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란 조각배에 실려

                                                                                                  金 鎭 泰

 세월이란 조각배를 탄지도 꽤 오래 되었다. 사실은 자의(自意)로 탄 것이 아니다. 실려온 것이다.

조각배는 나의 일생(一生)이란 강물을 쉬임없이 하류로 하류로만 떠내려왔다. 종착점은 죽음이라는 바다로 미리 정해진 강물이다. 바다가 멀리 보이기 시작한지도 벌써 몇 해가 지났다. 죽음이 멀지 않아지면서 자꾸 되돌아보게 된다.

나의 조각배가 떠내려오기를 시작할 때부터 일가 친척의 죽음을 많이 경험한 셈이다. 우선 생모가 일찍 이승을 하직하셨다. 다섯 살 때였으니 생모에 대한 기억은 아무리 떠올리려 해도 아무것도 없다. 잇따라 큰누이가 사망하고, 그것이 원인이 되어 매부는 자살한 셈이라고 들었다. 약간 철이 들고 나서지만 큰형이 오랜 동안의 병고 끝에 초등학교도 못마치고 저승으로 떠났다. 뒤에 안 일이지만 척추가 카리에스란 불치의 병이란 것이었다.

이런 죽음을 많이 경험한 어린 나는, 인생이 유한(有限)하다는 것을 비교적 일찍 깨달은 셈이다. 유한한 인생을 무한히 살 수는 없을까가 항상 관심의 초점이 되었다. 철이 들면서 책을 가까이 하게 된 연유일 것이다.

이즘에 나의 공감을 끈 책으로는 『무상(無常)』이란 책이었다. 아마 두 번, 세 번 거듭 읽었을 것이다.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나의 정신적인 성장을 도와 준 것은 세계 명작들이다. 세계 명작을 대충 읽고 나서는 저절로 세계 사상 전집 쪽으로 시선이 돌아갔었다. 그러나 사상 전집뿐이 아니고 명작 중에서 나의 독서 실력으로는 이해 못하는 것이 상당히 많았다. 한 예로 괴테의 『파우스트』가 명작 중에 명작이란 중평이라서 큰 기대를 가지고 첫 페이지를 열었다. 그러나 흰 것은 종이고 검은 것은 글자란 것 정도로,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약간의 시간 간격을 두고 두 번, 세 번 다시 읽기 시작하였으나 도저히 끝까지 독파할 수가 없었다. 사실은 나의 독해력에 실망을 느낀 정도였다. 대여섯 번의 노력 끝에 포기하였다.

상당한 세월이 지난 뒤에 이제는 소화력도 어느 정도 든든해졌으리라 부푼 기대감을 가지고 다시 책을 펼쳤다. 약간은 전보다 이해력이 증진하였지만, 완전 소화는 불가능하였다. 결국 오기로 인내심을 총동원하여 끝까지는 독파하였다. 어렴풋이나마 명작, 대작이구나 수긍은 한 셈이다.

마침 좀 독서인이라 지칭될 만한 청년들 사이에 『자본론』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었다. 뒤질 수는 없어서 읽어 보기로 하였다. 나의 구미가 안 맞는지 이도 들어가지 않았다. 몇 페이지를 억지로 넘기다가 포기하기로 하였다. 모든 것을 물질적으로 해석하려는 태도는 나의 구미를 끌어당기지 못하였다. 인간은 육체와 정신으로 형성되었다는 생각은 공감이 안 되었다. 확연하지는 못했지만 역시 영혼의 존재를 긍정하고 싶었다.

자연 나는 사물을 보는 데 겉으로만 보아서는 안 되고 속으로 본달까, 안으로 보려는 안목이 있어야 한다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모든 가치의 척도는 영원성으로 기울어졌다. 일시적인 것 순간적인 것 유한한 것에는 별로 가치가 없는 것이라 생각되고, 진정 가치 있는 것은 영원한 것 무한한 것이라야 할 것 같았다.

나는 일찍부터 영원에 접근하기 쉬운 것으로는 예술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라는 명구에 공감한 탓이다. 이런 생각이 철이 들기 시작하자 문학에 쏠리고 작가나 시인이 우러러 보였다.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일기를 시작품(詩作品)으로 채워나갔다. 조광(朝光)이란 종합지에 투고로 시험해 보았다. 독자란이지만 내 작품이 실렸을 때는 아닌 게 아니라 큰 기쁨이었다. 이름을 가명으로 한 것이 후회가 되었다. 조광이란 잡지가 되도록 많은 독자를 가지게 되고, 또 오래도록 속간되기를 마음 속으로 기원하였다.

그러나 시로는 나의 느낌이나 생각을 나타내기에 미흡한 생각이 들었다. 단편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마침 일본 경찰과 헌병의 감시가 예리할 때라 감시가 적은 간도, 통화로 피난이랄까 피신이 성행하던 때라 친구의 권유로 통화(通化)로 거너가서 지낼 때였다. 마침 만선일보에서 소설 콩쿠르 모집 광고가 눈에 띄어, 하룻밤을 세워가며 단편을 탈고하였다. 예선 통과 작품 중에 끼어져서 6편인가, 지상 발표되었다. 독자의 반응에 의해 최종 심사로 대신한다는 색다른 심사 방법이다. 가장 먼저 지상에 게재된 덕택인지 당선작으로 뽑혀, 그때 돈으로 적지 않은 상금도 받은 셈이다. 온 세상이 내 품안으로 굴러들어온 느낌이라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이 작품도 가명으로 보낸 것은 아닌데 아마 서툰 나의 필적으로 泰 자가 秀 자로 발표되어 주변에서는 나의 작품이라는 것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지금까지도 문학이나 예술이 인생보다 영원하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나 적지 않은 작가나 작품이 모두 영원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정말로 영원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작품은 그렇게 쉽게 창작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흔히 예술을 자연의 모방이니 자연의 재현이니라는 말을 한다. 공감이 가는 말이다. 나는 그림을 그릴 재주는 없으나 보고 감상하기를 즐긴다. 일일이 기록은 안 했지만, 서양화, 동양화, 한국화를 가리지 않고 전시회는 부지런히 찾아다녔다. 전시회를 보고 나서 늘 느껴지는 것이 있다. 그 많은 작품을 감상하기보다 자연의 나무, 꽃한 포기를 보는 것이 훨씬 수지(收支)가 맞다는 느낌이다. 결국 사람의 재주는 자연을 따르지 못한다는 결론을 내게 된다. 정말로 자연이야말로 위대한 예술이고, 인간들이 배워야 할 영원한 예지라 새삼 느끼게 된다.

모든 나무들은 세월에 따라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성장으로 인해서 시야가 넓어진다. 하늘에 한 치라로 더 접근하려 하고 넒은 공간을 차지하려고 기를 쓴다. 철이 들려는 노력이고 슬기로워지려는 의욕으로 보인다.

나의 조각배는 인생이란 강물을 적지 않은 세월을 흘러 내려왔다. 종착점이 멀지 않다. 그러나 아쉽거나 미련이 없다. 왜냐하면 바다야말로 영원한 너그러운 품안이 아닌가. 영원한 안식처이며 싸움과 갈등이 없는 평화스러운 종착점이 아닌가. 모든 생명체는 완성이라는 종착점에 이르러서야 진정한 자연 합일, 자연 동화의 거룩한 사명을 완수하는 길이다.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는 자만이 자연 동화를 이룩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