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인 천료작 -

화장터 허깨비

                                                                                                   김 형 진

 나는 거의 십년 동안 하루 일과를 화장터 앞에서 시작하여 화장터 앞에서 끝내 왔다. 내가 출퇴근할 때 이용하는 시내버스의 종점이 화장터 바로 코앞이고, 이 화장터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약간 비탈진 포장도로를 1백 미터 정도 올라간 곳에 내가 근무하는 학교가 있으니, 출근을 할 때에는 화장터를 마주 보며 버스에서 내려야 하고, 퇴근을 할 때에는 화장터를 바라보며 버스를 기다리곤 해야 했던 것이다. 그럴 때 화장터 쪽을 살펴보면, 사람들의 눈을 피해 소나무 숲 속으로 구부러져 들어간 비포장도로가 끝나는 곳에 주차장으로 사용하는 빈터와 단층짜리 하얀 슬래브 집이 어른어른 숨어 있을 뿐, 그곳이 화장터라는 선입견만 빼버리고 본다면 아무런 거부감도 일지 않는 그저 범상한 시설물이었다.

학교측에서 이 화장터 옆에 새로 교사(校舍)를 지어 이사할 것이라는 계획을 발표했을 때,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교직원들은 말할 것도 없고, 학교와 관계가 있는 많은 사람들은 강한 불만을 표시했었다. 도시의 이상(異常) 비대 현상으로 인하여 교실 바로 앞에 폭넓은 차도가 나고 운동장 주변에 고층 아파트가 둘러서는 바람에 학교가 더는 버틸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는 점은 누구나 공감하는 일이요, 또 도시 비대화의 추세로 볼 때 어차피 이사를 할 바에는 가능한 한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곳을 택할 수밖에 없었으리라는 점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으나 왜 하필이면 화장터 옆이냐는 것이었다.

나는 그때까지 화장터 굴뚝 한 번 본 적이 없었지만, 화장터라는 명칭만으로도 무언가 불길하고 으스스한 곳이라는 선입 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러한 내가 화장터 옆으로 이사를 한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퍼뜩 떠올린 것은 어린 시절 마을 옆에 있던 공동 묘지와 그 공동 묘지 기슭에 숨어 있던 상여 집이었다. 어린 시절 내 또래의 아이들은 부슬부슬 비가 내리는 밤이면 공동 묘지 쪽에서 귀신 우는 소리가 들렸다든가 상여집 지붕 위에서 귀신불이 춤을 추는 것을 보았다는 소문에 시달렸었다.

언젠가 한 번은 아이들끼리 무시무시하면서도 흥미진진한 시합을 한 적이 있었다. 여름철의 지루한 하루 해가 뉘엿뉘엿 기울어 갈 무렵 공동 묘지 옆 상여집에 들어가 그 안에 간수되어 있는 상구(喪具) 한 조각을 뜯어 오는 사람을 가리는, 담력 시합이었다. 그때 용기를 내어 처음으로 상여집 바로 앞까지 접근한 나는 머리카락이 쭈뼛 곤두서는 무서움과 어찔한 취기(臭氣)에 기가 질려 전진을 포기하고 돌아서는 수모를 감내해야 했었다.

학교를 옮긴 뒤 얼마 동안은 아침마다 시내 버스에서 내려 화장터와 맞닥뜨리게 되면 어린 시절의 그 상여집이 되살아나 눈앞이 캄캄한 현기증을 느끼곤 했다. 그럴 때면 머리를 흔들어 정신을 수습하고 나서, 시내와는 알아 보게 다른 산 속의 맑은 공기를 폐부 깊숙이 들이마시며 살아 있는 나를 확인하기 일쑤였다.

