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삶은 계속 된다

                                                                                                최 순 희

 이란 영화의 거장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이란 북부 3부작’을 본 사람이라면, 메마른 사막 길의 가풀막을 지그재그로 올라가는 길의 이미지를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 길은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1987)의 초등학교 2학년생 아마드가, 잘못 가져온 짝꿍의 공책을 갖다 주러 헉헉거리며 오르내린 비탈길이다. 다시 한 번 숙제를 공책에 하지 않으면 퇴학시키겠다고 엄포를 놓은 선생님. 그러나 가혹해 보이는 그에게도 나름의 교육적 이유가 있다. 친구가 퇴학당하지 않도록 어서 공책을 갖다 줘야 하건만, 소년의 길을 막는 어른은 또 왜 그리 많은지. 그러나 그들 역시 제가끔 고단한 일상에 지친 어머니요, 손자의 버릇을 들이려는 속정 깊은 할아버지요, 평생 쓸 수 있는 쇠대문의 등장에 눌리면서도 재래식 나무문을 짜서 돈을 벌어야 하는 친구의 가난한 아버지일 뿐이다.

좀더 푸르른 길도 있다. 영화 속의 영화에서는 부부간이지만 영화를 찍는 현실에서는 짝사랑에 애태우는 벽돌공 호세인의 길. 귀먹은 듯 앞만 보며 걷는 아름다운 테헤레에게 그가 ‘올리브나무 사이로’(1994) 난 길을 주춤주춤 뒤따라가며 읊조리는 구애의 독백은 간절하다  ─ 내가 글도 모르고 집도 없다는 걸 나도 잘 알아. 하지만 부자는 가난한 사람과 유식한 사람은 무식한 사람과 결혼할 때 서로 돕고 사는 게 되는 거야. 부자라 할지라도 결혼할 땐 집이 없었어. 당신은 조건밖에 생각하는 게 없어? 정성이나 마음은 아무것도 아니란 말야?

올리브나무 숲길을 나온 흰 치마는 내처 앞만 보며 걸어간다. 멀어지는 뒷모습을 지켜보는 망연한 눈길. 그러나 마지막 용기를 추슬러 그는 언덕을 뛰어 내려간다. 화면 가득 펼쳐진 들판 길을 지그재그로 뒤쫓아가는 하얀 셔츠. 마침내 흰 치마와 흰 셔츠가 한 점으로 포개지는 순간이 온다. 그 짧은 몇 초 사이, 대체 무슨 기적이 일어난 것일까. 흰 치마였던 하얀 점은 이윽고 저 윗마을을 향해 가물가물 잦아들고, 다른 한 점은 화면을 대각선으로 가르며 두 팔을 휘저어 아래쪽 언덕으로 돌아온다. 그때 그 터질 듯한 가슴을 웅변보다 더 열렬히 실어 전해 주던 행복한 바이올린 선율. 롱 테이크, 롱 쇼트로 오래 오래 잡은 라스트 신에서 관객은 만족한 한숨과 함께 여백의 미학을 배운다.

키아로스타미의 지그재그 길들 중에서도 가장 잊지 못할 길은, 그러나 최근에야 개봉된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1992)의 산비탈길일 것이다.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가 발표된 3년 후, 이란 북부를 강타한 대지진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마을은 폐허가 되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지역은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의 무대이자 주인공 소년 아마드가 살고 있는 코케 마을이다.

키아로스타미 감독은 아마드의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 그곳으로 향한다. 아수라장이 되어 버린 도로를 뚫고 어렵게 도착한 마을, 그러나 소년의 행방을 알아내기란 쉽지 않다.

감독은 소년의 얼굴이 담긴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의 포스터를 들고 만나는 사람들마다 수소문한다.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는 바로 이 도정에서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나직하고 겸손한 키아로스타미 특유의 화법으로 다큐멘터리처럼 담아 보여 주는 영화이다.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 ‘올리브나무 사이로’는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의 아역 배우를 찾는 여정이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의 동기가 되고,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를 촬영하는 아마추어 배우들의 사랑이 ‘올리브나무 사이로’의 소재가 되는 연결고리를 갖는다. 장면과 인물의 시적 변주곡이라고나 할까. 다층적인 세 영화의 폭과 깊이는, 그리하여 세 편을 다 보고 났을 때 한층 더 웅숭깊은 맛과 여운으로 다가든다.

