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길에서

                                                                                  鄭 鳳 九

 사람이 죽어서 이승을 떠나는 것을 가리켜 ‘먼길을 갔다’고 표현하는 수가 있다. 언뜻 듣기엔 어디 먼곳으로 여행을 갔다는 정도로 들리기도 한다. 그러나 재차 다져서 물어보면 그것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 먼길을 떠났다’는 소리다.

먼길 여행지 이국 땅에서 언뜻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내가 지금 여기 외국 땅에서 배회하고 있는 것은 “어쩌면 이것은 ‘죽음’이 아닐까?” 지금 나는 분명히 내 집에 있지 않으니 내 집에서 나는 먼길을 떠난 사람이고, 집에 없는 사람이다. 내 집이라는 제한된 공간을 기준으로 생각할 때 정확히 나는 그곳에 없고, 중요한 생활의 거점에서 부재의 상태다.

친구가 집으로 전화를 걸고 나를 찾을 때, 집의 식구들은 틀림없이 나를 ‘없다’고 할 것이며, 나에게 온 편지나 전달물들도 그것들을 챙길 주인이 없으니 빈 방 한구석에 동그마니 쌓여져 있을 것이다. 그것들을 뜯어보고 확인할 주인이 그곳에 없는 것이다. 부재의 상태, 그것은 부재의 장소를 거점으로 삼을 때 거기 있지 않은 것이니 결국은 ‘무’의 상태다.

내가 죽어서 없게 되는 ‘무’와 이 여행지에서 배회하는 동안의 집의 부재가 다른 점은, 이 여행으로 인한 빈자리가 어느 기간 후에 채워질 것이라는 기다림이 있다는 차이뿐이다. 지금 내 방의 책들, 그리고 평소에 내가 앉는 의자, 독서하는 책상, 그런 것들은 모두 다 무의미하게 공간의 일부분으로 비어 있을 것이다. 만약 내가 이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내가 죽어서 떠나버린 뒤의 상황과 다를 바 없지 않은가.

내가 이런 생각을 한 것은 도쿄역이 건너다 보이는 야에즈(八重洲)북센터 미니 2층 경양식 코너에서였다. 지하층에서 5층까지 각종 서적들을 구경하며 배회하다 피로한 나머지 여기에 좌정했다. 건너다 보이는 도쿄역, 거미줄처럼 동서남북으로 그것도 상하 몇 층으로 미로같이 복잡하던 그 역사(驛舍)도 이렇게 외형상 겉보기론 한갓지고 단순하다.

바로 창 옆에 있는 소형 테이블에 앉아서 얼음 한 그릇을 시켰다.  아무데나 외래어 붙이기를 좋아하는 저들인데, 웬일인지 그것은 아이스 뭐라는 명칭을 붙이지 않고 킨토키(金時)라 하였다. 그러고 보니 저들은 빙수를 옛날부터 그렇게 불러온 것 같다.

천천히 빙수를 떠먹으며 그 생각을 계속한다. 지금 현재 내가 없는 서울 집에서 나는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여느때 내가 앉았던 식탁 한켠 자리는 비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식구들은 내가 빠진 식탁에서 전과 다름없이 식사를 하며 나의 간섭이나 참견 없이 집안 일을 의논하며 결정한다. 없는 사람이니 개의치 않아도 된다. 그럴 필요도 없을 것이다. 나는 어디까지나 집에 없는 사람, 식구들의 괘념(掛念) 밖에 있는 존재다. 여행지를 떠돌아다니는 동안 그것도 행선지를 밝히고 정해 놓은 것도 아니며 여기저기 방황하고 있으니 식구들도 그저 어렴풋이 내 모양을 그리며 며칠 후에 돌아오겠지 하고 별 관심없을 것이다. 그래서 어떤 순간 잊혀지고 있을 것이다. 그 순간의 나는 그 세상을 떠난 사람이고 죽은 사람이 아닐까?

옛날 사람들, 그 중에도 철학자들은 곧잘 우리의 삶을 꿈으로 비유했다. 몽테뉴의 글에도 그런 것이 있었다. 이 삶은 하나의 커다란 생애 중의 조그만 부분이며, 이 삶이 끝나고 보면 마치 어떤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그 크고 긴 생애의 한 조각에서 각성한 것뿐이다. 죽음의 계기로 각성케 된 본래의 진생(眞生)이 계속될 것이다.

