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은 수첩

                                                                                          金 正 郁

 서너 해 동안 늘 지니고 다니던 수첩 한 권을 손에 들고 있다. 자그마하지만 몸피 두꺼운 이 수첩은 거의 마지막 장까지 울긋불긋한 글씨로 채워져 있다. 바쁜 틈새에 써서 찬찬히 뜯어보지 않으면 알아볼 수 없는 글씨와 오랜 시간을 두고 차근차근 적어둔 듯한 글씨가 뒤섞여 있다. 만나서 도움을 청할 사람의 연락처 번호도 여기저기 쓰여 있고, 자료를 구할 장소의 주소와 전화번호도 어지럽게 흩어져 있다. 계획한 일을 해내야 할 날짜와 요일도 그 일과 함께 적혀 있다. 지난날의 생각과 행동이 글자와 숫자로 변형되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이다. 이는 흘러가버린 날의 열정과 고뇌의 흔적이기도 하고, 그렇게 보낸 삶의 자취이기도 하다.

나는 격전을 치르고 난 노병처럼 손때 묻은 수첩을 이리저리 뒤적여 보았다. 마음 기울이던 일에 관하여 순간 떠올렸던 생각과 행위의 가닥을 되짚어 보았다.

 

처음 이 수첩을 손에 쥐던 날, 나는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는 기분으로 해야 할 일의 계획을 짰다. 내가 하고자 한 일은 세 가지였으므로 일의 분량을 어림잡으며 수첩의 하얀 면(面)을 삼등분하였다. 문득 머리에 떠오르는 착상이나 추진 방향 등을 적어 둘 요량에서였다. 기껏 구상한 일이 돌아서면 금새 잊혀지곤 했기 때문에 그때그때 적어두지 않으면 낭패였다.

나는 계획한 일의 무게에 맞추어 수첩의 앞부분보다 뒷부분의 면수(面數)를 더 넉넉하게 잡았다. 맨 앞부분에 계획한 일은 한 반 년 남짓 걸릴 터이고, 중간 부분에 기록될 일은 일 년 남짓, 마지막 부분은 빨라야 삼 년은 걸릴 것이었다. 나는 또 그 세 가지 할일을 늘 염두에 두면서 좋은 생각이 날 때마다 금방 기록하기 위하여 수첩의 삼등분한 면에 각각 다른 색종이를 붙여두었다. 언제든 한숨에 필요한 면을 펼칠 수 있을 듯해서였다.

그런 자질구레한 작업을 하는 동안 그만치 차분한 느낌과 생각들이 마음과 머리를 스치고 사라져갔다. 계획을 세우고 일을 해나가게 되었다는 가슴 벅참과 과연 해낼 수 있을까라는 불안과 회의…….

그때 나는 막 마흔 살 고개를 넘었고, 단 하나 혈육인 딸아이를 이국으로 떠나보낸 뒤였다. 나이는 더욱 빠른 기울기로 줄달음질칠 터인데 아이는 자주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나는 나이 들어가는 스스로에게 위안거리를 주고 싶었다. 아이에게 그다지 부끄럽지 않은 인생의 선배가 되고 싶기도 하였다. 그 시점에서 되돌아 본 나의 모습은 그다지 흡족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앞으로 맞이할 날들은 물 흐르듯 하는 세월이 아니라 아름다운 빛깔과 향을 지닌 것으로 가꾸어가고 싶었다.

꿈의 구체적 표상이라고 마음먹은 일을 서투르게나마 해나가는 동안 세월은 정말 빠르게 흘러갔다. 그러면서 점점 나의 모습이 객관적으로 보이기 시작하였다. 나라는 인간이 얼마나 어설프고 약한 존재인지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내가 하려는 세 가지 일에는 깊이 있는 탐구력과 사고력, 풍부한 표현력과 이들을 뒷받침할 수 있는 전문적인 지식이 필요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아무것도 갖추지 못했음을 확인하는 괴로움이 있었다. 두뇌의 회전은 느리고, 생각은 단순하면서도 체계적이지 못하였다. 내가 쓴 문장은 어휘 구사가 형편없을 뿐 아니라 문맥도 복잡하기만 했지, 제대로 뜻을 전달하기에 턱없었다. 참고로 읽은 논문이나 저서들은 어찌 그리 풍부한 사고력과 전문적 지식으로 충만해 있는지, 또한 그 표현력은 얼마나 뛰어나는지 혀를 내두를 따름이었다. 열정을 가지고 자신의 일을 해나가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는 참으로 많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또한 묵묵히 맡은 바 일을 하는 성실하고 선량한 사람들이 수없이 많음도 알게 되었다.

