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섭(金晉燮)의

‘청빈예찬(淸貧禮讚)’

 

일  시:1997년 5월 17일

장  소:수필문우회 회의실

참석 인원:15명

사  회:허세욱

정  리:권일주

 

 

사회 : 계간 수필 제9호를 위한 합평회를 시작하겠습니다. 이 달에는 청천(聽川) 김진섭 선생의 ‘청빈예찬’을 골랐습니다. 아시다시피 청천 김진섭은 최초의 본격적인 전문 수필가로 우리 문단에서 인정을 받았습니다. 이분의 작품 가운데서 비교적 짧고 요즈음의 우리 시기에도 적절하다는 생각이 들어 이 작품을 읽어 보기로 했습니다.

청천은 1903년 전남 목포에서 출생하여 양정 고보를 거쳐 일본 호세이  대학(法政大) 문학부 독문과를 졸업했습니다만 한창 유학중이던 l926년에 이하윤, 손우성, 정인섭 등과 해외문학연구회 조직에 참가하여 이듬해에 <해외문학>을 창간했습니다.

귀국 후 경성제대 도서관 사서로 지내면서 신극회를 조직하여 연극운동에도 앞장을 섰습니다. 성균관대학과 서울대학교의 교수를 지냈으나 1950년 8윌 초의 어느 날, 청운동 자택에서 납북되어 현재까지 생사를 모르는 상태입니다.

청천은 문학활동을 1930년부터 시작했습니다. 현재까지 4권으로 간주되는 수필집 『인생예찬』, 『생활인의 철학』, 『청천 수필 평론집』, 『미발표 수필선』에 190편의 작품이 실려 있습니다만, 중복된 것이 많이 있기 때문에 실제로는 150여 편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합평에 올린 작품인 ‘청빈예찬’은 1930년대 초에 쓴 것이지만 그 후 ‘청빈에 대하여’라는 이름으로 수정작을 다시 내놓은 작품이기도 합니다. 이분의 작품세계를 논할 때 많은 사람들이 이분의 수필이 철학수필이라는 말을 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지정 토론자로 철학가이신 김태길 회장님을 비롯하여 박재식, 정진권, 문혜영 선생을 모셨습니다.

오늘 합평회를 이끌어갈 소제목들을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가 주제 문제, 그 다음은 이 수필과 철학과의 관계, 세 번째가 문장 문제,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 수필문단에 남긴 청천의 공헌과 그 문학적 위상입니다.

합평에 들어가기 전에 문혜영 선생이 이 글을 읽어 주시겠습니다.

 

 

(본문)

淸貧禮讚 

 

이는 또 무어라 할 궁상(窮相)이 똑똑 흐르는 사상이뇨 하고, 독자 여러분은 크게 놀라실지도 모른다. 확실히 사람이 이 황금만능의 천하에서 청빈(淸貧)을 예찬할 만큼 곤경에 빠져 있다는 것은 비참한 일이다. 그러나 이왕 부자가 못된 바에는 빈궁은 도저히 물리칠 수 없는 일이니, 사람이 청빈을 극구 예찬함은 우리들 선량한 빈자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 그것은 절대로 필요한 한 개의 힘센 무기요, 또 위안이다.

