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 삼제(三題)

                                                                                    최 숙 희

 술

 

오래 전 대통령 영부인께로 온 편지를 읽어 볼 기회가 있었다. ‘존경하는 국모님’으로 시작한 한 촌부(村婦)의 편지 내용인즉 이러하였다.

농사꾼인 남편이 원인 모를 병이 깊어 서울의 한 벙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상경길에 ‘국모님’께 전하고자 보약을 넣은 술 한 병과 삶은 닭 한 마리를 보자기에 싸들고, 묻고 물어 청와대를 찾았으나 만나지 못하였다. 그러다 시부모님 봉양이며 밀린 농사일 걱정에 황망히 시골로 되돌아가게 되었다. 이제 다시 문안을 드리건대, 그때 초소의 경비원에게 맡겨놓은 술과 안주는 잘 받으셨는지. 한 가정에는 가장이, 나라에는 대통령이 건강하여야 하니 ‘국모님’께서 부디 대통령의 건강을 잘 보살펴 달라는 내용이었다.

 

젖먹이를 업고 상경길에 올랐던 그 여인은 지금쯤 환갑의 나이가 되었을 것이다. 그 시절 철통 같던 검문을 거쳐 술병을 전할 엄두를 낼 줄 알았던 시골 아낙의 기백과 남편이 중병인 처지에 대통령의 건강을 엄려하는 그 정성과 순진함이 새삼 감동스럽다.

그 시골 여인의 술 한 병은 그때 청와대에 전달되었던 가장 귀한 선물이었으리라 믿고 싶다

 

달걀

 

미루나무가 나란히 선 보리밭 둑길을 십여 명의 소녀들이 가고 있었다. 이른 봄 하늘에는 소리개가 떠 있었고, 떠나고 보내는 아쉬운 마음이 소녀들의 걸음을 더디게 하였다.

태어나 한 번도 그곳을 벗어나 본 적이 없는 소녀들은 기약 없는 이별을 서러워하며 울고 또 울었다. 이제 산모롱이를 돌면 영영 헤어지게 된다. 급기야 모두가 한덩어리로 엉켜 떠들썩한 울음판을 벌인 후 떠나는 이, 남는 자들로 나뉘었을 때 저만치 한 아이가 혼자 훌쩍이며 서 있었다.

언제부터 저 애가 따라왔을까. 또래의 아이들보다 두세 살 가량 아래의 그 아이는 멈칫 멈칫 하더니 단호한 눈빛으로 다가와 “이거…” 하며 손을 내밀었다. 새카맣게 때가 낀 그 손에는 날달걀 한 개가 놓여 있었다.

아, 눈물과 먼지로 얼룩진 달걀. 나는 그런 달걀을 그 전에도 후에도 본 적이 없다. 무엇인가를 받고 그만큼 오래 감동해 본 적도 없는 것 같다.

삼십오 년 전, 내가 처음 고향을 떠나 서울로 향하던 날의 풍경이다.

 

부채

 

일 학기 마지막 강의를 마치고 문을 나서는데 한 학생이 다가와 섰다. 의아히 보노라니 그는 잠시 주저하다 종이에 싼 뭔가를 내밀었다.

“올 여름을 시원하고 건강하게 보내십시오.”

엉겹결에 받아 들고 보니 부채였다.

그는 동급생보다 서너 살 많은, 시력이 무척 약한 남학생이다. 대학 입학 무렵 중병을 앓은 후 급격히 시력이 떨어져 몇 배 확대한 교재조차 읽기가 수월치 않았다. 강의 도중 방금 칠판에 적은 내용을 맨 앞줄의 그에게 나직한 목소리로 읽어 주면, 청력이 좋은 그는 초점 흐린 시선을 맞추며 히죽 웃는 것으로 응답하곤 하였다.

장애자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 건강한 사람의 동정심이다. 후천성장애자는 더욱 그러하다. 그의 불편함을 덜어 주려는 의도가 잘못 전달될까 하여, 어느 날 나는 그에게 읽어 주어도 좋은가 물어 본 적이 있다.

 

오늘은 대서(大暑). 창 밖 멀리 키 큰 은행나무 잎새는 폭염 아래에서 미동도 않는다.

매화 그림에다 ‘香遠益淸’이라는 제자(題字), 그리고 내 이름을 적어 넣은 합죽선(合竹扇). 그 부채로 바람을 일으켜 본다. 아련한 눈길을 보내며 히죽이 웃던 학생의 얼굴이 생각난다.

묵향(墨香)에 섞여 어떤 향기가 전해 오는 듯하다. 다른 사람을 가르친다는 것은 단순한 지식의 전달만이 아니다. 부채 바람에 전해오는 이 향기는 그 무엇도 함께 전하라는 메시지일 것이다. 이 합죽선에 손때가 곱게 배어들쯤엔 나도 그 향기의 의미를 알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