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얘기

                                                                                     劉 庚 煥

 옛얘기. 듣고 또 들어서 다 아는 이야기. 그래도 손자들은 더 듣고 싶어한다. 그들은 줄거리에다 환상의 분위기를 조립하는 즐거움을 맛보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듣는 어린이의 자기 수준에 따라 환상의 조립 능력엔 차이가 난다. 그렇다 하여도 말하고 듣는 거리가 좁아지는 그 공간적 밀착감은 친화력으로 나타난다.

할머니는 살아오면서 체험했던 지혜나 추억을 값지게 평가하고 싶어하고, 손자는 호기심이 가득 찬 풍선 같은 미래에 들어가서 시간과 공간을 주름잡고 싶어한다.

노인은 살아온 삶의 체험에다 되도록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하고, 손자는 살아갈 미래에다 꿈의 칠을 하고 싶어한다. 이 두 가지 바람이 대각선의 교차점으로 만날 때 오붓한 시간과 공간이 마련된다.

삶의 지혜가 경험 과학적으로 엮어진 이야기를 통해 노인과 손자는 한자리에서 기뻐하고 슬퍼하며 시간을 즐긴다. 이런 과정에서 노인은 미래에까지 자기를 연장시켜 줄 손자의 눈빛과 숨결에서 위로를 받는다.

이보다 더 큰 기대가 있을 것인가. 할머니와 손자가 나란히 앉아 오순도순 옛얘기를 나누는 모습은 남 보기에 부러울 만큼 아름답고, 하느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모습이라고 묘사된다.

우리 나라 전래의 가족제도에서 할머니와 손자 사이의 관계는 가정의 분위기를 조정하는 데 큰 몫을 해 왔다. 전래동화가 그 맥을 이어오는데 할머니의 입이 매체 역할을 한 것도 이런 까닭에서였고, 이런 필요에 의해 구전동화는 지난 세대까지 존속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가족제도의 분화와 핵가족 현상, 또 전파 매체의 보급은 이런 조건들을 급격히 감소시켰다.

이쯤에서 전래동화의 위상이 우리 나라에서도 서구 수준만큼 높아져야 할 이유가 분명해진다. 교육학과 그 인접 학문인 심리학 등 연관 분야의 학자들 의견이 충분히 반영된 구연동화 작품의 효용도 재평가되어야 할 시기에 이른 것이다.

전래 구연동화는 결코 어린이의 정서만을 위한 문학이 아니라는 생각을 필자는 갖고 있다. 그것을 문학이라는 개념에 기대어 말할 때, 한 인간의 지능과 인격의 개발을 돕는 기초 문학에 해당한다고 본다. 묘목이 자라 밑기둥이 굵어진 한 그루 나무로 성장했을 때, 그 든든한 나무의 밑기둥이 되기까지 공급된 영양은 충분히 평가될 만한 것이다.

손자와 함께 나누는 전래동화는 뇌세포의 수가 급격히 줄어드는 시기에 접어든 노인들을 그 대상으로 삼을 만한 읽을거리로 여겨도 좋겠다. 노인의 뇌세포가 줄어드는 현상은 단순화의 다른 측면이다.

그러나 아무리 기억력이 감퇴하더라도 지능 개발이 시작된 시기에 입력된 정보는 마지막 단계에까지 지워지지 않아 어렸을 적의 기억을 끝내 못 잊는 추억거리로 남는다. 인생을 머리가 희도록 살았어도 어머니나 고향을 그리워하는 것은 이런 까닭이라 본다. 나이 들어서 고향 친구를 만났을 때 생각지도 아니한 고향 말투가 튀어나오는 것도 그리웠던 정서의 분출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넓은 그늘을 거느린 나무 밑에 손자와 나란히 앉아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며, 어떻게 사는 것이 보람있는 것인지 넌지시 들려주고 또 열심히 듣는 모습, 사랑을 듬뿍 묻혀 들려주는 목소리를 한 올도 흘려 버릴 수 없다는 듯 눈빛을 초롱이며 듣고 있는 표정을 보라.

인간의 자기완성은 자기 대(代)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자기완성의 욕구는 소박한 형식으로 내리 물려진다. 그러나 흔히 내리사랑의 전달 형식에 훈련되어 있지 않아서 서툴러하거나 쑥스러워한다. 하지만 사랑채에서 글 읽기를 가르친 할아버지들은 읽는 법만 가르친 것이 아니라 글을 사랑하는 법까지 가르쳤으며, 그 시절 안방에서 손녀를 가르친 할머니들은 여자의 길만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삶을 이겨내는 법까지 보고 배우도록 가르쳤다. 오늘날 우리는 이런 것을 아쉬워하게 되었다.

베풀 줄 아는 사람의 사랑은 베풀어 본 만큼 강(江)으로 흐르고, 받을 줄만 아는 사람의 즐거움은 언제인가 바닥을 보이는 저수지처럼 마를 수밖에 없다.

산 시내로 시작한 물줄기가 강으로 내려와서 강강술래처럼 손을 놓지 않고 흐르는 것은 길을 잃지 않기 위해서라는 해석이 있다. 물이 길을 잃어 옆 줄기로 빠지면 흐름이 멈춰 썩고 만다. 손에 손잡고 끊임없이 흐르는 흐름을 가족사(家族史)에 비유하고, 그 흐름은 노인의 내리사랑 형식에서 넉넉히 발견된다.

끝이 안 보이게 굽은 오솔길은 인생의 길과 같아서 걷는 동안의 과정이 즐거워야 한다. 이런 고갯길 풍경을 생각해 보라.

할머니와 아이가 고갯길을 오른다. 한쪽만 장갑을 낀 아이가 맨손은 할머니 손 안에 넣었다. 할머니 손이 장갑보다 따스하다. 사랑의 체온. 그러나 할머니는 손 안에 든 아이의 손의 보드라움에서 자신의 옛날을 느낀다. 자신도 그랬었던 아득한 기억이 되살아난다. 아장대는 아이 걸음에 마침내 할머니가 발을 맞춰 준다. 그리고 나란히 걷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