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뚱한 성과

                                                                                           李 恩 淑

 오후 5시경, 오늘도 아무 성과 없이 하루가 가고 있다. 아침부터 씨름해오던 글은 서두의 전개가 아무래도 마땅치 않으니,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 셈이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 베란다의 의자로 나가 앉아 거리를 내려다본다. 19층에서 바라보이는 자동차들은 뒤로 당겼다 놓으면 잽싸게 달려가는 장난감처럼, 신호 대기에 잠시 모였다 흩어지며 바삐 움직인다. 자동차 속의 사람들은 무슨 볼일로 저토록 빨리 움직이는 것일까. 그들의 오늘 성과는 저 속도만큼 빨리 축적되고 있는지 모른다.

한나절이 넘도록 책상에 앉아 있었더니 머리가 멍해지면서 현실감각이 무디어진 것 같다. 나도 자동차를 타면 대단히 바쁘다는 듯이 저런 속도로 달릴 것이건만 종일 성과 없는 나의 느린 행보에 자동차의 속도가 비교되어 가슴이 답답해옴을 느낀다.

이럴 때, 잠시 멈췄던 현실감각을 다시 연결시키는 데에는 사람들이 북적대는 대형 매장 같은 곳을 들리는 것이 효과적이다.

집 근처에 ‘창고형 할인매장’이란 곳이 생겼다. 영어 이름을 가진 그 매장은, 사람 키의 두 배도 넘을 듯한 선반형 진열대에 상품을 가득 쌓아놓고 있다. 손수레를 끌고 그 협곡 같은 매장 사이를 오가노라면, 풍요롭다는 환상이 한껏 부풀어오른다. 거기에다 기존의 매장보다 값이 싸다는 안도감이 보태어지고, 야채나 생선 코너에서 외쳐대는 특매품 안내 소리와 방송실에서 보내는 빠른 템포의 신세대풍 노랫소리가 겹쳐지면, 느긋하던 마음이 조급해지면서 바삐 사지 않으면 손해볼 것 같은 분위기가 고조되는 것이다.

이런 분위기에 연계되어 기억나는 일이 있다. 언젠가 남대문 시장을 지나치다가 어느 노점상이 외쳐대는 말이 참 재미있었다.

“만 원짜리 조끼가 단돈 오천 원, 안 사면 오천 원 손해, 안 사면 오천 원 손해!”

그것을 사지 않은 수많은 서울 시민은 가만히 앉아서 오천 원씩 손해를 본다는 뜻이니, 전 서울 시민의 손해액이 엄청나겠다는 생각을 하며 혼자 웃던 일이 있었다.

저 창고형 할인매장도 안 사면 손해본다는 생각을 유도하는 판매전략을 세우고 있는지 모른다.

서너 살 아이가 충분히 드러누울 수 있는 스테인레스 손수레에는 단지 싸다는 이유만으로 사게 된 물건과 꼭 필요해서 구입한 물건들로 수북이 채워진 채 사람들은 흐뭇한 표정이 되어 계산대 앞을 길게 늘어 서 있는 것이다.

주말이면 그곳은 주민들의 가장 경제적인 나들이 장소도 되는 듯하다. 부부가 아이들까지 데리고 모여드니, 매장이 내보내는 자체 소리에 질려 사람들은 별로 말이 없지만, 그 복잡한 장내의 정경은 활기에 넘쳐 있다.

나 자신 그런 사람들 중의 하나임을 인정하면서 잠시 갈등하곤 한다. 저렇게 많은 물건을 구입한들, 그 속엔 고가품이 아닌 생필품뿐이니 크게 염려할 필요가 없으리라는 생각과 싸다고 많이 사서 헤프게 쓰면 낭비만 조장되리라는 생각이 동시에 겹치는 것이다.

 

정신과 질환 중에는 쇼핑중독증이라는 것이 있다고 한다. 필요 유무에 상관없이 구입하는 일 자체에 쾌감을 느끼다가 드디어는 자신이나 가족의 치수에 맞지 않는 신발이나 옷 따위까지도 사서 집안 가득히 물건을 채워두는 증세라고 한다. 이 환자는 실제의 낭비벽에도 불구하고 싼값으로 물건을 구입했다는 경제적 자부심에 차 있다는 것이며, 대부분은 고졸 이상의 고학력자로서 생활 정도가 괜찮은 경우에 나타나는 가장 저급한 성취욕이 발동된 경우라는 것이다.

이런 전문가의 설명이 아니더라도, 정상인의 쇼핑 욕구에도 위와  같은 심리가 조금은 깔려 있다고 생각해오던 터이다.

다시 매장의 분위기로 돌아가서 자신의 구매심리를 좇아가 본다.

30개 포장의 계란은 10개 들이의 배(倍) 값으로 살 수 있고, 아기 주먹만한 양송이는 너무 싱싱하여 눈이 부시다. 윤기가 흐르는 풋고추, 살아 펄펄 뛴다는 오징어의 특매는 물량이 거의 끝나 간단다. 잘익고 싱싱한 토마토, 혼자 들어올릴 수도 없는 큰 수박은 밭에서 금방 나온 듯 꼭지가 싱싱하다.

공산품 매장으로 가본다. ‘쇼킹특매’의 팻말은 과거의 반공 포스터처럼 붉은색에다 경고의 이미지를 갖고 있다. 그 아래 놓인 커피 3봉지의 묶음은 과연 낱개일 때보다 훨씬 싸다. 어차피 중요한 것이라면 미리 사두어서 나쁠 것은 없을 것이다. 이것저것 몇 가지를 더 챙겨 넣으니 어느 새 손수레가 묵직하다.

구입한 물건을 싣고 집으로 돌아와 부엌 가운데에 내려 놓는다. “단지 두어 시간의 수고 끝에 나의 소유가 되어버린 물건들을 보라.”

나는 전리품을 거둬들인 개선장군처럼 구입한 물건을 바라보며 스스로에게 그 성과를 보고한다. 그것들은 각각의 가치를 고스란히 지닌 채 주인인 나의 처분만을 기다리는 복종의 자세로 놓여 있다. ‘너는 냉장고 속으로, 너는 조리대 밑의 수납장으로, 너는 윗칸, 너는 아랫칸.’

그러나 냉장고 속엔 우리 부부가 일주일 정도 먹을 수 있는 계란이 아직 남아 있고, 껍질이 시들어버린 참외 몇 개, 절단면이 얼어버린 수박 반쪽, 랩으로 씌운 보시기마다엔 먹기는 싫고 버리기엔 아까운 무언가가 자리 차리를 하고 있다.

방학을 하자 아이 남매는 각자의 볼일을 위해 집을 떠나 있고, 남편마저 저녁을 먹고 들어오는 날이 많으니, 냉장고의 내용물은 교체될 기회가 없어진 셈이다. 그럼에도 오늘의 나 또한 쇼핑중독의 호기 증상일까, 아니면 무위했던 한나절의 시간을 보상받고자 하는 심리였을까.

퍼즐 장난감을 다루듯, 냉장고 속을 이리저리 비집으며 오래 고심(苦心)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