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길에서

                                                                                          김 효 자

 몇 사람의 동호인들이 모여서 근대의 작고 작가들의 유적을 보존하는 작은 일을 시작한 지 어느덧 7년이 되었다. 작가의 고향과 작품의 산실, 그리고 작품 무대를 찾아서 그냥 내버려두면 잊혀지고 말 것 같은 곳에 그분들이 한 일을 적어 표지석을 세우는 일을 하는 것이다. 그 고장 사람들이 우리가 하는 일의 뜻을 얼마나 이해하고 그것을 잘 보존해 주고 있는지, 회원들이 함께 모여 가끔 돌아보며 그 지역 사람들을 만나 보고 회원들의 친목을 도모하는 것도 우리의 중요한 일의 하나다.

이번에 돌아본 전남 지역만 해도 그 사이에 박화성 선생의 고택이 헐려 도로로 변하였고, 극작가 김우진 선생의 집필실이 있었던 한옥도 흔적 없이 사라졌다.

다행히도 박화성 선생의 유적비는 그분의 유품이 영구 전시되고 있는 목포 향토문화원 뜰 안으로 옮겨지고, 김우진 선생의 경우는 그 저택을 기증받은 천주교 성당이 그 자리에 노인들을 위한 복지관을 신축하고 조경이 잘된 잔디밭을 가꾸어 유적비를 거기에 옮겨 놓고 있었다. 변화의 신속함을 새삼스레 실감하면서 우리가 세워 놓은 것들의 운명은 그 지역 사람들의 문화의식에 의탁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장마철의 변덕 많은 날씨였지만 용케도 비 한 번 맞지 않고 5기의 유적비가 세워진 전남 지역 순방을 무사히 마쳤다. 내친걸음에 하루를 더 묵으면서 대흥사가 있는 해남과 강진의 김영랑의 고가, 다산 초당을 돌아보자는 것이 우리의 이정표다.

목포에서 나와서 영산강 하구언을 지나 2번 국도를 따라가자면 해남, 영암, 강진 세 갈래로 갈라져 가는 길목에 영암의 학산면 소재지인 독천리가 있고, 나의 고향은 이 독천리에 속해 있는 광산 마을이다. 내가 5학년 때까지 다녔던 서창 초등학교는 독천으로 가는 이 도로변에 있다. 우리 집 6남매는 모두가 이 학교에 다녔고, 형제의 맏이인 큰언니는 몇 명 안 되는 이 학교 최초의 여학생이기도 했다.

이번에 내려가 보니 영산강 하구언으로부터 서창 학교까지는 불과 20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우리가 어렸을 때 신작로라 불렀던 이 도로는 아무렇게나 깨부순 돌이 거칠게 깔려 걷기 사나운 길이었는데, 학교 길에서 자동차와 마주치는 것은 큰 고역이었다. 자갈이 튀고 먼지 세례를 받는 것도 부담이지만, 그것보다는 지나가며 내뿜는 카바이드 냄새가 얼마나 지독했던지 그것을 맡기만 해도 나는 멀미가 났었다.

이 고장에서 목포에 가장 가까이 있는 나루터인 용당리까지는 족히 5십리는 되는 거리였지만, 몹시 차 멀미를 하던 나는 이 길을 혼자 걸어서 목포에 나가 살고 있는 언니들을 찾아다녔다. 어린  걸음으로 한나절이 걸리는 거리였다. 지루했던 그 길목 한 구비 한 구비가 눈에 익어 아직도 기억에 선한데, 오랜만에 찾아든 고향 길은 어찌나 변했는지 모든 것이 낯설고, 하마터면 서창 학교도 지나쳐 버릴 뻔했다. 도로가 직선으로 확장되어 숲을 사이에 두고 학교 후면으로 새로 나 있고, 정문 앞으로 우회하던 옛길은 사람의 왕래조차 없는 듯 아스팔트가 패이고 반은 잡초에 가리어져 있었던 것이다. 학교로 들어가는 오르막길 양편에 있었던 뽕밭은 무궁화 밭이 되었으나 교문은 옛 모습 그대로 허름하게 서 있고, 새로 지은 2층 교사가 우거진 숲을 배경으로 눈부시게 흰색을 드러내고 있다. 이제 와 보니 그 넓던 운동장이 길이 6~70미터나 될지, 가장자리를 둘러서 심은 벽오동이 그대로 남아 있어 정겨웠다. 젊고 매끈하던 나무 그루가 턱없이 굵어지고 울툭불툭하여 고목의 티를 내며 그 사이에 흐른 세월을 일깨워 주었다.

두 대의 승용차에 분승한 우리 일행 열 명이 작은 운동장을 한 바퀴 휙 돌아서 나오는 그 한순간에 이 교정에서 일어났던 옛 일들이 두서없이 엉클어지며 마음 속에 되살아났다. 즐거웠던 추억들은 세월이 흐를수록 빛이 바래고 희미해지는 것일까, 그저 아련한 그리움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와는 반대로 마음에 걸리고 슬펐던 일들이 음영을 던지며 어릴 적 나의 모습이 되어 떠올랐다.

무슨 영문으로 그런 일을 했는지 알 수 없으나, 운동장에 모이는 조회 시간에 나는 선생님들이나 올라가는 교단 위에 서 있었다. ‘모모타로’라고 하는 이야기를 외우다가 얼마 못 가서 막혀 울상을 하고 있는 모습이다. 1학년 때의 일이었을까?

