明 堂

                                                                                        유 선 진

 부모님의 묘소가 있는 경기도 광주읍 송정리는 차로 한 시간내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이다. 하남시를 지나 남양주를 거쳐 43번 국도로 접어들어 달리면 50분이면 족했다.

이번 추석 연휴는 주말에 잇닿아 있어서 고향 갈 사람은 미리 떠났을 거라는 예상을 했고, 그보다 이제는 추석 연휴 전에 성묘들을 하기 때문에 당일이 오히려 한가할 것 같아서 추석날 아침에 길을 나섰다. 그런데 다섯 시간이 걸렸다. 예상이 빗나간 것인지 아니면 분산해서 떠나도 길을 메울 만큼 차량이 늘어난 것인지 걸어서 가는 것보다 시간이 더 걸렸다.

시댁의 선산은 원래 동두천에 있다. 누대의 선조들이 그곳에 계시고, 세상을 떠난 친척들도 그리로 가니, 묘자리가 귀하게 되었다. 종손이 아닌 시부께서는 진작부터 당신의 직계 자손이 다같이 묻힐 만한 산을 물색하셨다. 그것이 경기도 광주에 있는 큰 산 중턱의 한 부분이다. 부모님이 합장으로 모셔져 있고, 그보다 먼저 세상을 뜬 시동생의 묘가 있다.

산 입구에서 십 분쯤 완만하게 올라간 곳에 부모님의 묘가 자리잡고 있다. 남향에 앞이 시원하게 트이고, 뒤로는 쭉 뻗은 나무들이 병풍치듯 둘러쳐 있다. 좌우의 터도 넉넉하고 양지 바라서 잔디가 곱게 자란다. 누구의 눈에도 훌륭하게 보이는 유택이다.

세상을 떠나시기 십여 년 전에 시부께서 지관을 불러 잡으신 터였다. 특별히 풍수에 밝은 사람이 아니라도 좋은 자리라는 생각이 들게 된다. 부모님이 좋은 자리, 정성들여 가꾸어진 곳에 누워 계시다는 것은 자식으로서 위안이 되는 일이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다. 산 전체로 보면 중턱인 그 자리가 우리들의 땅 경계선 바로 초입이라는 점이다. 예로부터 부모님 묘소 위로는 자손이 들어갈 수 없는 것이 관례이고 보면, 당신 아드님들마저 묻힐 곳이 없게 된다. 처음 가묘를 지을 때도 이 문제가 제기되었었다. 그러나 온 산을 통틀어 제일 가는 명당 자리라는 말에 논의할 여지가 없었다. 자손들에게 홍복이 온다는데 무엇이 그보다 더 중할 수 있겠는가.

작년 봄에 어머님이 돌아가시며 합장으로 뫼실 때, 산역을 주관하던 노인 한 분이 이참에 부모님을 위쪽으로 이장하라고 했지만, 명당(?)에 계신 아버님께 불경을 저지르는 것 같았는지 상제들은 가당치 않다고 머리를 흔들었다. 나는 친정 아버지께서 생전에 만들어 놓으신 가족묘를 생각하며 한 마디 말을 하고 싶었지만, 며느리인지라 나설 일이 못되어 입을 다물었다.

유난히 병약하셨던 친정 아버지는 회갑이 되던 해에 당신의 가묘를 지으셨다. 가묘를 만들면서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선조들의 묘를 항렬을 찾아 순서대로 배열 정리하셨다. 국군 묘지의 장군묘같이 봉분이 평평한 사각묘로 통일하였고, 각 묘 앞에는 누구의 몇째 자손이라는 이름만 생긴 작은 비석뿐 망주석도 장명등도 없었다. 다만 상석은 큼지막한 것으로 맨 아래 중앙에 하나 놓고, 모든 자손들이 합동으로 차례를 지내게 해 놓으셨다. 묘 한 기(基)가 차지하는 넓이는 세 평 정도였다.

