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에 나온 반달

                                                                                             權 一 周

 한계령을 굽이굽이 돌아 내려온 버스는 무거운 짐 한 덩이를 풀썩 내던지듯 그렇게 우리를 정류장에 부려놓고 부~웅 소리를 내며 가볍게 떠나갔다.

오색 시외버스 정거장. 언니네 부부와 우리 둘, 이렇게 넷은 설악산 대청봉을 오르기 위해 아침 일찍 서울을 떠났다. 내설악 산자락으로 구불구불 이어진 아스팔트 길은 쏟아지는 6월 중순의 뜨거운 햇살로 눈이 부시도록 하얗게 빛이 나고 있었다. 그 뜨거운 햇빛 속에 내려선 순간 나는 몇 시간 전의 그 용기 백배하던 기분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 드는 것을 숨길 수가 없었다. 그것은 일종의 불안감이었다. 장시간 시외버스에 시달린 피로감 때문인지 눈을 바로 뜰 수 없을 만큼 강한 햇빛 때문이었는지 잘 알 수는 없었다. “당신은 할 수 있어”라는 남편의 말 한마디에 앞뒤를 잘 생각해 보지도 않고 선뜻 배낭을 메고 나선 내가 무모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회의도 들었다. 이 더위 속에 정말로 내가 대청봉을 올라갈 수 있을 것인가. 게다가 우린 모두 만만치가 않은 나이이다. 열 시간이 훨씬 넘을 것이라는 산행을 하기엔 고령이라면 고령들이다. 조금 전, 버스에서 내릴 때 언뜻 피부에 와닿던 느낌, 왠지 모르게 고도(孤島)에 나 혼자만 ‘내팽개쳐진 듯한’ 느낌이 들던 것도 바로 이 불안에서 온 것이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어쨌거나 이미 떠나온 길, 이제 와서 이러쿵저러쿵 해봐야 눈썹 하나 꿈쩍할 남편이 아니다. 거기다 대고 이런저런 구실을 붙여 보았자 헛수고요 종내는 밑지는 장사가 될 것은 삼십 년에 가까운 경험으로 보아 분명한지라, 나는 입을 꾹 다물고 모자를 꺼내어 천천히 머리에 얹었다.

이번 산행은 오색에서 시작하여 대청봉을 지나 회운각 대피소와 양폭폭포를 거쳐 설악동으로 내려가는 코스이다. 콤파스와 줄자를 가지고 계산하는 공과대학 출신인 형부는 평소 우리의 산행 수준으로 보아 열네 시간은 족히 걸릴 것이라고 했고, 낭만파 기질에 이상주의자인 남편은 열 시간이면 충분할 것이라는 이상론을 폈다. 결과는 두고 볼 일이고, 우리는 우선 입구의 안내소에 들러서 이것저것 필요한 정보를 얻은 후에 이튿날 아침 새벽 다섯 시부터 산행을 시작하기로 결정을 했다.

숙소를 정해 놓고 이번 산행의 팀장격인 형부의 제안에 따라 우리는 내일을 위한 워밍업에 들어갔다. 오색 약수터를 지나 l㎞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는 성국사라는 절터까지 다녀오며 다리를 풀어야 한다는 계획이었다. 여관방 구석에 배낭을 풀어 던져놓고 숲길로 들어섰다. 편한 옷에 튼튼한 등산화, 거기다 등짐을 내려놓고 양손에 든 것도 아무것도 없으니 그야말로 홀가분하기 이를 데 없다. 저절로 두 팔을 앞뒤로 힘껏 휘두르며 휘휘 걷게 되었다. 그러자 얼마 가지 않아서 나는 방안에 풀어놓고 온 것이 등에 짊어졌던 배낭뿐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조금 전까지 불안불안했던 마음 자락과 도시에 훌쩍 내려놓지 못하고 배낭과 함께 등에 짊어지고 왔던 서울의 내 일상에 얽힌 그림자들도 모두 함께 내려놓고 왔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나 할까.

