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기쁜 날

                                                                                           박 혜 경

 비 내리는 공원을 걸으며 빗방울들의 마지막 발자국 소리를 듣는다. 어떤 음악보다 맑고 아름답다. 웅덩이에 떨어진 빗방울들은 조그마한 동그라미를 급하게 만들며 그 속으로 사라진다. 빗방울들은 어떤 길을 쉬지 않고 달려와 이 시간 대지 위에 기꺼이 몸을 맡겼을까.

어느 시인은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그고 싶다고 노래했지만, 어떤 사물도 꼭같은 만남을 반복할 수는 없다. 모든 것은 흘러간다. 같은 나뭇가지의 같은 위치에서 돋아난 잎이라도 작년의 잎사귀는 이미 낙엽이 되어 땅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와의 첫 입맞춤도 영원히 미풍에 날아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오빠의 목에 올라앉아 집으로 돌아가던 저녁, 유난히 반짝이던 여름 밤하늘, 감미로운 음악, 금박 조각으로 부서져 누운 강물, 꿈, 열정, 탄식, 눈물방울,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을 떠올린다. 지나가버린 하잘것 없는 부스러기들이 모여 추억을 만들고, 우리 몸에 스며든 추억의 힘으로 우리는 현재의 길을 간다.

몇 년 전이었다. 너무나 소중하게 가꾸어왔던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온몸은 절망으로 까맣게 타들어갔다. 삶의 의욕을 놓아버린 하루하루가 위태롭게 넘어갔다. 그때 저녁만 되면 하루를 넘긴 내가 가여워서 목이 메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때 나는 전생에 무슨 죄가 많아서 이런 일을 당하나 생각했다. 전생을 믿지도 않으면서 오늘 당하는 괴로움의 책임을 과거로 전가시키다 못해 전생까지 들먹이게 되었으니, 얼마나 나는 책임 전가에 능란한가.

 

크고 작은 상처들로 영혼에 흠집이 생긴다. 그런 지워지지 않는 흠집들로 인해 유연성을 잃어버린 딱딱한 사람이 되어 간다는 게 내가 입은 상처보다 더 참을 수 없었다. 작은 자극에는 긁히지 않는 굳은 살과 같은 심령은 얼마나 끔찍한 영혼의 부패인가.

점점 고통 속에 빠져 문을 꼭 닫고 지내는 날이 많아졌다. 주위에서는 사람들을 만나고 정신없이 바쁘게 시간을 보냄으로 상처를 치유하라고 권했다. 그러나 정작 나를 다시 열어준 건 깊은 침묵이었다. 내가 탄식과 원망을 그치고 잠잠해졌을 때 굳게 다물었던 나의 내면이 입을 열어 속삭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 후 더 깊은 침묵 속에서 나와는 먼 곳에 초월자로만 존재하는 줄 알았던 그분이 내 안에 거함을 느끼게 되었고, 그분의 목소리로 들을 수 있게 되었다.

그 목소리는 시간이 갈수록 내가 무릎을 꿇는 새벽에만 들리는 게 아니었다. 문득 걸어가다 만나는 고층빌딩 사이로 얼굴을 내민 달, 나뭇가지 끝에 막 돋아난 연초록 이파리, 시원하게 투신하는 빗방울의 함성이 내 귀를 두드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과거의 일들이 원인이 되어 현재에 보응을 받고 현재의 행동이 미래를 결정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좀더 나은 삶을 위해 많은 밤들을 깨어서 애를 쓰기도 한다. 그렇지만 평생 착하게 살던 사람들이 재난을 당하는 일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과거는 현재를 이루는 요소들 중의 하나일 뿐 다는 아니다. 일부분일 뿐이다. 그 나머지는 초월자의 개입으로 움직인다고 믿게 된 나는 현재를 보는 생각을 바꾸었다. 과거가 현재를 결정하는 게 아니고 미래가 현재를 움직인다고. 미래가 소리쳐 우리를 부른다고. 고가도로를 올라가는 자동차들을 바라본다. 전조등을 켜고 빠르게 달려가는 자동차들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나.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기에 저렇게 서둘러 달려갈까.

이제 비디오를 거꾸로 돌린다. 거꾸로 돌아가는 시간은 나에게 속삭인다. 자동차가 빗길에 미끄러져 다리 밑으로 굴러 일가족이 죽은 게 아니라 그들은 사고를 당하기 위해 그 길을 달려갔다고. 그들이 결혼하게 된 것은 바로 옆집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결혼하기 위해서 그렇게 여러 번 이사한 끝에 옆집으로 이사를 갔다고. 그 삼겹살 조각은 구워졌기 때문에 상추로 싸여진 게 아니라 그의 입으로 들어가기 위해 프라이 팬에 놓여졌다고. 그 삼겹살이 그때 프라이 팬에 놓이기 위해 살아온 일생을 잠시 추적해 본다. 프라이 팬에 놓인 시간에 맞추기 위해 엄마 돼지의 배에서 빠져 나오려고 필사적으로 발버둥을 친 일이며, 그 엄마 돼지가 또 그의 엄마의 자궁에 수태된 날과 시간을 상상하다 보면 삶은 참 경이롭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현재를 과거의 결과라고 보던 사고를 현재를 미래의 그림자라고 바꾸자, 미래에 대한 걱정과 불안이 사라졌다. 이미 미래는 정해져 있으니까 열심히 즐겁게 사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다. 힘든 일이 닥쳐와도 절망하지 않고 정해져 있는 미래에게 기쁘게 달려가기만 하면 된다. 오! 오늘도 기쁜 날이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 <로마서 8장 18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