성묘는 추석 연휴가 있는 전 주(前週) 일요일에 시간을 정해 놓고 모인다. 올 추석에도 오십여 명이 함께 차례를 지냈다. 의식은 종손이 주관한다. 각 가정에서 장만해 온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옛 어른들의 이야기로 화기가 넘치니, 종친회 야유회 같았다. 벌초도 공동으로 하기 때문에 자손이 몇 년째 외국에 나가 있는 묘도 말끔히 손질되어 있다. 아버지께서 산역을 하시던 사십 년 전에는 문중의 반대가 만만치 않았다. 주로 부모를 명당에 모셨다고 자부하는 집들이 그러했다. 그래도 소신껏 밀고 나가셨다. 지금은 모두 칭송을 한다. 아버지는 그럴 만한 위치에 계셨지만, 며느리인 내가 아드님들이 내켜하지 않는 이장을 친정의 가족묘를 예로 들며 어찌 거론할 수 있겠는가. 그저 입을 다물 뿐이었다.

나는 평소 화장을 할 것이라고 말해 왔다. 토장(土葬)이 주류를 이루는 이 땅의 장묘 문화를 개탄해서가 아니라, 그런 애국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아주 사사로운 일, 즉 자식들에게 짐을 주지 않기 위해서다. 썩어버린 육신을 봉분 밑에 두고 자자손손 가꾸게 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가뜩이나 부족한 어미라 자식들에게 용서를 받고 싶은데, 죽은 몸을 보살펴 달라고 하기 싫은 것이다. 그러나 가족들이 완강히 반대하니 화장은 소망으로만 그칠 공산이 크다.

우리는 한식과 추석, 그리고 양위분 기일에 산소에 간다. 그런데 산소에 가는 느낌이 해마다 달라진다. 점점 친근해진다고 할까. 이번엔 하직 인사를 이렇게 했다.

“안녕히 계세요. 아범이나 저도 곧 이리로 올 걸요 뭘.”

그러고 보니 남편이 칠순이 다 되었고, 그 나이는 부모님께선 가묘를 지어놓고 한참이나 지난 그런 나이였다. 어차피 화장을 못할 바엔 미리 무덤을 만들어 놓는 것이 아이들의 힘을 덜어주는 일이리라.

어디쯤이 우리가 들어가야 할 자리인가 둘러본다. 부모님 묘소에서 빗김 위로는 가능하다고 하니, 동쪽이나 서쪽으로 돌아앉은 터를 잡아야 할 것이다.

두 곳이 모두 음습했다. 명당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그런들 어떠랴, 어차피 명당의 효험을 믿지 않는 내가 아닌가. 실제로 자손에게 홍복이 온다는 우리 부모님의 명당의 징후는 어디에서도 나타나고 있지 않다. 무탈하니 그것이 명당의 덕인가.

명당에 얽힌 신비한 이야기는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이장한 후 정승이 나온 일이나, 산소를 잘 쓰고서 만석꾼이 된 이야기는 사람들로 하여금 명당을 찾게 만든다. 풍수지리를 모르는 나는 그냥 재미있게 듣는다. 그러면서 효를 으뜸으로 치던 시대에 자손의 발복(發福)을 미끼로 부모님을 사후까지 공경하라는 가르침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언젠가 산역을 하던 노인에게 물은 적이 있다. 평생을 산역만 하신 분이다.

“할아버지 명당이 있어요?”

“있지. 자식을 잘 가르치다 죽으면 자식들이 입신양명하니, 그 사람 묻힌 자리가 명당이지.”

잘 가르치는 것이 학벌이 아니고, 입신양명이 출세가 아님을 나는 알아들었다. 좌 청룡 우 백호, 묏자리 좋은 곳이 명당이 아니라 잘 살다가 죽은 자가 묻힌 곳이 명당임을 알았고, 명당에 묻히는 법을 배운 것이다.

 

명당을 찾아 나설 일은 없을 듯싶다. 탐·진·치를 멀리하는 것으로 수신제가하고 경천애인하는 삶을 산다면, 그가 살아 있는 곳이 명당이요 죽어 묻힌 곳이 명당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