학교가 이사하기 전까지는 그렇게 불평이 많던 동료 교직원들도 이사를 한 뒤부터는 불평 대신 위안거리를 찾고 있는 것 같았다. 어떤 때에는 오늘은 출근길에 장의차를 세 대나 보았으니 무언가 재수 있는 일이 생길 거라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하고, 숙직하는 동료를 남겨 두고 퇴근할 때에는 오늘 밤에 천하 일색의 처녀 귀신이 찾아 올 테니 잘해 보라는 싱거운 농담을 던지는 이도 있었다. 어떤 이는 좀더 직설적으로 화장터가 겁난 곳인 줄 알았더니 이제 보니 별것  아니라는 듯 언제 날을 잡아 화장터 견학이나 한번 가 보자며 큰 소리를 치기도 했다.

그 무렵 나는 화장터 굴뚝에 관심이 쏠려 있었다. 한번은 4층 교실에서 수업을 마치고 나오면서 무심히 화장터 쪽 창 밖을 내다보다가 소나무 숲 위로 삐죽 내민 하얀 굴뚝에서 솟아오르는 회색 연기에 시선이 붙들린 적이 있었다. 화장터 굴뚝에서 솟아오르던 회색 연기는 미처 일 분을 다 채우지 못한 채 사그라지고 말았다. 슬픔인지 전율인지 분간 못할 느낌이 전류(電流)처럼 온몸을 휩쓸고 지나갔다. 그 뒤부터 나는 그 교실에 들어갈 때나 나올 때에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화장터 굴뚝을 내려다보는 버릇이 생겼다. 처음 얼마 동안은 푸른 소나무 숲 위로 고개를 내밀고 서 있는 하얀 화장터 굴뚝이 저승을 향해 떠날 손님을 기다리고 있는 비행물체처럼 흉측해 보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화장터 굴뚝은 무서운 가면을 벗고 한낱 시멘트 구조물에 지나지 않은 본래 모습을 되찾아갔다.

그래서였을까. 학교가 이사한 지 일년이 채 못되어 동료 교직원들의 대화 속에도 화장터 이야기가 사라졌다. 또 얼마 뒤에는 화장터 바로 코앞인 시내 버스 종점 바로 옆에 가건물 두 채가 들어서더니 서점과 음식점을 차렸다. 이듬해 봄부터는 우리 학교의 조경과 주변의 경치가 뛰어나다는 소문이 났는지 구경꾼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름부터는 우리 학교 지하수가 약수에 버금간다는 소문에 이끌려 캄캄한 밤중에 물을 받으러 오는 사람이 많아, 숙직원이 물을 지키는 일에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는 일까지 생기게 되었다.

요즈음도 내가 출근할 때마다 타야 하는 시내 버스는 어김없이 화장터 입구에다 나를 내려 놓는다. 날씨가 흐릴 때엔 화장터 쪽에서 솔솔 풍겨 나오는 향 냄새가 제법 머리를 맑게까지 한다. 요즈음에는 내가 화장터 앞에 서 있다는 사실마저 까맣게 잊어 버리고 지낸다. 화장터 입구 소나무 그늘에 모여 앉아 밝게 웃으며 이야기를 하고 있는 버스 기사들의 표정은 초상집 마당에서 술에 취해 떠들어 대는 문상객들의 표정과는 판이하다. 그들도 그곳이 화장터 입구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는 것이리라.

꺼려하는 것을 멀리 할수록 두려움은 커지고, 두려움이 커지면 실체는 숨어 버린다. 그래서 실체와는 거리가 먼 허깨비를 보게 되고, 진원 모를 냄새를 맡게도 된다. 그러나 실체에 한 발 가까이 다가서서 보면 그것은 순전히 얄궂은 관념의 작희였음을 깨닫게 된다. 우리가 가장 꺼려하는 죽음의 공포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다.

 

 

김형진(본명, 김길전)

1941년, 전북 부안군 줄포 출생.

1964년, 전북대학교 국문과 졸업.

1983년, 수필집 『황토에 부는 바람(공저)』 냄.

현재 살레지오고등학교 교사.

주소: 광주시 북구 용봉동 대신파크 20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