혹은 부유라 하며, 혹은 빈곤하다 말하나, 대체 부유는 어디서 시작되는 것이며, 빈곤은 어디서 시작되는 것이냐? 사람이 부자이기 위해서는 대체 얼마나 많이 가져야 되고, 사람이 가난키 위해서는 대체 얼마나 적게 가져야 되느냐? 그러나, 물론 이것을 아는 이는 없다. 보라! 이 세상에는 부자임에도 불구하고, 실로 대단한 부자임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가난하다 생각하며, 사실에 있어 또 이 느낌을 항상 지니고 다니는 도배(徒輩)는 허다하지 않은가? 그들은 어느 날에 이르러도 자족함을 알지 못하고, 전연히 필요치 않는 많은 것을 요망한다. 말하자면, 위에는 위가 있다고 할까, 도달할 수 없는 상층만을 애써 치어다보곤, 아직도 자기에게 없는 너무나 많은 것을 헤아리는 것이다. 포만(飽滿)함을 알지 못하고 ‘충분타’ 하는 아름다운 말을 이미 잊은 바, 그러한 도배를 사람은 도와줄 도리가 없다. 그런데, 또 보라! 이 세상에는 극도로 어려운 처지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넉넉타 생각하며, 사실에 있어 또 이 느낌을 항상 지니고 다니는 사람은 허다치 않은가? 이 사람들에겐 명색이 재산이라 할 만한 것이 없음은 물론이요, 대개는 손으로 벌어서 입으로 먹는 생활이 허락되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들을 정말로 필요한 것조차를 필요하다고 여기지 않고, 말하자면 밑에는 밑이 있으니까, 밑만 보고 또 이 위에도 더욱 가난할 수 있을 모든 경우를 생각하고, 그리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이 절박한 곤궁 속에 주리고 있는가 생각한다. 이리하여, 이 위안(慰安)의 명류(名流)들은 마치 그들이 그들의 힘과 사랑을 어딘지 다른 속에다 두는 듯한 느낌을 우리에게 주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원래가 빈부의 객관적 표준은 있을 수 없으므로, 빈궁의 문제를 쉽사리 규정하여 버릴 수는 없다. 문제는 오직 조그만 주머니가 곧 채워질 수 있음에 대하여, 구멍난 대낭(大囊)이 결코 차지 않는 물리적 이유에만 있을 따름이다. 그리하여, 결국은 빈부의 최후의 결정자는 그 사람 자신일 뿐이요, 주위에 방황하는 제삼자가 아니다. 그러므로, 또한 사람이 참된 부유를 자손을 위하여 남기려거든, 드디어 한이 있는 물질보다는 밑을 보는 재조와 결핍에 사는 기술을 전함에 지남이 없을 것이다. 자족(自足)의 취미와 자기의 역량을 어딘지 다른 곳에다 전치할 수 있는 정신적 재능이야말로 사람을 부자이게 하는 바 2대 요소이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 과연 빈궁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일까? 아니다. 우리는 여기 두 가지 종류의 빈궁을 지적할 수가 있다. 그 하나는 물질적 빈궁이라 할 수 있으니, 이제 벌써 할 일이 없고, 그러므로 쓸데없는 존재가 된 사람이 그보다 밑바닥에 있는 사람은 없는 까닭으로 활동과 생존에 대한 권리를 이미 잃고, 여기는 영구히 자족과 질소의 어떠한 예술도 적용될 수 없을 때, 실로 그때 그는 참으로 가난하며, 실로 거기 참된 빈궁은 있다. 다른 하나는 정신적 빈궁이라 할 수 있으니, 그것은 사람이 그의 참된 역량과 그의 참된 사랑을 바칠 수 있는 하나의 정당하고, 또 아름다운 ‘다른 곳’이 세상에는 존재한다는 것을 이해치 못하기 때문에 이러한 다른 곳을 어리석은 나로서 조소하므로 의하여 자기 자신을 무용의 장자(長者)로 뿐만 아니라, 그의 생존과 활동이 의미를 상실할 때, 이 결핍을 맛보려 하지 않고, 지향 없이 탐욕만 추구하는 그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다른 의미에서 가난한 자이라 아니할 수 없으며, 또 우리는 이곳에 다른 하나의 참된 빈궁을 발견치 않을 수 없다. 그리하여 여기 우리가 가장 슬퍼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제2유형의 빈자가 냉담하고 거만한 태도로 제1유형의 빈자 옆을 지나친다는 사실이다. 일찍이 디오게네스는 그의 조그만 통 속에서도 극히 쾌활하게 살았다. 그러나 알렉산더에겐 이 세상 전체가 한없이 적은 것이었다. 여기 만일에 사람이 철학자 디오게네스의 부를 더욱 큰 것이라 단언할 수 있다면, 그의 청빈은 확실히 적은 ‘재산’은 아니다.

 

 

 

사회 : 어떤 논리의 전개방법으로 이 수필이 청빈의 내용과 성격을 펼쳐가고 있는가에 대해 심층으로 분석해 주시기 바랍니다. 먼저 주제입니다.

