情模 스님

                                                                                           김 찬 숙

 가끔은 먼 곳에서 바람결에 실려오는 알 수 없는 신호 같은 것을 감지할 때가 있다. 그것은 문 밖에 소리 없이 눈이라도 내리는 날, 그런 날 누군가 보내는 긴 연서를 전해 듣는 환상에 빠지곤 한다. 겨울밤 바람에 쉴새 없이 울리던 지장암의 풍경 소리, 그 소리는 그리움이 되어 무한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그 옛날 내가 방황하며 절망하며 만났던 풍경이 환청과도 같이 찾아들곤 한다.

그 날, 오대산 지장암을 방문하던 날, 버스에서도 억수로 쏟아붓는 눈은 끝없이 내리더니 결국 지장암 근처 월정사 입구에 도착했을 때에도 계속 내리고 있었다. 버스가 떠나간 뒤에도 나는 눈 날리는 오대산 중턱에 막막하게 서 있어야 했다. 눈은 온 세상을 하얗게 덮고 다시 온 하늘을 수놓으며 끝없이 날려 더 이상 어디가 어딘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내리고 있었다. 내리는 눈 속에서 걸어오는 사람이 보였다. 머리에 모자를 쓰고 얼굴을 목도리로 단단히 감싸 눈만 내놓은 여자인지 남자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승복을 입은 사람이었다. 그가 가까이 다가왔을 때 나는 흠칫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눈처럼 살결이 곱고 해맑은 눈빛을 가진 젊은 비구니였기 때문이다. 나도 몰래 합장을 했다. 내가 지장암을 묻자, 그녀는 양 볼을 유난히 붉게 물들이며 본인도 지장암에서 산책 나왔노라고 했다. 아침 봉양을 마치고 이렇게 한 시간씩 걸으면 모든 시름이 잊혀진다고 했다.

“스님도 고뇌가 있나요?”라고 묻자, 그녀는 대답 대신 빙긋 웃었다. 그때의 야릇한 표정이 내게는 퍽 인상적이었다. 불교에서 선을 공부하는 그녀는 나와 같은 서른 살이라고 했고, 수덕사에서 왔으며 情模 스님이라고 했다. 여승들은 전국의 사찰을 돌며 수련하는데, 이곳 지장암도 여승들 사이에서는 널리 알려져 있고, 수덕사처럼 여승들만 출입하는 곳이었다. 지장암은 지장대사가 강원도 오대산에 지었다는 오대중에 하나로써 남대에 속하는 조그마한 암자이다. 월정사 옆 개울을 지나 비탈길을 올라가다보면 언덕빼기에 돌아 앉아 있는 절이 지장암이다.

정모, 그녀가 내 온 녹차가 향기를 풍겼다. 녹차를 젓는 손끝이 떨리고, 겨울 산사에 찾아온 또래의 방문에 그녀는 몹시 들떠 있는 듯했다.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게는 늘 반복되던 일상의 이야기들, 아이들, 직장, 남편 등등 그녀는 참선을 통해 해탈에 이르고 싶은 종교적 열망 같은 것을, 우리는 어쩌면 그 자리에서 각기 다른 꿈을 꾸었으리라. 내가 정모이기를, 아니면 그녀가 나이기를, 단 하루라도 나를 위한 시간을 가질 수 있다면, 적어도 객관적인 나를 뒤돌아볼 수 있는 그러한 날들이 내게 주어진다면, 그렇다면 정모도 나와 같이 가정을 꿈꿀까. 적어도 우리 또래들이 치러야 하는 결혼, 아이 등을 한 번쯤은 꿈꾸지 않았을까. 아니면 깊은 실연의 아픔 따위, 추억 같은 사연이 가슴에 꽉 차 있어 운명에 얽혀 이 산사에 파묻혀 참선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 날 밤 눈은 밤새도록 내렸고, 나는 방 앞에 걸린 풍경 소리를 온 밤내 들었다. 마치 바람처럼 정모의 긴 장삼자락과 목탁 소리가 어지러이 난무하는 꿈에 젖어 있을 때 정모가 내 혼곤한 잠을 깨우며 옆에서 속삭이듯 불렀다.

새벽 예불에 참석하자고 했다. 예불에 참석해 본 적이 없는 내게 그녀는 말도 없이 부처님 전에 절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엎드려 절할 때 머리, 다리는 땅에 대고 손바닥은 위로 향하도록, 그래서 우리의 소망이 부처님을 향해 열려 있어야 한다며 일일이 고쳐 주고 알려 주는 그녀, 어쩌다 손이라도 스치면 민망스러울 정도로 붉어지는 뺨, 그녀는 승복을 예복으로 갈아 입고 법당에서 불경을 외고, 나는 그녀의 불경 소리에 맞춰 계속 절을 했다. 나의 기원, 정모의 기원, 도대체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그 날 낡은 창호 문 밖에서는 끝없이 눈이 내리고, 지장암에서의 짧은 하룻밤은 알 수 없는 흥분 속에서 아쉬움을 남긴 채 저물어 갔다.

그 후 나는 정모 스님을 다시 만나지 못했다. 다시 일상 속으로 돌아와 몇 장의 편지를 썼지만, 끝내 부치지 못하고 가방 속에 가지고 다니다가 어느 날 아이들이 접는 딱지가 바로 내가 밤새워 그녀를 만난 후의 흥분과 열정을 주체 못해 썼던 편지임을 알았을 때, 나는 과연 정모를 만났었는지 환상이었는지 아득하기만 했다. 실제하지 않는 인물인지도, 내 마음 속에서 꾸며낸 인물인지도, 그러나 어쩌면 그것은 현실보다 더 깊이 내 가슴 속에 각인되어 남아 있어 변화없는 일상 속에서도 문득문득 그녀를 보곤 한다.

내 작은 소망은 사월 초파일 지장암을 방문하여 등 하나를 달고 싶다. 별이 하늘을 밝히는 빛이라면, 초파일의 화려한 연꽃 등은 지상을 밝히는 빛이어서 만나지 못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전해 줄런지도 모른다. 지금은 어디에서 혹 그리워하고 있을지도 모를 정모와 바람같이 만나고 싶다. 지등이 난무하는 초파일, 그녀는 긴 장삼을 엄숙하게 걸치고 내게는 또 하나의 등이 되어 찾아오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