無名男

                                                                                    朴 在 植

 ‘삭풍(朔風)은 나무 끝에 불고 명월은 눈 속에 찬데…’

이것은 북방 육진(六鎭)의 개척에 큰 공을 세운 조선 초기의 충신 김종서(金宗瑞)가 읊은 유명한 시조의 첫 대문이다. 우리 북쪽 변방의 겨울 밤 풍경이 스산하게 가슴에 와닿는 구절이다.

삭풍은 겨울철 북쪽에서 불어오는 매서운 바람이다. 가뜩이나 추운 겨울에 북풍이 몰아치면 한층 매서워진 체감온도는 가슴 속까지 얼어붙게 만든다. 그러나 김종서가 가슴으로 느낀 삭풍은 한갓 나무 끝에 부는 찬바람이 아닐 터이다. 변경의 북녘에서 호시탐탐 침노의 기회만을 엿보는 오랑캐의 위협이 북방을 지켜보는 그의 가슴에 언제나 삭풍처럼 매서웠을 것이다.

지금 우리 나라 높은 곳에서는 ‘북풍공작’이라는 전대미문의 해괴망측한 사건으로 뒤죽박죽의 난장이 벌어지고 있다. ‘북풍’은 물론 북쪽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인데, 그 기압골의 중심이 북변 저쪽의 오랑캐 땅이 아니라 분단 조국의 북쪽에 도사리는 불안정 세력에 연원 하는 데서 우리 민족의 불행과 비극을 머금고 있는 딱하고도 고약한 바람이다. 6·25의 참변을 겪고,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겠다.”는 협박에 주눅이 들어 있는 남쪽 백성들에게 ‘북풍’은 그 조짐만 엿보여도 가슴이 서늘한 가공한 바람이기도 하다.

이 ‘북풍’을 지난 대선(大選)에 즈음하여 정치하는 사람들이 마치 제갈량(諸葛亮)이 술수를 써서 동짓달에 동남풍을 부르듯 조작하였다는 얘기이다. 삼국지의 한 대목을 방불케 하는 사연의 속내는 우리네 어진 백성들의 궁리로는 헤아릴 바 못됨으로 치지물문(置之勿問)할 밖에는 없는 일이지만, 이 기상천외의 미스터리를 사정 당국이 풀어 가는 도상에서 빚어진 뜻밖의 해프닝 하나가 호사가의 눈길을 당기는 것이다.

사건 배후의 큰손으로 지목된 거물급 인사가 검찰에서 조사를 받다가 느닷없이 칼로 배를 가르는 소동을 벌인 것이다. 일을 벌인 당사자가 시정의 잡배도 아닌, 그것도 국민적 관심거리가 되고 있는 중대 사건의 열쇠를 쥐었다는 매우 지체 높은 인물인 만큼 세상은 또 한번 깜짝 놀랄 수밖에 없다. 필유곡절(必有曲折)인데, 정작 죽으려고 한 노릇인가? 아니면 짐짓 시늉으로 해본 짓인가? 이러쿵저러쿵 설왕설래가 자자했지만, 이 또한 우리네 순진한 백성들의 짐작으로는 촌탁할 바 못됨으로 불가지(不可知)의 미스터리로 치부할 밖에는 없는 일이다.

실없는 호사가가 눈독을 들인 대목은 이런 줄거리의 미스터리에 있는 것이 아니다. 뒤죽박죽으로 전개되는 이야기의 어간에 잠시 비어진 가십 기사 한 대목이 종잡을 수 없는 사건의 성격을 시사해 주는 뜻않은 쌔터이어로 글감을 물색하는 실없쟁이 문사의 더듬이에 걸려든 것이다.

배를 가르다 출혈이 낭자한 저명 인사는 극비리에 병원으로 옮겨졌다. 당연한 절차로 병원측은 미명에 실려온 응급환자의 이름이 뭐냐고 호송 책임자에게 물었을 것이다. 돈 많고 지체 높은 죄인을 영어의 몸에서 슬그머니 놓아 주는 수순으로 사정 당국이 병원이라는 완충 기관을 이용하는 편법은 가끔 쓰는 일이지만, 이번 경우는 사뭇 사정이 다르다. 이 아닌 밤중의 돌발 사태가 세상에 잘못 알려지는 날이면 검찰이 덤터기를 써야 할 판이므로 당장은 환자의 정체를 사람들의 눈, 특히 보도진의 추적으로부터 따돌릴 필요가 있다. 궁리 끝에 우선은 ‘무명남(無名男)’으로 처리하자는 데 의논이 낙착되었다. 그리하여 이름을 알 수 없는 행려병자(行旅病者)나 사망자에게 붙는 병원식 호칭인 ‘무명남’이라는 이름표가 거물급 환자가 든 병실의 문짝에 나붙었다.

‘무명남’을 문자 그대로 풀이한다면 ‘이름 없는 사나이’가 된다.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이름이 주어지지 않은 남자라는 뜻이다. 하지만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집에서 기르는 강아지에게도 이름을 지어 부르거늘, 어찌 사람의 아들에게 이름이 없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사전을 들추어 보니 ‘무명남’이란 낱말은 없고 ‘무명인’이 있는데 ‘이름 모를 사람’이다. 그러면 그렇지 우리는 흔히 ‘이름 모를 풀꽃’이라는 편리한 표현을 곧잘 쓰지만, 아무리 보잘 것 없는 풀도 식물 도감을 찾아보면 하다못해 ‘며느리밑씻개’ 따위로 제 나름의 이름이 있는 법이다. 뿐만 아니라 ‘무명인’은 ‘세상에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라는 뜻으로도 쓰이는 것이니, ‘무명 시인’이나 ‘무명 가수’가 시재의 처지는 처량할망정 언젠가는 한 번 떨쳐보리라 하는 이름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무명남’은 이름이 없는 것이 아니고 ‘이름 모를 사나이’ 또는 ‘세상에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사나이’이다.