책과 자료들을 읽으면서, 사람들을 만나면서 나는 자신이 보잘것 없는 지식과 좁은 마음의 소유자임을 깨닫곤 하였다. 자신에 대한 회의의 늪을 헤매다니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서서히 겸손이라는 단어의 뜻이 마음에 새겨졌다. 정말 아무것도 아닌 자신이 보였던 것이다.

이러구러 시간이 지나 첫번째 계획했던 일은 자신의 어설픈 모습을 확인하면서 끝났다. 무모한 용기와 자만심으로만 덤벼드는 일은 실패하기 십상이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타인과 경쟁하겠다는, 그래서 자신의 우수함을 드러내 보겠다는 유치한 시도는 끝맺음되었다. 실패의 쓴맛보다는 겸손한 마음과 꾸준한 노력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아는 기쁨이 소중하였다.

조금은 낮아진 마음으로 나는 두 번째 계획한 일에 매달렸다. 직장 업무와 관련된 연구였다. 하나하나 일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땀흘리는 기쁨을 알게 되었다. 하루 일과가 끝난 저녁 시간부터 밤까지의 두세 시간이 그렇게 쌓여 갔다.

계절이 바뀌는 창밖을 이따금 보면서, 할 수 있는 일과 시간을 주신 분께 대한 감사 기도가 저절로 나왔다. 꾸준히 일하는 시간이 쌓이다 보면 바라는 것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희망으로 가슴이 출렁거렸다. 실제로 일을 시작한 지 일 년 뒤, 그 일은 좋은 결과로서 매듭지워졌다. 일하는 즐거움과 시간의 귀중함을 알게 된 것이다. 명석한 지능과 갖추어진 환경이 귀한 것이기는 하겠으나, 무언가 이루고자 하는 꿈과는 비교할 수 없다는 자신감도 생겼다. 중요한 것은 앞날에 대한 꿈이라는 사실도 새삼 느끼게 되었다.

드디어 마무리하지 않으면 안 될 세 번째 일이 다가왔다. 학위 논문을 쓰는 일이었다. 첫번째 일의 실패와 두 번째 일에서 얻은 자신감은 이 일을 이루는데 좋은 밑바탕이 되어 주었다. 팔을 뻗치기만 하면 주위의 사람들은 따뜻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도움을 주었다. 나는 구상하고 바꾸고 다시 작정하고 하기를 수없이 되풀이하면서 수첩에 적어 넣은 계획에 따라 앞으로 나갔다. 비밀스런 보물을 찾기 위한 지도를 보는 기분이었다. 수첩은 짝사랑하는 젊은이처럼 나의 혼과 마음을 사로잡았다. 수첩이 내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든든하였다. 수첩이 있는 한 나는 꿈꾸는 시간을 가꾸어 갈 것이고, 일은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제 학위를 받음으로써 수첩을 뒤적이는 일은 마침표를 찍게 되었다. 앞으로는 다시 이 수첩을 들고 다닐 일이 없을 듯하다. 몇 년 동안 그렇게 자주 수첩을 펼쳐서 많은 내용을 끼적였건만 내가 가진 지식이라는 허울이 부끄러울 뿐이다. 다만 깨달은 것이 있다면 모르는 것이 참으로 많다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는 알아 가는 기쁨을 얻기 위해 더욱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할 터이다.

내가 하나의 어리석은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달아 감에 이 수첩은 귀중한 동반자가 되어 주었다. 지금도 나는 글자와 숫자로 잔뜩 채워진 낡은 수첩 한 권을 마냥 버려야 할지 망설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