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 뚝

                                                                                            고 봉 진

 아이가 몇 년째 파리에서 공부를 하고 있다. 처음에는 학교 기숙사에 기거를 했다. 그러나 기숙사는 그것을 필요로 하는 모든 학생에게 공평한 기회를 주기 위해 한 학생이 계속해서 장기간 머물 수 없도록 제도화되어 있어서, 안정된 주거를 마련한다고 소위 ‘스튜디오’라는 단칸방 하나를 얻어서 지내고 있다.

처음에는 생 루이 섬에 있는 낡은 건물의 3층 한 귀퉁이 방이었지만, 지난 초겨울에 몽수리 공원 근처 학생들이 많이 사는 동네의, 역시 오래된 건물 이층으로 이사를 했다. 새로 얻은 집에는 아직 가보지를 못했지만 보나마나 먼저 살던 집과 대동소이할 것이다.

그곳의 집들은 하나같이 겉은 낡은 옛 모양을 하고 있어도 내부는 현대적으로 개조되어 있다. 먼저 집도 고풍스러운 나선형 좁은 목조 계단을 빙글빙글 돌아 올라가서 방문을 열고 들어서면 어리둥절해질 정도로 분위기가 달라졌다. 난방이고 취사 시설이고 모두 전력을 사용하게 되어 있고, 욕실 겸 화장실도 그들이 미국식이라고 부르는 요즘 우리들의 아파트 것과 비슷한 구조로 개조되어 있다. 그리고 좁은 면적이지만 구석구석 자투리 공간까지도 철두철미 유용하게 쓸 수 있도록 얼마나 곰상스럽게 배려를 해 놓았는지, 나같이 매사에 대충 대충인 사람은 어처구니가 없어 저절로 실소를 했을 정도다. 그래서 그런지 너무 각박하고 삭막하다.

가끔 들리고 머물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파리의 날씨는 한여름을 빼놓고는 언제나 으스스하다. 위도가 동북 아시아 쪽으로는 중국 동북성의 하얼빈과 거의 같은 아주 북쪽이다. 가을부터 봄에 이르기까지는 짧은 해가 기울면 바로 어두워진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따듯한 온기가 그리울 텐데, 아이가 혼자 지나는 방은 언제나 싸늘하기 마련이다. 혼자 살다 보니, 방을 비우는 동안은 난방 스위치를 끊어 놓게 되고, 들어서서 바로 스위치를 넣어도 그렇게 빨리 방안 공기가 데워지지 않는다. 저녁마다 어둡고 썰렁할 빈 방문을 열고 들어설 아이를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답답하다.

파리에서 조금 높은 곳에 올라가 보면 건물마다 조그만 굴뚝들이 지붕 위로 많이 돋아나 있는 것이 내려다보인다. 한 건물에 여러 가구가 사는 복합 주택들이 많기 때문이리라고 생각하지만, 아이 집같이 전기로 난방을 하는 집도 많고, 그 외에도 도시 가스나 석유류로 집중난방을 하거나 지역난방 공급을 받는 집들이 많으니, 그것들이 모두 난방이나 취사용의 벽난로나 화덕 같은 것을 위한 굴뚝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기껏해야 부엌이나 화장실의 환기를 위해 세워진 것들이거나 옛날에 그 용도를 다하고 구멍이 막힌 퇴역 굴뚝이기 쉽다. 그러니 저녁때라고 해서 새삼스럽게 연기가 피어 오르는 굴뚝은 거의 없다.

오페라 ‘라 보엠’의 첫막 서두 부분에서 루돌프는 푸념을 한다. 장소는 파리, 가나한 학생들과 예술가들이 모여 살고 있던 라틴 구, 때는 크리스마스 이브다.

“회색빛 하늘에 파리의 수많은 굴뚝들로부터 연기가 피어 오르고 있다. 그런데 이 쓸모없는 사기꾼 늙어빠진 난로란 놈은 영주님처럼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빈둥거리고 있네.”

