에 묻혀 밤을 새우며 내가 좋아하는 글쓰기를 즐겁게 해 나가는 것이 행복할 뿐이다.

한 편의 글이 완성될 때마다 이만하면 됐다고, 나는 최선을 다했다, 나머지는 독자의 몫이다 하고 가슴을 펴지만 다시 마음에 들지 않아 애꿎은 입술만 뜯고 어쩌다 들리는 혹평의 소리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밤이 허다했다. 선배들의 뛰어난 작품들을 대하면 키 작은 모델이 그 작은 키로 쭉쭉 뻗은 큰 모델들 사이로 걸어가는 모습처럼 느껴져 그대로 도망치듯 되돌아오고 싶을 때도 있다.

그러나 삶을 산책하듯 살 수만은 없을 것 같았다. 늘 평온한 삶이지만 감정이 뜨고 가라앉음에 매달리며, 살림하면서 틈틈이 써 모으는 작업은 행복의 2모작이라고 생각된다. 하루 하루 느끼는 삶의 단상, 작은 감동들, 한송이 꽃과 해와 바람들도 그러한 내 마음을 일구어준다. 때로 외로움에 슬며시 유혹될 만큼 마음은 비어 있어 죄스럽고 슬픔 마음이 끼어들기도 하지만, 창조의 미궁 속을 더듬는 시간들은 주름도, 희어가는 머리도 느긋하게 바라볼 수 있는 여유를 준다. 더구나 외로움 타령에 흐느적거리던 내 일상은 유서를 쓰기 시작하면서 이상한 힘이 존재하기 시작했다. 표정은 힘찬 의지로 변화되었고, 무언가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우연한 말 한 마디에 기분이 달라지는 스스로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잠깐씩 걸려오는 전화들이 마음을 어수선하게도 했지만 그 순간들마저 덩달아 행복하다.

무언가 새롭게 환경도 바꾸고 싶어졌다. 가을쯤이면 도배를 다시 할 계획인 그런 누추한 벽지 위에 야광 별을 붙이고 싶었다. 밤에 불을 끄고 있으면 반짝반짝 빛나는 형광색 종이다. 방안에 누운 채 별들이 손에 잡힐 듯 눈앞에 펼쳐진다. 얼마나 아늑한 분위기인가. 시시한 별 모양의 종이 몇 장으로 별나라의 황홀감이 더하는 순간이다. 수수한데서 멋을 느끼는 세련된 발상이 다시 한 번 행복을 가져다 준다. 그러고 보니 이름도 나이도 성별도 초콜릿도 생선회를 좋아하는 식성도 몽땅 바꾸고 싶은 기분이다.

오랫동안 익숙했던 것과 낯선 것 둘 다 매혹적이다. 그런 분위기에 써 내려가는 유서는 더없이 창조 작업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