오색 약수터를 지나 한켠으로 계곡을 끼고 숲속으로 이어진 길은 나무 그림자만 한가롭게 누워 있을 뿐 6월의 녹음 아래 텅 비어 있었다. 그 휑한 공간 속에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바람 따라 휘휘 늘어지는 나뭇가지들의 몸짓, 발끝에 채이는 초록 풀잎에서 느껴지는 작은 떨림들, 투명하게 맑은 계곡의 물 속에 잠겨 있는 6월의 하늘, 그 푸른 하늘 속에 얼핏얼핏 스쳐가는 구름 조각들. 많은 세월 동안 내가 잊고 살아온 그런 것들이 여전히 거기에서 숨을 쉬며 살아 있었다. 그런 것들을 까맣게 잊고 나는 얄팍한 내 통장을 들여다보며 나는 너무 가난해, 난 너무 추워 하며 늘 어깨를 움츠린 채 볼멘 표정으로 살지 않았던가 하는 깨달음 같기도 한 생각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거기엔 앞서가는 사람의 뒤통수도 없었다. 뒤를 따라오며 떠다밀듯 걸음을 재촉하는 이도 없고, 내가 살아온 세월의 무게를 다는 추(錘)도 골밀도(骨密度)를 측정할 기계도 없었다. 주위를 둘러보고 나무 사이를 아무리 헤쳐보아도 보이는 것은 오직 하늘과 바람과 나무들뿐이었다.

“이쪽으로 내려와서 이 물 한 모금만 마셔봐.”

어느 틈에 내려갔는지 언니의 목소리가 계곡 아래서 나를 깨웠다. 웃으며 건네준 바가지를 받아 꿀꺽꿀꺽 물을 들이키다가 무심코 하늘을 보던 나는 나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저것 좀 봐. 반달이야, 반달. 낮에 나온 반달이네.”

동요 속에나 있던 낮에 나온 반달이 저만치 열린 푸른 하늘가에 선명하게 떠있는 것이었다.

“낮에 나아-온 바-안 달은 하-얀 바-안 달은 해-엔님이 쓰다버린 쪼-옥박인가요”

누구인가 먼저 노래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노랫소리는 금세 합창으로 변해서 계곡 속으로 퍼져나갔다. 계곡을 흐르는 물 소리는 훌륭한 반주자였다. 주름진 얼굴도 그 속에 묻혔고, 쉰 목소리도 물 소리와 함께 쓸려 흘러갔다. 낮에 나온 반달은 우리에게 있어서 세월의 강을 건너는 거룻배였다. 우리는 그 배에 훌쩍 올라타서 40여 년의 세월을 쉽게 건너갔다. 더구나 옆에는 함께 자란 두 살 터울의 언니가 있었다. 기억의 공유 면적이 클 수밖에 없고 그것은 굉장한 몫을 했다. 우리는 쉽게 유년의 땅, 그 평화롭고 욕심 없던 열두어 살로 돌아갔다. 거기에서 나는 이미 이 세상에는 계시지 않는 젊으신 어머니의 얼굴도 뵐 수가 있었고, 안경 너머로 늘 말 없이 바라보시던 아버지도 뵐 수가 있었다. 까까중 머리의 오빠들, 그리고 재작년에 먼저 저세상으로 간 막내 동생도 만날 수 있었다. 진한 그리움들이 아릿하게 가슴을 파고들었다.

저녁식사가 끝나고 여관으로 돌아왔지만 우리는 여전히 강 저쪽에 머물러 있었다. 아무도 되돌아오는 배의 승선표를 손에 쥐려고 하지 않았다. 게다가 저녁을 먹으며 곁들인 맥주 한 잔은 세월의 강 저쪽에 머물 수 있는 숙박권이 되었다. 여관방에 두 발을 나란히 뻗고 벽을 기대고 앉아 우리는 앞다투어 머리 속에서 음악 책의 페이지를 넘기고 또 넘겼다. ‘올드 블랙 조’도 나오고 “우-울 밑에 귀뚜라미 우-울던 다-알 밤에”도 나왔다. ‘오 수잔나’, ‘켄터기 옛집’, ‘로렐라이 언덕’들이 가사가 뒤바뀌기도 하고, 상처가 많은 레코드판을 듣는 것처럼 껑충껑충 소절이 뛰어가기도 하면서 등장했다. 그러나 아무도 그런 것을 꼬치꼬치 따지거나 수정하지 않았다. 그런 것은 이미 아무런 문제가 되는 일이 아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늦은 밤까지 여관방에 울려 퍼진 노래는 차라리 주문(呪文)이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큰 의식을 앞에 두고 기원을 드리듯 모여 앉아 부르는 노래들, 주문(呪文)들. 그날 밤, 나는 무엇을 위해 그토록 열심히 주문을 왼 것이었을까. 산행을 무사히 마치게 해 달라는 주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라는 느낌이 두고두고 마음 속에 맴돈다. 그 소중했던 기억만이 가슴에 남아 지금도 나는 자꾸자꾸 주문(呪文)을 외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