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차르트와 찰스 램

                                                                                       柳 惠 子

 모차르트는 여섯 살 때부터 피아노로 자작곡을 연주했다. 성장 후에도 당대의 뛰어난 피아니스트였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 가장 좋아한 악기가 피아노였던 만큼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협주곡’, ‘세 대의 피아노를 위한 협주곡’ 등 복수 피아노 작품과 ‘네 손을 위한 소나타’까지 남겼다.

그 중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협주곡 Eb 장조(K 361)’는 23세 때 작품인데, 화려하고 풍부한 앙상블로 정취 있는 협주곡이다. 연대적으로 보면 재미있는 것이 진실하게 사랑한 연인에게서 실연당한 직후의 작품이니 놀랍기만 하다.

어린 시절엔 신동으로서 반짝이는 멜로디와 선율의 작곡·연주로 유럽 일대의 왕실과 귀족들의 사랑을 독차지한 모차르트였다. 그러나 성년이 되자, 후원자의 별세로 취업 문제, 이성 문제 등 어려운 고비가 기다리고 있었다.

만하임 체재중 예술감각이 뛰어난 성악가 아로이지아에게 매혹되어 수시로 아리아를 작곡해줬고, 그녀가 주연할 만한 오페라의 작곡 계획도 했다. 그러나 모차르트의 아버지는 아들의 큰 도시 진출과 성공을 바라고, 간절한 편지로 아들의 이성교제를 만류했다. 아버지의 뜻대로 어머니와 함께 파리로 간 모차르트. 그러나 어릴 때처럼 박수갈채도 없었고, 취직도 뜻대로 안 된데다 아로이지아 생각에 일손이 잘 안 잡혔다. 결국 피아노 레슨이나 하다가 어머니가 병사하자, 쓸쓸히 고향으로 향한다. 그래도 마음 한편엔 만하임에 들러 그리운 연인을 만날 기대로 가는 빛줄기가 비쳐들었었다. 그러나 아로이지아의 약혼 사실을 몰랐던 모차르트의 낙담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고향 잘츠부르크에 돌아와 두문 불출, 고통 속에서 작곡에만 전념한다. 그때 처음 작품이 이 협주곡이다. 불행의 그림자가 비치지 않는 밝고 황홀한 음악이 실연 직후 이뤄진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모차르트보다 19년 뒤에 태어난 영국의 수필가 찰스 램에게서도 그런 예를 보게 된다. 램은 광기를 부리는 누나 메어리를 돌보려고 결혼도 하지 않고 살았다. 발작하는 누나를 정신병자용 구속복을 입히고, 자신의 팔에 묶어 병원을 드나드는 처절한 생활 속에서도 심성이 쾌활하고 장난기나 유머가 풍부해서 남들을 잘 웃겼다. 그의 수필집 『엘리아 수필』의 글을 보면, 자신의 현실 생활과 밀접한 것들을 다루고 있는데도 인간적 고뇌나 슬픔 대신 묘한 공상, 멋있는 상상과 해학, 인생에 대한 깊은 이해의 작품이 대부분이다.

누나도 병은 지녔으나 평소엔 우아한 품격에 문학적 감수성의 소유자여서 램과 함께 동화 형식의 『셰익스피어 이야기』와 다른 책들도 펴냈다.

모차르트의 복수 피아노 협주곡이나 ‘네 손을 위한 소나타’ 등도 대부분 누나 난넬과 함께 연주하기 위해 쓴 곡들이다.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협주곡 Eb 장조’도 마찬가지. 누나와 함께 연주할 만한 것을 썼다. 어머니를 여읜 슬픔과 실연의 아픔, 불편한 관계의 대주교를 다시 대해야 하는 고통 속에서도 의외의 것이 탄생된 것이다. 환멸과 고통 속에서 기쁨을 노래하듯 행복감이 전체에서 풍긴다. 당시 빈에서 누나와 협주했을 때 크게 호평을 받았다고 한다.

몇 년 전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모차르트는 천박하고 경솔한 성격으로 비쳤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찰스 램처럼 재치와 유머가 넘치는 풍요로운 품성의 소유자로 전해 온다.

참 행복과 기쁨이란 희망이 성취될 때 가능한 것, 아로이지아와 함께 이상과 영원으로 치닫고 싶던 모차르트는 그녀에 대해 타오르는 마음을 악보에 옮기고 사랑의 편지도 부지런히 보냈다. 그러나 그녀는 모차르트의 뜨거움과 달리 그저 스승처럼 친하게 여겼기 때문에 모차르트가 파리에 간 후 다른 사람과 혼약을 했다.

모차르트는 3년 후 아로이지아의 동생 콘스탄체와 결혼해 버린다. 아로이지아에게 가졌던 환상이나 꿈이 현실로 불가능해지자, 동생에게서 다소 이루려했는지 모르겠다.

찰스 램도 현실에서 못 이룬 연인 시몬스와의 결혼, 그리고 아이들과의 단란함을 수필 ‘꿈속의 아이들’에서 그리고 있다. 작자가 선잠의 꿈속에서 체념했던 애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났을 법한 존과 앨리스에게 할머니 얘기를 들려주고 쓸쓸히 깨어난다. 유서 깊은 큰 저택에서의 할머니의 멋진 삶과 자신의 유년 시절, 형과 지낸 일화들을 흥미진진하게 듣는 아이들의 반응까지 담고 있다.

꿈이란 깨어나면 끝나는 허무한 것일지라도 아름답다. 사랑의 꿈은 행복이겠지만 그 사랑의 한계를 알게 되면 현실은 괴로움으로 남는다.

모차르트의 아로이지아에 대한 사랑이나 찰스 램의 시몬스에 대한 사랑, 두 사람은 진실되고 순수한 사랑을 추구했기에 실연과 체념의 고통과 비애에서 벗어나 아름다운 작품으로 승화시켰다.

외부의 소음에 귀를 막고 아픔이 여과된 내면의 소리에 귀기울여 음악과 문학으로 우아하게 표현한 것이다. 혹독한 시련을 통해 풍요한 영혼의 넓이를 확장하고 삶의 환상과 신비를 포착했다.

모차르트의 협주곡은 관현악이 먼저 빠르게 울린 뒤에 피아노 선율이 맑고 섬세하게 파고든다. 이어서 목가적인 2악장, 흥겨운 3악장이 시간가는 줄 모르게 흐른다. 더욱이 피아노가 두 대로 제1피아노가 앞서 연주한 부분을 뒤의 사람이 제2피아노로 반복하기에, 그대로 솜씨가 비교되면서 아기자기한 즐거움을 준다.

수필 ‘꿈속의 아이들’ 역시 읽으면서 풍부한 감수성과 아기자기한 상상에 젖어 깃털처럼 부드럽고 가벼운 즐거움에 빠진다.

어떤 현실의 처참함도 이들 고결한 영혼을 파멸시킬 수는 없었다. 그들에겐 자신들이 겪은 유년 시절이 풍성해서 마음의 여유가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현실에 시달리며 고통 속에서도 도움받은 어떤 힘이 있었을까. 화려한 유년 시절이 아닐지라도 어떤 시기에 겪었던 완전한 시간이 섬광처럼 스쳐서 원동력이 되었던 것일까.

그들의 천재성만을 영원히 부러워할 수만은 없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