김태길 : 참된 부(富)는 무엇이며 참된 가난이란 무엇이냐. 일반적으로 물질적인 부가 진정한 부이고 물질적인 가난이 진정한 가난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실제로는 정신의 가난이 진정한 가난이다. 세상 사람들은 어리석게도 그 사리를 모르고 사는 사람들이 많다. 대략 그런 이야기를 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박재식 : 부자의 정신적인 빈곤과 빈자의 정신적인 부를 이야기하면서 ‘빈자의 정신적인 부가 참된 부이다’라는 주제의 글입니다. 그러나 이 글의 제목이 ‘청빈예찬’이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청빈을 예찬했다기보다는 제2유형의 빈자이다 라고 표현한, 부자의 정신적인 빈곤, 그것의 부정적인 면을 들어서 그 반사 효과적으로 청빈의 가치를 조명한 글이라고 보았습니다.

정진권 : 제목이 ‘청빈예찬’이지만 주제를 설정한 것에 조금 문제가 있는 듯합니다. 부자 중에도 청부(淸富)도 있을 법한데 나쁜 부자와 좋은 가난한 사람만을 이야기했지, 좋은 부자와 나쁜 가난한 사람에 대해서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부자이면서 좋은 사람, 가난하면서 나쁜 사람도 있는 것 아닙니까? 이 글의 주제를 생각하면서 요즈음의 우리 세태를 떠올렸습니다. 청부(淸富) 내지 청빈(淸貧)이 필요하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문혜영 :‘문장의 도(道)’라는 이분의 글을 보니까, 이분은 글을 쓸 때 첫 문장을 굉장히 중요시 여긴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첫 문장에 좋은 일구(一句)를 뽑아내기 위해서 무척 고심을 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첫 문장에 그 글에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쏟아놓는 분이지요. 이 글에서도 첫 문장에 이 글의 주제가 드러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l930년에서 40년 사이, 가난하고 어려웠던 시대, 그 속에서 가난하지만 마음은 부자로 살아가자는 것을 강조하고 싶어 쓴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가난 속에서 무엇인가 하나를 가질 때, 무엇을 어떤 식으로 가져야 하나, 청빈을 예찬하는 것 같으면서도 실제로 그 속에는 다른 것, 무엇인가 마음 속에 가질 것이 있다 라는 쪽으로 생각이 들게 하는 글입니다.

 

사회 : 주제에 대해 다른 각도에서 생각이 드시는 분들께서 말씀을 해주시지요.

정규복 : 청빈은 안빈낙도(安貧樂道) 의식에 있는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아까 어느 분이 이 글의 주제가 예를 든 것과 상충된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이 글의 주제와 제재는 유리된 것이 아니고 잘 들어맞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유경환 : 물질적인 부와 물질적인 빈, 정신적인 부와 정신적인 빈, 그 중에서 누가 도와줄 수도 없고 제일 가난한 것은 정신적인 빈이다, 그런 말씀입니다.

고봉진 : 저는 이 글이 주제도 옳게 서 있는 글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제목이 ‘청빈예찬’이면 청빈에 대해서 예찬을 해야 되는데 전혀 그렇지 못합니다. 청빈이라는 것은 나쁜 짓을 해서까지 부자가 되지는 않겠다, 나쁜 짓을 하지 않고 차라리 가난한 것에 만족하겠다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분은 청빈에 대해 충분히 생각하지도 않고 정리도 하지 않은 채 이런 글을 쓰셨는지, 글 내용이 청빈예찬과 점점 유리되어 다른 곳으로 흘러간 느낌입니다. 그리고 앞에서 부와 빈은 객관적인 기준이 없다고 해놓고 뒤에는 다른 소리를 했습니다. 서로 상충이 되는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철학의 기초가 되는 논리적인 사고가 성숙되어 있지 않은 채 글을 쓰신 것이라고 봅니다.

김진식 : 물질적인 부(富)와 정신적 부 가운데서 김진섭 선생이 주제로 내세운 것은 정신적인 부입니다. 그러나 정말로 이분이 정신적인 부를 가졌겠는가 하는 데는 회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청천 선생이 찬양한 것은 오만한 청빈입니다. 청빈을 하나의 무기나 위안으로 생각하는 것은 냉담하고 거만한 태도입니다. 근본적이고 진정한 정신적인 부는 그것과는 다릅니다. 그래서 이 글을 쓴 사람이 진정으로 정신적인 풍요를 지녔겠는가 하는 점에서 약간의 회의를 갖는 것입니다.

