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구성요소들

                                                                                 남 기 수

 빗방울이 유리창 겉면에서 바람에 떨고 있을 때, 안개 속에 떠 있는 신호등의 빨강과 초록빛이 서로 바뀔 때, 나는 무엇이 나를 재촉하는 이런 현상에서 아름다움과 그 허무함을 함께 보게 하는가 생각에 잠긴다.

나는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일까. 이런 질문이 때늦은 것으로 여겨질 때면 스스로가 철없이 어리석은 이로 보이기도 한다. 학교에서 배운, 분자나 원자 혹은 더 작게 내려가서 쿼크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지식은 이런 질문에서 나를 돕지 못한다. 신이 자기 모습대로 빚은 흙에 숨을 불어넣어 나를 만들었다고 성서는 기록하고 있다. 나는 그렇다면 물질과 혼으로만 되어 있는가?

어느 답도 맞는 것이 못될 이런 질문을 곧잘 자신에게 던져보는 것은 무엇인가 존재해 나를 놓아주지 않기 때문이다. 어느 것도 틀린 답이 아닐 이런 질문으로 스스로를 찔러보는 것은 받아들이는 것보다 잃어버리고 놓치는 것이 많아지고 있다는 현재의 의식이 지난날을 돌아보려 하는 미련에서 오는 것이기도 하고, 장식과 껍질로서 존재해 온 자신의 모습을 외면하기 어려운 탓도 있고, 나이와 더불어 허물어져가는 내면을 대면해야 하기 때문이리라.

자취를 남기지 못하는 작고 일시적인 것들은 하나같이 가벼운 그 소멸에서, 모든 것이 부질없는 것이라고 나를 일깨우고 사라져가는 것들의 아픔에서 나를 위로해 주며, 질긴 삶과 그 의미의 그물에서 나를 벗어나게 할 것 같이 여겨지는 때가 있다. 그러나 이런 위안도 자의적이고 일시적인 것이어서 오랫동안 나를 받쳐 주지는 못하는 것임을 나는 누차의 반복에서 알고 있다.

 

언제나 부분적인 해석들과 그 의미들의 집합에서 질문은 피어나게 되어 있다. 나란 안과 밖의 조응의 관계에서 시간을 따라 꿰어져 있는 사건들로 이루어져 있는 것일까? 하고 내 한 면을 겨냥해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질문과 해답에서도 지금의 나는 한 겹의 얇은 피부에 담겨 있는, 크지 않은 용적의 나를 좀처럼 알아내지 못한다.

나는 강체 이상으로 완고하게 내 안에 구축되어 있는 투명한 틀을 느낀다. 나는 그것을 어떻게 하려고 하지도 않았고, 지금은 그것을 어떻게 하지 못하는 자신을 의식한다. 이 틀에 갇혀서 상이한 표리의 뭇 제스처 뒤에서 남 모르게 살아온 나날을 돌아볼 때 이런 느낌과 의식은 점차로 자괴의 무력감으로 변하고 있고, 그 모습은 더욱 자주 나타날 것이다.

이 틀에 지배되고 있는 나를 대할 때마다 나는 이 틀을 조립해 놓고 있는 것들의 정체를 생각해 보고는 한다. 이런 때에 어려운 것, 절망적으로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것은 언제나 보는 기준의 발견이고 설정이다. 구성요소들의 나열로 있는 혼란스러운 자신이란 더듬어 온 어떤 얼굴의 그로테스크한 실루엣만을 보여줄 뿐이고, 이렇게 진행되는 생각과 그 실루엣의 반복이 내게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 나는 모른다. 그려 내고자 하는 모상을 정하지 못하고, 불확실성의 의미로 내가 언제까지 머물러야 할 것인가 나는 알지 못하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영원히 내 해답의 밖에 속하는 것일는지 모른다.

그렇다 해도 나는 나의 구성요소들이 무엇일까 들여다보고 싶다. 자신에 대해 한 가닥의 빛을 기대하는 심정이 훗날을 던져버리기엔 지나온 생(生)이 아직은 너무 귀하게 여겨지는 탓이리라.

우연과 필연으로 나는 형성되어 왔는가? 내가 보지 못하는 필연을 나는 우연이라고 불러왔을는지 모른다. 삶이 내게 가르쳐온 것들에 의지해서 내가 필연을 하나씩 알아볼 수 있을 때면, 그러한 필연을 나는 우연들로 나타난 많은 것들에서 차례로 분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필연의 연결로 되어 있는 불가지의 무엇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그러나 생활 속의 나는 일상적 시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지금까지 그래 왔듯이 필연은 언제나 내 분별력의 밖에 머무는 것일까? 책임의 문제를 의식하지 않더라도 내게는 나의 우연적인 요소가 더욱 가깝고 쉽게 느껴진다. 그래서 내가 우연과 필연의 복합체일 것만 같은 생각이 당연해 보이는지도 모른다.

‘나는 승리를 훔치지 않는다’, ‘영원히 쓸쓸하게 그러나 스스로 만족하지 않도록’, ‘너의 위치를 정하고 세계를 움직여라’, ‘나는 착하고 선한 행동을 하는 사람은 그것만으로도 온갖 불행을 이길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다’, 그리고 지금은 잊혀진 듯 여겨지는 많은 경구들. 대학을 들어가기 전후하여 기억하기 시작한 이런 경구들은 지금도 내 안에 살아 있다. 나는 이런 경구들로 형성되어 있는 것일까?

역사에 등장했던 뭇 야망과 뒤따른 격랑들, 꿈의 좌절과 도피의 나날 속 패자(敗者)들. 시도와 성취의 끝에 숙명적으로 맞아야 했던 그들의 비극과 그들에 대한 연민의 감정에서 자신의 아픔을 사랑했던 숱한 순간들로 나는 이루어진 것인가?

나르시시즘적 도피와 선민의 의식들, 불사와 불멸에의 동경은 절망의 또 다른 얼굴에 지나지 않는다. 꿈과 그 착점을 찾아 온 미로의 궤적들 ─ 정답의 함수로서의 가치, 졸업과 학위의 증서들, 자격증과 포상과 반성문 등 백지 위에 기호들로 채워진 몇 쪽 이력서철의 두께에 불과하지 않을까?

 

소수의 고유명사와 품고 있는 낱말들, 작게 나누기만 하는 짧은 시선들, 작고 큰 비교를 유발했던 한계의 의식들, 상반된 요소의 미망(迷妄) 속 대립들. 타인의 기억으로 이루어진 혹은 타인의 기억 안에 조각으로 나뉘어져 있을 뿐인 나.

인류의 모든 것을 내장한 책들과 그 기억의 편린들. 발견과 이해, 하나로 구상하는 지성과 그 자유에 대한 선망들. 관점들 ─ 다각형이 원으로, 다면체가 하나의 구(球)로 수렴하듯이, 무한개의 관점인 신적 존재에 닮음의 소망을 품어보는─ 유한개의 관점들로서의 한 존재.

 

포만과 정체성의 상실에 대한 공포감, 후회의 감정, 시들지 않는 갈증의 와중에서 안식을 희구하는 희미한 한 모습을 본다. 나는 오늘도 일시적인 것들의 위로 가운데서 시간의 그림자를 길게 늘이고 있다.

삶은 장식을 넘어서는 긴 무엇이다, 행위가 글에 힘을 싣는다. 내 안의 틀을 풀어 이 힘을 방출해야 한다, 이것이 내 생의 의미일 것이다, 이렇게 이어지는 것들이 질문의 메아리처럼 숙명의 틀 주위를 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