지진으로 너나 없이 가족과 집을 잃었지만, 과연 삶은 계속된다. 사람들은 여전히 월드컵 축구 경기를 보기 위해 폐허 속에 안테나를 올리고, 신랑 신부는 비닐을 깔고 초야를 치른다. 지진은 40년에 한 번 오지만 월드컵은 4년에 한 번뿐이니까. 언제 어떤 재난이 또다시 닥쳐와 사랑할 시간을 앗아갈지 모르는 일이니까. 소녀들은 여전히 공기놀이를 하고 꽃에 물을 준다. 개가 짖고 한가로이 낮닭이 운다. 키아로스타미가 묻는다. 신을 원망하지 않으세요? 사람들은 어깨를 으쓱하곤 삽질을 계속한다. 어쩌겠어요? 신의 뜻인 걸. 그래도 신은 우리 모두를 사랑하시는 걸요.

이렇게 막무가내한 믿음, 다함없는 희망. 감독의 시선은 카메라에 담기는 풍경을 무심한 척 따라가다 문득 화면 밖 실제 인간의 삶을 그윽하게 응시하곤 한다. 일상의 힘을 깨우치며, 있는 그대로의 삶에서 자연스레 희망을 길어 올린다.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의 압권은 키아로스타미 영화가 늘상 그렇듯 마지막 장면에 있다.

드디어 아마드를 찾았다. 화면 저 맨 꼭대기, 지그재그로 아득하게 올라간 높은 산등성이 위에 까만 점 하나가 걸어가고 있다. 마음은 급한데 자꾸만 미끄러져 내리는 낡은 자동차, 시지푸스 신화의 이 시정 넘치는 은유. 화면 밖 언덕 아래까지 뒷걸음질쳤던 그의 자동차는 결연히 기운을 모아 재도전한다. 이번엔 아예 지나가는 청년의 짐까지 싣고서. 촉촉하게 스며드는 비발디의 협주곡을 배경으로 가파른 고갯길을 하나의 점이 되어 허위허위 기어오르는 자동차 한 대의 영상. 힘겨운 인생의 고갯길을 손을 잡고 넘어가는 아름다움의 가슴 뭉클한 상징과 비유가 아닌가. 롱 테이크와 롱 쇼트의 지긋한 카메라 언어, 장장 5분이 넘도록 한 시점에서 묵묵히 지켜보는 사유와 성찰의 라스트는 좀처럼 잊지 못할 깊은 울림을 남긴다. 우리 모두를 시인이요 철학자가 되게 한다.

영화를 보고 온 다음 날, 모처럼 뒷산에 올랐다. 정상에서 내려다 보려니, 아파트 숲을 빠져 나온 길들이 몇 가닥은 도장터널로 들어가 안산 쪽으로 이어지고, 또 몇 가닥은 수리산 자락을 감돌아 대야미 저수지 가로 닿아 있다. 은박지를 구겨놓은 듯 반짝이는 못물을 바라보는데, 저쪽 봉우리에서 누군가의 “야호!” 하는 외침이 들려온다. 처음에는 그저 산꼭대기에 오르면 으레 한번씩 내질러보는 소리거니 했다. 그렇게 제법 호방하게 들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 외침은 점점 더 발악같이, 절규같이 변해 가는 것이었다. 누구인가. 휴일도 아닌 이 한낮, 또 어느 실직자가 산에 올라 저렇듯 울음처럼 비명을 질러대는가.

3월이 왔다지만 아직 바람은 찬데, 산을 내려오는 길섶 양지바른 곳에는 올해의 첫 진달래가 한 떨기 피어 있다. 그래도 봄은 오는구나. 그것만은 정녕 변함없구나.

대책 없이 섣부른 희망을 경계할 일이다. 그러나 희망이 아니라면, 봄은 왔으되 봄은 아니 온 이 엄혹한 ‘불만의 겨울’을 어찌 이겨낼 것인가.

지난 겨울 뮤지컬 ‘명성황후’를 보면서 역사가 과연 발전을 하긴 하는 것인가 하는 회의 속에 흘린 통분의 눈물도, 정작 나와야 할 검은 금괴들은 소식이 감감한 채 독립투사의 가난한 후손이 선조의 유품으로 고이고이 간직해온 반동쭝 금가락지 따위만 순진하게 ‘단지 금값으로’ 쳐서 팔아 넘겨지는 광경에 열을 내며 안타까워하던 기억도, 언젠가는 모두 또 하나의 ‘엄마 어렸을 적엔…’의 사진첩 속에 몇 커트로 남아. 함께 이 추운 계절을 증명할 것이다. 하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계속 되리니…….

찬바람에도 꼿꼿한 진달래를 한 번 더 들여다본 다음, 나는 힘주어 발 밑을 골라 딛으며 산을 내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