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현궁(雲峴宮)

                                                                                                   李 菊 江

 한 서예가(書藝家)가 운현궁 미술관에서 전시를 한다기에 나선 길이었다. 안국역에서 안내표지를 따라 출구로 나왔는데, 거기서 몇  걸음 옮기자 卍 字(만 자)무늬 문살 철대문 안으로 기와를 얹은 나즈막한 꽃담이 눈에 들어왔다.

철대문에서부터 스무 남은 칸의 회랑이 잇대어져 있고 그 끝에 큰 대문이 활짝 열려 있다. 걸음을 멈추고 안을 들여다보니 흙마당 너머 솟을대문이 또 있지 않은가. 나는 나도 모르게 큰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여기가 바로 구한말(舊韓末) 격동의 시대를 살고간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집 운현궁(雲峴宮)이다.

대문 안 오른쪽에 수직사(守直舍)가 있고, 왼쪽으로는 회랑과 꽃담 사이에 널찍한 흙마당이 바깥 세상과는 달리 한가롭기 그지없다. 그 담 너머에는 세 채의 기와집이 아직 남은 추위의 잔설(殘雪)을 이고 있고, 중문과 솟을대문을 엇비스듬히 비켜선 자리에는 추자나무 한 그루가 무상한 세월을 말하는 듯하다.

고색이 창연한 운현궁이 이렇게 내 생활 주변 가까이에 있는 줄은 몰랐다. 지난 해 봄에만 해도 관훈동엘 나가면 경인 미술관에 들러 철종 임금의 사위 박영효(朴泳孝:1861~1939)가 살았던 사랑채를 보고 오곤 하였다. 우리의 전통 가옥을 보면 마음이 넉넉해지고 편안한데, 그 사랑채가 그 여름에 헐려서 간 곳이 없다. 이렇게 볼 만한 것은 차츰 사라져 가고 전통의 거리라는 관훈동과 인사동에도 현대식 건물이 자리를 넓히면서 외국 물품이 눈에 띄게 늘어나고 있다. 그러한 요즈음, 서울시에서 운현궁을 사들여 보수(補修)를 해서 시민에게 보여 주고 있으니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니다.

운현궁을 보고 온 후부터 일을 하다가도 그 건물이 눈에 선히 떠오르곤 한다. 그래서 어느 날 궁 안에 화창하게 쏟아지는 햇살을 보러갔다. 늙어 즐긴다는 노락당(老樂堂). 당초 무늬 공포(空包)와 서까래가 신비하게 아름답다. 단청을 입히지 않아 나무결 그대로의 색이 은은한데 그것이 더욱 운치가 있어 좋다. 내실에는 亞 字(아 자) 문살 미닫이와 불발기 창호가 옛 규방의 생활을 연상하게 하여 금방이라고 그 미닫이가 열리면서 대원군 마님 민씨의 자태가 나타날 것만 같다.

나는 철따라 운현궁에 들렀다. 눈이 오면 눈 속에 묻혀 있는 궁 안의 적막한 운치에 이끌리고, 모란이 흐드러지게 필 무렵이면 또한 그 풍치에 이끌려 뜰을 서성인다. 그럴 때면 내 고향 집에서 들었던 다듬이 소리가 궁 안 깊숙한 이로당(二老堂) 대청에서 나는 듯 환청(幻聽)이 되어 들리기도 한다.

어릴적 기억은 갈수록 되살아나는 것인가. 장대 같은 빗줄기가 퍼붓던 날, 나는 운현궁 처마에서 떨어지는 낙숫물 소리를 들으려고 부랴부랴 집을 나선 일도 있다. 차 안에서 비가 그칠까봐 조바심이 일었는데 도착하였더니 역시 비가 그쳐 아쉬웠다. 낙숫물 소리는 들을 수 없어도 그 동안 퍼붓듯 내린 빗물이 어느 한 구석에라도 고여 있으려니 하고 둘러보았다. 그런데 그 넓은 마당 어디에도 고이지 않은 것이 이상했다. 그 까닭을 알아보니 옛 사람이 궁터를 닦을 때, 밑에는 화강석을 깔고 그 위에 석회를 얹었으며 마지막에 마사토를 다져서 물이 고이지 않게 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철저하게 기초공사를 한 장인(匠人)의 후예가 우리라는 것에 나는 긍지를 느낀다.

처음에는 고향 집에서의 기억을 찾아 운현궁 건물 공간에만 관심을 모았다. 그래서 한 나라의 정권을 휘어잡은 대원군이 정사(政事)를 논의했던 장소인 노안당(老安堂)을 보면서도 선대(先代)의 사랑방 꾸밈새는 으레 그런 것이려니 하였다. 그런데 그렇게 예사롭게만 보았던 그 사랑채의 집기(什器)들이 볼수록 멋스러워져 갔다. 방 안에 있는 놋화로가 그렇고, 놋촛대가 그러하며, 조촐한 문방제구 또한 그러하다. 그때 그대로의 역사 현장이 오늘처럼 화려하지 않은 점에 더욱 매료되었다.

막대한 재원을 쏟아 경복궁을 중건한 대원군. 파격적인 인사 정책도 노안당에서 단행했고, 갖은 폐해를 다 저지른다 하여 서원(書院)을 철폐한 것도 노안당에서 결정한 일이라고 한다. 특히 주목할 일은 무엇보다고 사치풍조를 막기 위하여 복식개혁을 하고 검약한 생활을 하도록 한 일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교육 문제와 사치풍조는 바로 이끌기가 쉽지 않은가 보다.

병풍이 쳐 있는 방에는 보료가 깔끔하다. 장죽과 재떨이, 그리고 담배쌈지가 가지런히 놓인 곁에 서안(書案)에 책 한 권이 펼쳐 있다. 주인이 책을 보다가 잠시 자리를 뜬 듯하다. 나는 130여 년 전의 대원군 모습을 상상한다. 금옥탕창(金玉宕敞)에 운학선(雲鶴扇)을 든 대원군이 노락당으로 난 협문으로 들어오다가 큰 방을 기웃거리는 나를 보면 “뉘 댁이시오?” 하고 물을 것이 분명하다. 그리곤 대청으로 올라가 설렁줄을 흔들어 청지기인 소호(小湖:金應元)를 불러 어찌 된 일이냐고 불호령이 내릴지도 모른다.

이러한 환상은 운현궁 직원이 다가와서 깨졌다. 건물 재목이 모두 백두산에서 자란 홍송(紅松)이라고 귀띔을 한다. 그리고 일제시대 4대 궁궐 내부가 모두 훼손되었지만, 운현궁만은 대체로 보존되었다면서 노락당 미닫이를 보라고도 하였다.

그 미닫이의 문살이야말로 사람이 만들어 내는 미(美)의 절정이다. 부질없는 요소를 생략하고 필요한 것만을 집약해서 만든 소박한 멋, 그것이 한국인만이 창출해 내고 향유할 수 있는 美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전통 건축물에선 어느 공간에서나 여백을 발견하게 된다. 그 멋이 전통미(傳統美)의 요소이다.

노안당을 물러나 솟을대문을 나선다. 한때는 빗장이 밖으로 나 있었다는 그 문을 보면서 ‘…긴 세월을 알맞게 그린다면 이생저생 모두 함께 가소롭다’고 한 대원군의 ‘아소당(我笑堂)’이란 시의 끝 구절이 떠오른다. 구한말사(舊韓末史)의 파란만장했던 주인공 대원군의 생애를 생각하며 나는 운현궁 뜰을 걷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