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나무 면회기

                                                                                    許 世 旭

 첫번째 그 녀석과의 재회는 눈시울이 젖도록 설레임인지 아픔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그 녀석이 지금 노천 극장을 에워싼 정원수에 끼여 당당히 자리 하나를 차지한 것은 다행한 일이지만, 어찌 그 몰골이 우리 집 뜨락에 섰을 때만 못해 보였다.

더벅머리 총각처럼 덥수룩했던 우산 모양의 가지들이 죄 싹둑싹둑 잘린 채 꼭 논산 훈련소에 갓 입영한 훈련병의 모습이었다. 시쳇말로 스포츠형 머리라서 시원하게 보는 사람도 있었지만, 스무 살이 넘어 벌써 어른이 된 녀석에겐 당치 않은 스타일이었다.

작년 봄에 옮긴 탓도 있었다. 시들시들 기운을 챙기지 못한데다 벌써 절반쯤 잎새를 떨구고 노오랗게 성긴 잎 사이로 겨우 열몇 개의 홍시를 애써 달고 있는 꼬락서니가 밥 빌어먹는 소년이 문간 저켠에 우두커니 코를 빼고 서 있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몹시 반가웠다. 사람이면 와락 껴안으련만 그럴 수도 없어서 나는 감나무에 다가선 채 연신 그 한 뼘 남짓의 줄기를 쓰다듬었다. 손바닥에 잡히는 까실까실한 촉감으로 그 갈증은 예나 다름없었다. 더구나 거의 이십 년이나 어루만졌던 나의 손바닥임에랴! 다만 그 녀석은 예대로 말이 없었다.

이 녀석과 내가 주객이 된 것은 거의 이십 년 전, 그러니까 언젠가 해외 나들이에서 돌아오니 우리 집 휑한 뜨락에 웬걸 넉넉한 감나무 한 그루가 꿈처럼 버티고 서 있었다. 아내가 월부로 사들인 것이다. 그 까닭을 모를 리 없다. 녹화를 위해 마당을 채우고 내 주전부리의 얼마쯤이라도 챙겨 보겠다는 속셈이었지만, 그보다는 늦가을 파란 하늘에 빨간 감 몇 가지의 동양화 한 폭을 우리 집 뜨락에 걸어 보겠다는 배려일 것으로 짐작되었다.

과연 우리는 한 식구처럼 끔찍이도 정속했었다. 이른 봄, 감나무 가지마다 작은 눈처럼 새싹이 돋을 때부터서였다. 4월이면 잎으로 자라고 5월이면 감꽃으로 색깔을 올렸다. 감꽃이 지면 그걸 주워서 꾸러미를 만들고, 그 궁둥이를 빨아서 단물을 씹기도 했다. 다시 7월이 오면 내게는 새로운 일과가 생겼다. 땡감이 몇일까? 이 녀석을 맞은지 꼭 3년째, 땡감 다섯 개를 보고 환호했었다. 그걸 글로도 남겼다. 8월이면 땡감의 볼이 불룩해지면서 앙증스레 얼굴을 감추다가 9월이면 감잎을 제치면서 싱싱한 성숙을 자랑했었다.

그러나 10월이면 내가 바빠졌다. 신이 나서 바쁜 것이다. 글쎄, 이 감나무를 이식할 때는 미처 그 수종조차 알 턱이 없었다. 그 이듬 이듬해 감이 열리고서야 그것이 단감나무, 단감 중에도 당도가 높고 육질마저 좋아서 살근살근 씹히는 소리가 신선한 해파리의 그걸 닮았다. 그래서 톡톡히 재미를 본 것이다.

10월이 중순으로 기울면 그 단감의 한쪽 볼에 연지빛이 힐끔거릴 때부터 우리 식구의 관심은 온통 감나무에 주렁주렁 열렸다. 그 무렵 손님이 오면 내가 장대를 들었다. 별을 따듯이 하늘을 보곤 그 불그스레한 열매의 뒷켠에다 장대의 집게를 대고 으드득 손잡이를 몇 바퀴 돌리면 빨간 동그라미가 내 손에 잡혔다. 그렇게 많은 가을을 즐겼었다.

녀석은 또 다산했다. 많을 때는 덕지덕지 두 접이 훨씬 넘었었다. 거기다 해를 타지 않은 채 꼬박꼬박 소임을 다했었다. 그러면서도 계절을 알리는 척후병이나 시정화의(詩情畵意)를 안겨주는 소중한 풍경이기도 했다.

그렇게 고마운 식구를 지난 봄, 우리 집에서 내보내야 했다. 우리 집이 도시의 개발에 밀려 그 집과 뜨락을 헐고 그 자리에 새로 집을 올리기로 했다. 결국 개발 앞에 무릎을 꿇고 우리는 온통 소개(疏開)를 당했다. 우리는 반포의 아파트로 세를 얻었고, 뜨락의 나무는 다시 화원에 팔거나 뉘 집에 증여키로 했다.

우리 내외는 여러 날을 걱정했다. 갑자기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 중에 쓸 만한 것들을 골라 모교에 주기로 했다. 쓸 만한 것이라야 감나무를 비롯 모과나무, 대추나무 같은 시골스런 유실수들이었다. 다행히 모교는 나의 이 구닥다리 나무들을 박대하지 않았다. 모교 관리과의 정원사들이 와서 그것들을 파서 싸고 묶어 트럭으로 옮긴 날, 나는 물론 따라가지 못했다.

올 봄, 모교 대학원에서 다시 출강의 청이 왔다. 모교가 지척지간이라 마실삼기에 무방하거니와 작년 봄에 시집간 그 녀석들의 후사도 궁금했던 터였다.

지난 학기, 마지막 시간에 들어 있는 내 강의를 끝내면 시끄럽던 교정이 쓸쓸했다. 그렇지 않아도 좁은 캠퍼스를 옛날 근 20년이나 봉직했던 터라 교사와 교사 사이의 오솔길이나 동산을 가로지르는 지름길, 그 어느 한 줄기도 나에게는 손바닥의 손금 같았다. 나는 그 눈에 익은 마당과 동산을 빙빙 돌면서 나의 이산가족을 찾으러 나선 것이다. 그런데 감나무가 보이지 않았다. 모과나 대추나무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별별 생각으로 헤맸다. 혹시 여기 캠퍼스가 아닐까? 아니면 그 동안 몰라보게 자란 것일까? 아니면 벌써 수토가 맞지 않아 말라 죽었을까? 분명히 여기 어디쯤 꾸어온 듯 서 있을 텐데. 이렇게 넓은 땅으로 옮긴 뒤 훤칠한 정원수에 주눅 들어 쭈그렁이가 되었을까? 그럴 리 없었다. 헤어진지 이제 스무 달인데. 그렇게 몇 번인가 헛탕을 치다가 한 학기가 홀랑 가버렸다.

2학기가 되어서도 마찬가지였다. 백로가 지나고 상강이 다가오는데, 초조한 마음에 모교의 관리 과장에게 그 소재를 물어서야 여기 도서관 앞 노천 극장의 남쪽 언덕임을 확인한 것이다.

나의 재회는 곡절 끝에 이루어졌다. 벌써 두세 번 만났다. 가을이 깊어선지 휘휘한 그 녀석은 내게 연민으로 남았다. 이래서 나의 출강은 감나무 만나고 오는 날이었다. 헤어질 때마다 몇 번이나 뒤돌아볼 만큼 아쉬웠지만, 우리가 헤어진 뒤에도 만날 수 있는 그런 자리에 뿌리를 내린 것이 생각할수록 고마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