 

사회 : 여러 회원들께서 많은 문제를 동시적으로 말씀해 주셔서 토론의 폭이 넓어졌습니다만, 이야기를 조금 좁혀 보겠습니다.

이번에는 청천 수필의 철학성에 대해서 말씀들을 해주십시오. 이분의 글 제목에 ‘철학’이라는 말이 들어간 것이 30여 편이나 되고 헌실과 비판, 오락과 인생, 군중과 여행 등 상대적인 철학 개념을 가지고 작품을 구성하려고 애를 쓴 것도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또 많은 분들이 이분의 수필을 철학 수필, 철학적 수필이라고 합니다. 이 수필에 나타난 철학성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김태길 : 월탄 박종화 선생이 어떤 책 서문에서, ‘김진섭은 최초의 전업적인 수필가요 본격적인 수필, 철학적인 수필을 처음 시도한 사람이다’라고 쓴 것을 읽은 기억이 납니다. 일반적으로 동양의 수필이 서정적인 것이 많다고 한다면 전통적으로 서양의 에세이는 메시지가 있다고나 할까요. 철학적인 문제의식을 담은 것이 많기 때문에 서양문학, 그것도 철학성이 강한 독일문학을 한 사람으로서 김진섭 선생은 자연스럽게 그런 방향으로 간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런데 선각자로서 시도를 한 것은 중요하지만 그것이 성공을 했느냐 하는 것은 또 그 다음의 문제입니다. 그 후의 우리 수필들이 주로 서정적으로 흘렀고, 또 서정적인 수필들이 압도적인 세력을 가지고 온 것으로 보아 크게 성공을 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성공을 했더라면 우리 나라 수필의 양상이 달라졌을 것이고, 중수필 계통이 면면이 이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게 되질 못한 것이지요. 이 글이 철학적 수필로 성공을 하려면 그곳에 담긴 사상이 보통 사람의 것보다 깊거나 높아야 하는데, 이 작품에 나타난 것은 그 시대의 보통 지식인이 가졌을 만한 수준입니다. 철학적 수필이라는 것은 철학이라는 말이 들어간다거나 철학자연(然)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담긴 사상이 철학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회 : 기회가 있을 때마다 사유 수필의 중요성에 대해 말씀을 하시면서 본인은 서정적인 수필을 많이 쓰시는 박재식 선생님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박재식 : 해방 후 교과서에 실린 청천의 수필 ‘창’을 읽고 그 지적인 전개방식에 묘한 쾌감과 지적인 흥분까지도 느꼈었습니다만, 그 후 그분의 작품을 좀더 공부하고 싶어서 다시 보았더니 문체가 조악하고 문장이 껄끄러워서 더 이상 읽지 않았던 기억이 납니다. 수필의 철학성이라고 한다면 수필 속에 담긴 필자의 사상과 인생관이 기조가 되기 마련인데, 이 글에는 그런 깊은 사유와 높은 사상이 그다지 들어 있지 않습니다. 그저 평범한 상식 수준입니다. 게다가 표현도 무척 피상적인 곳이 많습니다. 철학성이 있는 글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회 : ‘수필의 문학적 영역’이라는 청천의 글에 보면, ‘수필은 지성과 감성의 배합이다, 자기 고백적이며 방관자적인 고찰을 갖추어야 한다, 무형식적이며 전문적인 사람만 쓰는 것은 아니다’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런 청천의 이론과 청천 자신의 작품은 일치하는지, 그 둘 사이에 갭이 있다고 보는지, 거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정진권 : ‘수필의 문학적 영역’이라는 글은 예전에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려서 가르친 적이 있습니다만 제 개인적으로는 좀 못마땅한 이론입니다. 그러나 청천 자신의 수필에는 딱 맞는 이론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구나 쓸 수 있고 무엇이나 담을 수 있는 용기이다’ 라고 했듯이, 이분은 자기의 글도 자기의 그 이론대로 썼다고 봅니다. 깔끔하다거나 문학적 향취가 있는 글은 아니지요.

 

사회 : 감성적인 면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십니까?