그 시절에는 군 장학사의 시찰만큼 무서운 것은 없는 줄 알았다. 그들이 시찰을 나오는 날이면 온 학교가 얼어붙은 듯이 긴장했다. 전교생이 운동장에 서서 그들을 맞이하기 위해 기다리고 서 있을 때 문득 선생이 와서 앞자리의 나를 뒤로 밀고 그 자리에 다른 아이를 내다 세웠다. 줄의 맨 앞자리는 반장 자리로 아무나 설 수 없게 되어 있었다. 그 일을 한 선생이 누구인지 내 자리를 대신한 아이가 누구였던지 기억에 없다. 그 무렵 위로 형제들은 다 도시로 나가고, 어머니도 없는 집에서 두 살 맏이인 언니와 내가 살림을 하며 학교에 다녔었다. 학교에서 찍은 언니의 단체 사진이 한 장 있었는데, 훗날 철들어서 유심히 보니, 유독 멋쟁이로 보이던 우리 언니는 남들이 다 검정색 핫저고리를 입고 있는데 혼자만이 흰색 반 소매 블라우스를 입고 있는 것이었다. 철이 늦게 들어서 자기의 매무새 따위는 의식하지도 않고 학교를 다녔었지만, 철에 맞춰 옷을 갈아 입혀 주는 것은 역시 어른들이 할 일이었을 것이다. 내가 왜 그리 추위를 탔는지, 쉬는 시간에 뛰놀지 않고 해 바라지 하다가 완장을 차고 다니는 상급생에게 내몰리는 일도 여러 번 있었다.

나는 또 남들이 손꼽아 기다리는 운동회가 다가오는 것도 별로 기쁘지가 않았다. 오후가 되면 기운이 없고 뙤약볕에서 단체 유희 연습을 할 때마다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리고 싶을 만큼 몸을 추스르기 힘이 들었다. 풍금을 치며 유희를 가르치던 선생님은 자주 내 이름을 부르며 “기운 차리지 못해!” 하며 꾸중하셨다. 그분이 바로 내가 언제까지나 잊지 못하는 김선호 선생님이다. 무슨 근거에서인지 몰라도 나는 그분이야말로 공정하게 아이들을 대하고 모나지 않게 동족을 사랑하는 훌륭한 분이라고 믿었었고,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운동회 날의 하이라이트는 달리기 시합과 점심 시간인데, 그 둘이 다 나에게는 부담스러웠다. 달리기를 못하는 것이 왜 그리도 창피한 일이었던지 꼴찌만 면해도 살 것 같았다.

점심 시간에 언니와 나는 외톨박이가 된다. 우리에게 어머니가 안 계시다는 것에 대해 평소에 느끼지 않던 부끄러움 같은 것을 느끼는 날이기도 했다. 아버지의 자식 사랑은 좀 유별나서 큰언니의 알선으로 어렵게 모셔들인 새어머니조차도 우리 곁에 오래 머물지 못하게 했다. 때로는 어린것들의 고생이 측은한지 혀를 끌끌 차면서도 가끔이나마 어머니의 일을 대신한다는 것은 발상조차 못하는 분이었다. 하기야 오늘날에도 아버지 같은 생각이 몸에 베어버린 남자들은 얼마든지 있고, 그렇게 하는 것이 남자의 권위라고 여기는 시어머니들도 있으니, 우리 아버지가 그럴 수도 있었겠구나 하고 수긍이 간다.

목포로 전학하여 학교를 떠나오던 날 반 아이들이 모두 교문 앞까지 나와서 울며 전송해 주었다. 풋감, 올벼쌀, 밤… 그런 것들이 이별의 선물이었다. 형제들 곁으로 아주 간다는 기쁨이 가슴에 차 있으면서도 줄곧 흐르는 눈물을 닦으면서 벌판으로 들길을 달려 집에 갔던 것이 바로 어제 일 같다.

이제 와 생각하면 나의 유년 시절은 결코 평탄한 것이었다고 말할 수 없다. 생활감각이 별로 없는 아버지 밑에서 살림을 하느라고 분에 넘칠 만큼 힘도 들었겠지만, 그러나 그런 일들에 따르는 마음 고생은 집을 떠나 직장 생활을 하면서 아우들을 멀리서 돌봐야 했던 형들의 몫이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나의 유년 시절을 지내는 동안 자신이 불행하다고 의식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리고 이것은 근거 없는 독단일지 모르지만, 남들이 모두 나를 존중해 주고 조심스럽게 대해 주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쩌면 개구쟁이로 소문이 난 동갑내기 내 오촌이 학교 길에서 모든 여자아이들을 놀리고 울리고 하면서도 나만은 늘 점잖게 대해 준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그 오촌도 이미 저세상 사람이 되고 말았다.

우리 일행이 왜소한 시골 학교를 돌아본 소감으로 “개천에서 용 났네요.”라며 나를 놀렸다. “제가 이렇게 시골뜨기인 줄은 몰랐었지요?” 대답하면서 나야말로 진짜 시골뜨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무엇보다도 흙을 좋아한다. 그리고 농부들처럼 그것이 무엇이든 일을 무서워하지 않고 궂은 일도 싫어하지 않는다. 설령 가진 것을 다 잃더라도 사람만 성하면 살 길은 반드시 열린다고 하는 신조가 있다. 이런 나의 기질은 유년 시절 내 고향이 나에게 부어 준 자양으로 길러진 것들이다. 남들이 가진 것을 주제넘게 넘보지 않고 그러기에 크게 낙담하는 일도 없이 하루하루를 다지듯이 그냥 살아온 나, 심고 기다리고 주는 대로 거두어 들이는 농사꾼의 마음으로 살아온 것 같다. 그러나 그 이면에 어리는 체념의 그림자는 너무 일찍, 가장 소중한 어머니를 잃은 그늘이 아닐지 조금은 서글프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