내가 이렇게 객지를 여행하며 방황하는 것은 서울 집의 생활 본거지를 이탈하고 부유(浮遊)하는 상황이다. 지금 나는 여행이라는 꿈 속에서 나그네라는 역할을 하면서 멋대로 떠돌아다니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떠돌이로 떠다니는 기간 중 나는 집에서 죽어 있는 것이 아닌가? ‘아주 갔을 뿐이 아니지 나의 여행은 집에서 볼 때 먼길을 떠난 잠시간의 죽음이다.’ 환상을 엮으며 킨토키의 얼음을 스푼으로 휘저은다.

도쿄 역전의 거리는 생각만큼 혼잡하지 않다. 줄곧 창밖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는데, 비어 있던 옆 탁자에 누군가 와서 앉는다.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그것이 여자란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미니 2층의 좁은 공간을 활용한 가게라서 그런지 옆자리란 말뿐이지 거의 붙여놓은 것처럼 이어져 있다. 그쪽으로 쏠리는 신경을 붙잡아 놓기 위해 나는 쇼핑한 책들을 점검한다. 그 중에서 한 권을 뽑아낸다. 『타부의 수수께끼를 풀어본다』는 책명 아래 ─ 음식물과 性의 文化學 ─이란 부제가 달려 있다. 여행지에서 지켜야 할 나그네의 금기(禁忌)는 무엇일까? 속으로 생각하며 히죽이 웃는데 옆 탁자 맞은편에 남자가 와서 앉는 기색이다.

두어 마디 인사가 오고 간 뒤, 코먹은 음색의 여자 목소리가 “이 고양이 귀엽죠?” 한다. 절대로 곁눈질을 안하고 점잖으리라 마음하였던 나였다. 그러나 웬 고양이? 순간 화들짝 놀란 내 시선이 그쪽으로 선회했다. 여자가 탁자 위에 양손 손등을 올려놓고 열 손가락을 위로 세워보이고 있다. 상대방에게 손톱을 보이는 모양이다.

설마 고양이를 품고 다니는 것도 아닐 텐데, 내가 잘못 들었나 얼떨결에, 당황했던 자신을 수습하며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린다. 아마 그녀의 손톱에 칠한 매니큐어가 고양이 그림인가? 하는 추리를 하며 이런 경우에 지켜야 되는 나의 타부를 생각해 본다. 진실을 천착하지 말자. 이것은 여행길이라는 하나의 꿈이다. 자신에게 설명하듯 자문자답하며 주섬주섬 책 봉투를 챙긴다. 아무래도 그 코먹은 음색의 대화가 너무 선명하게 귀에 와 닿으며 자극을 주는 듯 싶어서였다.

여기는 여행지다. 지금 나는 정착된 생활 과정에서 활동하는 정상상태가 아니다. 내가 향유할 수 있는 호기심이란 한계가 있는 것이다. 지금 여행 속의 행위들을 꿈으로 비유한다면, 그것이 내가 서울  집에 도착하는 순간에 깨어나는 꿈이라고 가정한다면, 지금 여기서 느끼는 감정의 뉘앙스들은 필경 하나의 환상밖에 아닐 것이다.

잠시 무중력 상태에서 유영하듯 행동이 뜻같지 않던 꿈의 장면들을 떠올려본다. 자신이 움직이려 해도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고, 소리치려 해도 뜻대로 안 되던 꿈속의 자아(自我)를 연상한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아주 가볍게 떠다니는 무통 무각의 상태로 자신을 굽어보는 형태였다. 어쩐지 여행의 자유가 그런 것으로 의식되는 기분이었다.

거기에는 실제적인 현실을 벗어난 한 단계 다른 차원의 기쁨이, 계산 밖의 실존으로 환상을 쫓는 꿈길이라는 환희가 잠재한다는 생각도 일었다. 이승과 저승의 차이도 이와같이 의식의 기준에서 서로 격리된 자신을 컨트롤하는 불연속의 실존은 혹시 아닐는지 생각하며 나는 도쿄 역으로 향하여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