정진권 : 김진섭 선생의 글 ‘백설부(白雪賦)’에 ‘눈은 겨울의 서정시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어떻게 그런 표현을 할 수 있을까 하고 이양하 선생도 무척 부러워한 구절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감성적인 데가 청천의 작품 속에 있기는 합니다만, 전체적으로 볼 때 정서적인 데가 풍부하지 못하고 관념적인 곳이 많습니다.

문혜영 : 청천은 ‘수필문학의 영역’이라는 글에서, 수필의 특징은 첫째로 자기를 솔직히 드러내는 것이어야 하고, 두 번째로는 인생이나 사상을 방관적인 자세로 생각하고 써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청천 자신은 글 속에 자신이 드러나 있지 않습니다. 글 속에 김진섭이라는 사람은 없습니다. 방관자적인 자세로 생각하고 써야한다는 생각 때문인지 가슴으로 쓰지 않고 머리로, 관념적으로 썼기 때문에 인간이 느껴지지 않는 것입니다. 또 무대에서 연기(演技)를 하는 사람도 보는 사람들이 그것이 연기라고 느껴지면 미숙한 것처럼, 글에서 철학 냄새가 나지 않아야 철학적 수필로 성공을 할 수 있는데 그렇지 못한 것 같습니다. 철학이라는 것을 자꾸 내세웠기 때문에 씹혀지지 않고 삼켜지지 않는 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정규복 : 저는 청천에게서 직접 강의를 들어서 그분의 성격이나 인품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작품을 읽는 느낌이 다른 분들과 좀 다른 것인지 잘 알 수는 없습니다만, 저는 무척 지성적인 분이었다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철학을 수필로 일반화시킨 분으로 상당히 앞선 사고를 지니셨던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곳에서는 지금 청천의 작품을 폄하하는 경향이 있는데, 저 혼자만 옹호한다고 할까 뭐… 그런 느낌은 듭니디만, 저는 이 작품 속에 이분의 지성적인 면과 은근하면서 수식이나 과장 없이 솔직한 인품이 잘 나타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곧 이분의 수필세계이지요.

김진식 : 저는 정선생님과 좀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지성과 감성이 잘 조화되어 있다고 하시지만 저는 그분의 감성적인 데에 괴리를 느낍니다. 그분의 감성은 뜨겁고 강렬하고 웅변적으로 나가는데 그것이 작품 속에서 지성과 조화를 이루었느냐가 문제입니다. 제 나름대로 그 원인을 생각해보았습니다만, 이분은 이데올로기나 자기가 주장하고 싶은 메시지에 근본적으로 접근하지 않고 수단으로 접근한 흔적이 보입니다. 또한 지식으로 받아들인 것을 충분히 소화한 상태가 되어야 관조의 세계로 들어간다고 저는 생각하는데 이분은 그렇지 못합니다. 이것은 자족(自足)이지 지족(知足)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자기의 메시지를 너무 강하게 신랄한 표현을 써서 남을 설득하려고 합니다. 이상 여러 가지를 생각해 볼 때 저는 이분이 내세운 수필 이론과 이분의 작품, 즉 실질적인 것에 상당한 차이를 느낍니다.

고봉진 : 이분의 수필 이론과 잘 맞는 좋은 수필이 있지요. 바로 ‘백설부(白雪賦)’입니다. 그곳에 나타난 지성과 철철 넘치는 감성은 그 외의 다른 곳에서 찾아 볼 수가 없이 조화가 잘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외에 타작이 많은 것이 문제이지요. 이론적이며 지성적인 글이라는 것은 글의 앞뒤가 잘 맞는 글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송규호 : 수신 교과서에 나옴직한 글이며,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중수필에는 틀림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 같으면 이 글은 두서너 줄로 요약해서 다른 글에 넣지, 이렇게 한 편으로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라는 느낌도 듭니다. 또 아까 어느 분이 이 글에 ‘인간이 없다’라고 하셨는데, 저는 생각이 좀 다릅니다. 이 글 자체가 바로 그 인간이 아니겠느냐 하는 생각입니다.

최병호 : 이분의 글에는 다른 분의 글을 원용한 부분이 많습니다. 이렇게 원용한 글을 대할 때마다 저는 ‘수필이라는 것이 대단히 어려운 것이로구나’ 하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남의 글을 완전히 소화를 해야 원용이라도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받아들인 것은 무르익을 수 있는 데까지 무르익어서 내면 속에 흐르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서정성이라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수필이라는 것은 우선 자기의 생각이 이야기를 통해서라든지, 깊은 사유를 통해서 글 속에 나타나 있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사회 : 이제 청천의 문장으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표현이라든지 기교 문제 등, 이분의 문장에 대해 새로운 차원의 이야기를 기대하겠습니다.