그들 가난한 젊은이들의 지붕 밑 다락방에서는 땔감이 없어 난로에 불기가 없다는 탄식이다. ‘라 보엠’의 시대적 배경은 19세기 중엽, 그때만 해도 난방은 나무나 석탄이 주 연료였다. 가난한 사람들은 제대로 난방을 하지 못하고, 남의 집 지붕 밑 다락방에서 벽 틈으로 새어드는 외풍에 떨어야 했다. 도시는 달라도 같은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안데르센의 동화 속의 ‘성냥팔이 소녀’가 살던 다락방도 ‘집안은 추웠습니다. 지붕이라고는 이름뿐이지, 커다란 틈새가 나서 짚이나 걸레 쪼가리들로 막혀 있었지만, 그래도 바람은 휙휙 스며들었습니다.’라고 묘사되어 있다.

많은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 오르지 못했던 시절이다. 그런가 하면 난방을 하는 집 굴뚝을 청소하는 가난한 소년들이 길거리를 돌며 적은 돈과 한끼 끼니를 얻기 위해 하루 종일 “굴뚝 청소하세요!” 하고 소리치며 떠돌았다. 찰스 램의 『엘리아 수필집』 가운데 ‘굴뚝 청소부 예찬’이라는 시니컬한 글이 그들의 처지, 그리고 그때의 사회상을 잘 묘사하고 있다. 그래서 칼 마르크스가 ‘공산당선언’이라는 과격하고 파괴적인 격문을 돌리고 있던 세상이었다.

그런 시대도 지나갔고, 난방 방식도 바뀌었다. 지금 파리에 집집마다 나 있는 굴뚝의 역할도 자연히 달라진 것이다.

소년 시절 하교 시간이 되면, 발걸음을 재촉하며 땅거미지는 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왔다. 지름길 좁은 골목을 들어서면 집집마다 처마를 겨우 넘는 높이로 달려 있는 나지막한 굴뚝에서 저녁 짓는 연기가 피어 올라서는 길 위로도 내려와 있었다. 그때만 하더라도 땔감은 대부분이 신탄(薪炭)이었다. 잘 마른 장작을 태우는 연기는 맵지도 않고 오히려 코에 향기로웠다. 집집마다 따뜻한 불빛이 창문을 환히 밝히고 집으로 돌아오는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부엌에는 어머니들이 시장한 얼굴로 들어설 식구들을 생각하며 바쁘게 손을 놀리고 있었을 것이다.

불빛이나 불기같이 우리의 마음을 안온하고 푸근하게 해주는 것은 없다.

지난 11월 초, 영남 알프스 연봉으로 등산을 갔다가, 짧은 가을 해를 잘못 계산해 험준한 산비탈에서 어둠을 만났다. 방한구도 음료수도 비상 식량도 준비한 것이 없었고, 여자분들까지 끼어 있는 일행이었다. 이건 정말 진퇴양난의 위기에 봉착했다는 당혹감으로 사방을 둘러보는데, 멀리 위로 조그만 불빛 몇 개가 깜박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때 느낀 안도감이란 도저히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다. 그 불빛은 춥지 않은 잠자리를 뜻하며, 따뜻한 음식 그리고 산짐승들로부터의 방패막이가 제공되는 것임을 뜻했다.

이윽고 몇 채의 산장이 모여 있는 곳에 이르렀을 때 눈물이 나오도록 더욱 반가웠던 것은 낮은 굴뚝에서 피어나 집 주위를 감싸고 있는 땔나무 연기와 그 매캐한 냄새였다.

그래서 오늘도 파리 아이가 사는 집 지붕 위에서만이라도 어스름 저녁에는 따뜻한 연기가 피어 올랐으면 하는 다분히 시대착오적이고 엉뚱한 바람을 굴뚝같이 간직하고 지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