하지만 지금 ‘무명남’의 문패를 달고 특등 병실에 누워 있는 할복지사(割腹之士)에게는 그 어느 쪽의 개념으로도 천부당만부당한 호칭이다. 얼마 전까지만 하여도 아무개라고 하면 그 권세가 산천초목에 이르기까지 떨친 큰 이름이 아닌가. 빈사의 경황에서도 “나의 이름은 K아무개지, 무명남이 아니요!” 하고 분명히 항변한 것은 지극히 당연하고도 정명한 대거리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 빈사의 유명 인사가 처절한 항변으로 자신의 이름을 밝힌 심리적 동기는 나변에 있는 것일까?

이름은 한 인간의 생애에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는 자기 존재의 표지물이다. ‘나’라는 존재와 더불어 평생 동안 고락을 같이 하는 또 하나의 존재가 이름이라고 하는 무형의 동반자인 것이다. 그래서 사람의 명운을 점치는 데 관상이나 사주와 함께 이른바 성명 철학이 한 몫을 하는 소이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한술을 더 떠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어쩌면 수지부모(受之父母)한 신체발부보다 더 소중하게 여길 것이 이름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몸은 죽어서 흙으로 사라지지만 그 자리에 세운 묘비에는 이름 석자가 남는 것이기 때문이다. 공동 묘지를 둘러보면 인생 무상의 감회와 함께 쉬이 가슴에 와 닿는 이치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름을 위해 죽는 선비도 허다하다.

일찍이 ‘백골이 진토되고 넋이라도 있고 없이 죽은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의 이름은 청사에 남아 상기도 빛을 내는 것이니,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는 속담이 우연의 소산은 아닌 듯하다. 사람의 이름을 호랑이 가죽에 비긴 것은 몸보다는 이름이 값지다는 뜻일 터이다.

그렇다고 모든 이름이 값진 것은 아니다. 전화번호부를 펴 보면 세상에 지천한 것이 사람의 이름이라는 느낌이 든다. 동명이인의 같은 이름도 마치 한 손에 얼마로 파는 어물전의 생선처럼 즐비하지 않은가. 개중에는 ‘정몽주’라는 이름도 꽤 많이 나온다. 이 숱한 이름들이 모두 호랑이 가죽이 될 수는 없다. 그 중 어찌어찌하여 세상에서 ‘이름을 얻는(유명한)’ 이름만이 호랑이 가죽 구실을 하게 될 뿐이다.

그러나 이름은 실체의 존재가 거느리는 그림자에 불과하다. 실체가 투영하는 위상을 좇아 형상을 그려내는 것이 그림자이므로, 이름 그 자체가 호랑이 가죽처럼 값을 지니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거느리는 인간의 됨됨이나 행적에서 그 이름값이 가늠될 따름이다. 따라서 이름이 소중하다는 말도 바로 그 사람의 몸가짐과 행지가 중요하다는 뜻에 다름 아닌 것이다.

이 뻔한 객설이 왜 뜬금없이 나오는가 하면, 하루 아침에 무명남으로 치부된 저명 인사가 절규로써 자신의 이름을 천명한 사건에 즈음하여 새삼스럽게 이름이 갖는 허(虛)와 실(實)이 무엇인가 하는 생각이 뜬금없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나의 이름은 아무개요!” 하는 피맺힌 절규에서 무상한 인생을 사는 한 약한 인간의 신음 소리를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림자는 조명이 있어야 비로소 형상을 드러낸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이름도 그것을 비쳐 주는 빛을 받아야 제 구실을 할 수가 있다. 처음 만나는 사람이 불쑥 이름 석 자만을 디미는 수인사는 참으로 무의미하다. 어떤 직분과 지위를 가진 아무개라는 사회적 신분의 조명이 곁들여야 이름의 존재가 살아난다. 정몽주의 이름이 절세의 충신으로 역사에 남은 것은 물론 그의 인품과 행장에 근거를 둔 것이지만, 만약 그가 명색이 없는 일개 천민이었다면 선죽교에서 흘린 피가 별다른 의미를 갖지 못했을 것이다. 무릇 권력 지향적인 가치관이 지배하는 사회나 그 권력의 영고성쇠가 엮어가는 역사의 표면에서 이름이 제값의 대접을 받는 데는 그에 상당한 지체의 후광이 있어야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물정의 마련이라 하겠다.

스스로 배를 가르고 병원에 실려온 K 아무개 씨의 이름도 한때는 휘황한 권력의 후광을 입고 입신양명의 보람을 누린 이름이다. 그러나 정권이 바뀌면서 그 빛은 걷히어 가고, 지금은 ‘북풍조작범’의 오명을 쓰고 그림자조차 있고 없는 어두운 감방에서 심판을 기다리는 죄인의 신세가 된 것이다. 만리변성(萬里邊城)에 일장검을 짚고 서서 의연히 북풍을 가로막은 왕년의 변방 관찰사 김종서가 세조정변의 억울한 희생물이 된 사연과는 사뭇 정상이 유별한 것 같다. 인생유전(流轉)과 권력무상의 한이 오죽하랴만, 차라리 ‘무명남’의 운명에 조용히 순응한 것이 자신의 이름을 위해서도 한결 떳떳한 길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