김태길 : 이분은 낱말들이나 단어들을 너무 강하게 쓴다는 인상을 여러 번 받았습니다. 우선 이 글의 첫 문장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이분은 첫 문장을 아주 힘들여 쓰신다고 하는데, ‘궁상이 똑똑 흐르는 사상이뇨’에서 ‘사상이뇨’가 너무 강합니다. 그리고 둘째 줄에서 ‘이 황금만능의 천하에서 청빈을 예찬할 만큼 곤경에 빠져 있다는 것은 비참한 일이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의 ‘비참’이라는 말도 너무 강하거니와 이 문장 전체가 깊이 생각을 하지 않고 썼다는 느낌입니다. 또 다섯째 문장에서도 ‘절대로’, ‘무기’, ‘위안’이라는 아주 강한 말들이 나옵니다. 그 외에 여러 곳에서도 그런 것을 찾아볼 수가 있으며, 둘째 문단에서는 문맥의 모순이 느껴지는 곳도 있습니다. 무엇이 부(富)이며 무엇이 참된 빈(貧)인지 모른다고 해놓고 그 다음 줄에서는 마치 다 아는 것처럼 썼습니다. 논리의 모순이 느껴지는 곳이지요. 철학적인 수필을 쓰려면 적어도 논리의 모순은 없어야 성공을 하는데, 그분은 충분히 고민하지 않고 썼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외에도 말을 좀더 적절히 골라 썼더라면 훨씬 더 좋은 글이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곳이 여럿 있습니다.

박재식 : 아까 이분의 문장이 조악해서 구미에 맞지 않는다는 말을 했습니다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개인 기호의 문제이고, 이 글은 중수필다운 개성이 있는 글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수필이 문학다운 맛을 지니기 위해서는 지적 사유를 표현하되 능청스러운 해학과 기지가 번득이는 낱말을 구사해야 합니다. 이 작품의 중간 부분에 있는 ‘문제는 오직 조그만 주머니가 곧 채워질 수 있음에 대하여, 구멍난 대낭(大囊)이 결코 차지 않는 물리적 이유에만 있을 따름이다’라는 문장은 무척 해학적이며 표현의 기지가 돋보입니다. 문체를 볼 때 이분의 문체는 강건체적인 만연체입니다. 만연체는 흔히 부사나 군더더기가 많이 들어가고 과장법과 강조법이 많습니다. 여기서도 ‘확실히’, ‘극구’, ‘절대로’, ‘힘센’ 등과 같은 강한 말들이 많이 나오는데, 저는 이것이 곧 청천의 개성이다, 청천은 개성 있는 문체를 썼다고 하고 싶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배울 바는 그다지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이분의 글에서 이런 말들을 빼버리면 맹물 냄새가 날 것 같습니다.

정진권 : 만연체가 나쁠 것은 없습니다. 쓴 내용이 분명치 못하니까 그것이 문제입니다. 이 글의 뒷부분, ‘두 가지 종류의 빈궁을…’ 이하 부분은 몇 번을 읽어도 도저히 알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도대체 무슨 이야기인가요. 또 그보다 조금 위, ‘또한 사람이 참된 부유를…’에서부터 ‘~지남이 없을 것이다’라는 부분도 역시 말이 되지 않습니다. 또 위안이라는 말이 몇 번 나오는데, 이 말은 ‘자위’라는 말로 써야 되는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마지막 부분, ‘일찍이 디오게네스는…’에서는 문단을 바꾸어야 이 글이 정리될 것 같고, 또 그 부분이 바로 이 글의 결론이 될 것 같습니다.

고봉진 : 디오게네스는 한 마디로 기인이고 정신병자 비슷한데, 이 부분을 청빈예찬의 결론으로 낸 것은 잘못된 것 아닙니까?

