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료작-

어느 날, 백화점에서 

                                                                              한 혜 경

 가끔 서점에 들러 신간들을 훑어보는 것은 내 일의 한 부분이기도 하면서 취미이기도 하다. 이 책 저 책 골라 보면서 새로운 경향도 짐작하고 때로는 바닥에 주저앉아 읽기도 하며, 그 중 마음에 드는 책을 한 두어 권 골라 나오는 일은 꽤 즐거운 일이다.

요즘 어디서나 젊은 층의 문화가 강세를 보이고 있는데, 문학계도 예외가 아니어서 이른바 ‘신세대 문학’의 열기가 뜨겁다. 이들의 문학이 새롭긴 하지만 낯설어서 거부감이 느껴지는 나의 무의식적인 반응 앞에서 나는 어쩔 수 없이 내 나이를 느끼곤 한다. 젊은 세대들이 ‘세대 차이’라고 하며 우스워할 보수적인 반응이 나도 모르게 솟아나는 것이다. 이런 속에서 간혹 차분한 작품들을 만나게 되면, 낡았으나 내 몸에 맞는 옷을 찾아 입었을 때와 같은 안도감과 함께 고향에 온 듯한 느낌마저 든다.

얼마 전 접하게 된 작품 중에 평소 느껴왔던 우리 시대의 문제들을 진지하게 다룬 것이 있어 반가웠다. 자본에의 욕망으로 가득한 현실에서 소외된 군상들과 욕망을 향해 치닫는 인물, 그리고 고통의 현실을 견디며 이겨내는 인물들을 보여 주면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묻고 있는 작품이었다. 특히 백화점이란 공간을 통해서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물신화된 세태를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점이 인상깊었다. 필요한 물건을 사러 백화점에 갔을 때 너무 많은 물건들과 사람들로 당혹해 하며 순간 내가 왜 여기 있는가 하는 의문을 품어봤던 사람이라면 쉽게 공감할 수 있는 것이었다.

가정이 파탄에 이른 불안한 중년 여자를 설정하여 작가는 소통이 불가능한 현대사회를 그려낸다. 대학 교수인 남편이 동료 여교수와 불륜관계에 있다는 의심으로 고통받고 있는 주인공은 남편에게 정신병자로 몰려 아들까지 빼앗긴 상태이다. 혼자가 된 그녀는 사람이 많은 백화점에 와서 마주치는 사람마다 붙들고 대화를 시도한다. 그러나 아무도 대꾸해 주지 않으며, 그녀의 소외감은 더 한층 깊어진다. 공중전화 부스에서 전화 저편에 듣는 사람이 없는데도 계속 혼자 지껄이는 그녀의 모습은 처절하기까지 하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는 백화점 안에서 혼자라는 사실은 소외감을 강하게 드러내는 문학적 장치가 된다. 그리하여 이 작품은 백화점으로 표상된 현실이 ‘아무리 소리 질러도 아무도 그녀에게 화답하지 않는 황무지요 벌판’임을 섬뜩하게 보여 주는 것이다

백화점은 요즘 우리의 생활수준이 높아지면서 더 이상 특별한 곳이 아니다. 6,`70년대만 해도 백화점이란 보통 서민들이 가기에는 문턱이 꽤 높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물론 지금도 어려운 사람들에게 백화점 상표에 붙여진 숫자들은 분노와 허탈감을 일으키게도 하지만 한두 번씩은 가본 적이 있는 비교적 친숙한 공간으로 변했다. 특히 세일 기간이면 몰려드는 차량으로 교통 순경이 나와 주변 교통을 통제해야 할 정도로 이용자들이 많다. 언젠가 사은품으로 지급되는 이불꾸러미들을 저마다 한두 개씩 들고 가는 사람들을 길 가다가 마주친 적이 있었는데, 서울 사는 모든 사람들이 백화점에 온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말 그대로 백화점은 백 가지 물건들이 쌓여 있는 곳으로 밖의 현실과는 달리 늘 풍족하고 현란한 세계이다. 그러나 돈이 없다면 이 백 가지 물건들이 그림의 떡이다. 환상이나 눈속임에 불과한 것이다. 눈앞에 물건이 산처럼 쌓여 있지만, 아무것도 내 것이 아니라는 사실 앞에서 결핍감은 상대적으로 배가되고, 북적대는 인파 속에서 고립감 역시 배가되기 때문이다.

나도 며칠 전 백화점에 갔다. 바겐세일이라고 해서 아이들 옷도 한 두 벌 사고, 오랜만에 친구도 만나 보기 위해서였다. 약속시간보다 좀 빨리 도착했기에 혼자 백화점 안을 돌아보았다. IMF 한파로 어려운 시기이고 비까지 흩뿌리는 날씨라 좀 한산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북적대는 사람들로 정신이 없었다.

젊은이들을 겨냥한 의류매장은 현란한 조명과 흥겨운 음악 소리, 발랄한 옷차림의 10대와 20대들로 마치 잔칫집에 온 듯한 분위기였다. 잔칫집에 초대받지 못한 손님처럼 괜히 주눅이 든 나는 신세대문학에서 느끼곤 하던 낯설음을 또 맛보면서 소외감을 느껴야 했다.

이 소외감은 질기게 나를 붙잡고 사람들 속에 선뜻 끼지 못하게 했다. 결국 나는 그 수많은 물건들과 사람들에 질려 하면서 멀리서 바라보는 것으로 그쳤다. 특히 파격적 세일이라는 팻말이 붙은 곳에서는 그야말로 전쟁을 치르는 것 같아 감히 내가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비좁은 틈을 헤치고 필사적으로 물건을 고르는 모습은 물건이 필요해서라기보다는 저 수많은 물건들 중 하나는 내 것으로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의해 움직이는 로봇들 같아 보였다.

밖은 바람과 함께 봄비가 흩뿌리고 있으나 유리문을 사이에 두고 밖의 세계와 차단된 백화점 안은 밖의 계절과 상관없다. 입구에 있는 마네킹들 주위에 서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많은 사람들, 그들이 대개 한껏 멋을 낸 중년 여자들이라는 점이 괜히 보기 안쓰러웠고, 그 속에 끼어 친구를 기다리는 내 모습이 또 괜히 멋쩍었다. 저들 중에 소설 속 연희와 같은 여자는 혹 없을까 하는 생각을 하다 보니 문득 허전함과 외로움이 밀려왔다. 그것은 거대한 세상의 흐름에서 밀려난 듯한 외로움이고, 그 흐름 밖에서 나와 다른 여자들이 무력하게 서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최신 유행의 옷을 걸친 호리호리한 마네킹들이 멋을 내 봤자 어설픈 우리를 내려다보며 비웃는 것만 같아, 나도 옆의 여자들 중 아무나 붙잡고 이야기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다. 그때 저만큼 나를 발견하고 웃으며 다가오는 친구가 얼마나 반갑던지. 미안해 하며 늦은 이유를 펼쳐 놓는 친구의 손을 덥썩 잡고, 나는 어디 조용한 데 가서 차나 마시자고 이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