김태길 : 디오게네스와 알렉산더의 만남 이야기는 잘못 인용된 것입니다. 여기서 제2유형의 빈자, 즉 마음이 가난하고 냉담하고 거만한 자인 알렉산더가 제l유형의 빈자, 즉 물질적으로 가난한 빈자인 디오게네스 옆을 지나갔다고 한 것은 잘못입니다. 알렉산더를 그렇게 형편없는 속물로 취급한 것은 아주 큰 잘못이지요. 철학적인 수필을 쓰려면 좀더 깊게 증거를 탐구한 후에 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문혜영 : 이 글이 청빈을 예찬한 글인데, 도대체 몇 번을 읽어도 청빈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문장도 만연체인 것은 틀림없는데 독자의 입장에서 글이 납득이 안가고 답답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이유를 제 나름대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 글을 쓰실 때 김선생님은 청빈을 아름답고 소중한 가치로 생각하고 쓰신 것이 아니라, 속되게 이야기하면 가난하면서도 기죽지 않고 사는 방법을 머리에 넣고 글을 쓰다 보니 ‘힘센 무기요 위안이다’라는 식의 무리한 표현들이 나오고 글의 앞뒤가 잘 맞지 않는 이런 식의 글로 흐르지 않았나 싶습니다. ‘도배(徒輩)’, ‘질소(質素)’ ‘전치 할 수 있는’ 등의 표현들도 이해가 안 갑니다.

 

사회 : 언어적인 감각 문제, 언어의 시대성 문제는 전체적으로 시대의 탓으로 돌리기보다는 글쓴이의 개성과 상당히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분의 문장에 대해서는 거의가 부정적인 견해를 말씀하셨습니다. 그 외에 다른 의견들은 없으십니까?

문혜영 :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글의 끝부분에 ‘다른 하나는 정신적 빈궁’에서부터 ‘참된 빈궁을 발견치 않을 수 없다’까지 한 문장인데, 세어보았더니 300자가 가깝게 무척 깁니다. 만연체라는 것은 도대체 그 기준이 어디까지를 말하는 것입니까?

고봉진 : 제 생각으로는 이 문장이 만연체와는 조금 뉘앙스가 다른 요설체라고 봅니다. 요설체의 특징이 보이고 또 번역체의 분위기도 있지 않습니까?

유경환 : 본문 중에 ‘말하자면 밑에는 밑이 있으니까 밑만 보고 또 이 위에도 더욱~’에서 ‘이 위에도’와 글의 뒷부분에 ‘생존에 대한 권위를 이미 잃고, 여기는 영구히~’에서 ‘여기는’은 무슨 이야기입니까? 문장의 논리에 모순이 있습니다. ‘이 위에도’는 ‘이 외에도’로 ‘여기는’은 ‘그것은’으로 고쳐 읽어야 되는 것 아닌가요? 이런 글을 오늘날의 지식의 지표지수나 계량으로 읽는다면 ‘이것도 문장이냐’ 하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글은 1930년대에 쓴 것이고, 그때와 지금과는 60년이라는 차이가 있으니까 그 차이를 인정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정진권 : 시대 문제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옛날 고대 소설을 보면 이것보다 더한 만연체인데도 읽어 보면 모순이 하나도 없습니다. 춘향전 같은 것은 완전한 시(詩)입니다.

유경환 : 전체적으로 이 글을 볼 때, 대학의 문학 강의 시간에 문학 교수가 들어오지 않고 철학 교수가 들어와서 문학에 대한 강의를 대강한 것 같은 그런 느낌입니다.

 

사회 : 문장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서 줄이겠습니다. 이제 마지막 문제로 넘어가서, 이분의 문학적 위상, 즉 우리 문단에서의 위상과 우리 수필사에 이분이 어떤 공헌을 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정진권 : 이분의 수필에 대해서 이런저런 결함들을 거론했습니다만, 어쨌거나 이분은 우리 근대문학사에서 본격적으로 수필을 쓰신 몇 분 중의 한 분이십니다. 수필을 하나의 문학 장르로 완성시켜서 쓰신 선구자적인 공적은 매우 크다고 봅니다.

박재식 : 정선생님 의견과 같습니다. 문학사적인 위상은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뒤를 잇지는 못했지만, 서구적인 에세이라고 할까 그런 중수필을 쓰신 분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글을 모방하고 사사해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만, 중수필로의 이런 방향도 지향해야 한다고 봅니다.

문혜영 : ‘수필문학의 영역’에서 ‘수필은 무엇이나 담을 수 있는 용기이다. 무형식의 글이기 때문에 누구나 또 무엇이나 다룰 수 있고, 어디에서든 끌어들여서 할 수 있다’라고 이분은 말씀하셨습니다. 수필에 대한 애정이 잘 나타난 대목입니다. 다른 분들에 비해 훨씬 더 수필을 사랑하셨고, 수필을 하나의 문학으로 정립하신 분이라고 봅니다.

사회 : 이제껏 아무 말씀이 없으신 변해명 선생과 유혜자 선생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변해명 : 이 글은 만연체라기보다는 번역체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외국문학을 하셨고, 그 당시 지적 수준이 상당히 높으신 분이었기 때문에 멋과 오만이 문장에 가산이 되어 번역체의 난해한 문장이 나왔다고 생각합니다. 글을 읽으면 주제는 파악이 됩니다만, 오늘날 이런 문장을 읽을 사람이 몇이나 될지 의심스럽습니다. 좀 죄송스런 말씀입니다만 그 동안 김진섭 선생에 대한 평가가 너무 큰 비중을 차지해 오지 않았나 하는 회의적인 생각이 들었습니다.

유혜자 : 아까 안빈낙도라는 말씀도 있었습니다만, 옛날 사람들은 물질적으로 풍요롭지 못했기 때문에 청빈을 예찬한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역설적인 주제이지요. 그러나 여기서 김진섭 선생이 예찬한 청빈은 물질적인 가난보다 정신적인 빈곤이 딱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서도 청빈을 역설적으로 예찬할 만큼 그 시대에도 물질이라는 것은 중요하고 필요한 것이라는 것을 이분이 느끼신 것 같습니다. 또 수필을 쓰는 입장에서 이 글을 볼 때, 글이라는 것은 200년 후 300년 후에라도 모두 알 수 있도록 쉽게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태길 : 아까는 부정적인 이야기를 너무 많이 해서 이번에는 긍정적인 이야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나도 이분의 독일어 강의를 한 학기 들었습니다만, 이분은 아주 점잖으신 분입니다. 속세를 떠나 있는 것 같은, 그래서 청빈을 이야기할 수 있을 만큼 초연한 인품을 지니신 분입니다. 그런데 이 글에는 그런 인품이 잘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잘 나타났더라면 좀더 좋은 수필이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 자신을 쓰기보다는 객관적인 것을 쓰는 데 주력했기 때문에 우리 취향에는 조금 맞지 않고 호소력도 약한 것입니다.

유경환 : 어떤 학문의 세계에서는 시대가 변해도 후학에 의해 평가를 받거나 자리매김이 되면 별 관계가 없지만, 문학의 세계에서는 동시대성이라는 것이 빠져 버리면 후학에 의해 평가받고 자리매김이 될 때 아주 냉혹하게 평가된다는 것을 오늘 이 합평회를 통해서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오늘 이 합평회에서 제가 얻은 최대 교훈입니다.

정규복 : 제가 오늘 청천의 친필원고를 하나 갖고 니왔습니다. 오늘 철학 이야기가 많이 나왔습니다만, 이 글의 제목도 ‘칸트철학에 대해’입니다. 한 번 보십시오.

 

사회 : 두 시간여 동안 열렬하게 합평에 참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략 요약을 하고 이 합평회를 마치겠습니다.

일찍이 월탄은 ‘청천은 30년대를 대표하는 본격적인 전업 수필가이다’라고 했습니다. 그의 지적, 사유적 수필을 높이 평가한 것입니다. 오늘의 합평회를 통해서도 이분이 우리 수필문단에서 철학을 일반화시켰으며, 지적 수필을 도입했고, 중수필의 가능성을 수립했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회의적 부정적인 시각도 있었습니다. 논리적으로 모순이 있는데다 표현이 모호하고 과장이 심합니다. 내용도 개념적이며 상식적인 서술이다, 또한 어휘의 과장성과 문장의 만연성, 번역체 느낌이라는 평과 문법에 맞지 않는 구석에 대한 지적도 있었습니다. 역사를 재정리하는 객관의 시각으로 비판적인 합평회였습니다.

오랜 시간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