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회 추천-

첫사랑

                                                                     이 은 주

 누구에게나 첫사랑이란 단어는 마음을 설레이게 한다. 처음 이성을 알게 되었을 때의 두근거림이나 그 설레임을 잊을 수는 없을 것이다. 비록 그 사랑이 가슴 아픈 사연으로 남아 있다 해도 언제나 그 단어만은 감미로운 음악처럼 들리는 것이 아닐까. 내게도 혼자만의 비밀로 꼭꼭 간직해 두었다가 가끔씩 그 추억에 젖어보는 시간이 있다.

안개비가 내리는 날이거나 첫 눈이 온 세상을 하얗게 덮으며 휘날리는 날이면 일상에 얽매어 잊고 지내던 옛날이, 그 분위기 있는 날씨와 함께 내 마음을 요란하게 휘저어 놓는다. 그럴 때면 혹시나 그 첫사랑으로부터 무슨 연락이 오는 건 아닐까 은근히 기대를 해보기도 하지만 이내 그 환상에서 깨어나곤 한다.

그런데 얼마 전 뜻하지 않게 남편의 첫사랑의 여인으로부터 연락을 받고 무척 당황스러웠던 일이 있었다. 전화를 통해 상대방이 “내가 당신 남편의 첫사랑인데요.”라고는 말하지 않았지만 그녀가 이름을 밝혔을 때, 나는 당장에 그것을 알았다. 그 이름은 내가 남편과의 연애 시절부터 그이에게 들어온 이름이었다.

결혼 전 어느 날 남편은 자신의 첫사랑 얘기를 매우 상세히 하는 것이었다. 중학교 때부터 다니던 교회에서 알게 된 그녀는 얼굴이 희고 야리야리한 모습의 여학생이었다고 한다. 자기뿐 아니라 모든 남학생의 이상형이었던 그 아이와 여름 수련회 때 같은 반이 되도록 반편성 조작도 서슴지 않았노라고 말했다. 나는 그 얘기를 들으면서 소설 ‘소나기’에 나오는 소녀처럼 가냘프고 병약한 모습에 말없이 수줍은 듯한 그

녀의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남편은 대학 시절까지 연락을 하다가 미국으로 이민을 간 뒤 소식이 끊긴 상태라고 아쉬워했다. 나는 그때 남편이 다른 여자 앞에서 자신의 첫사랑을 당당하게 얘기하는 솔직한 남자라고 느꼈고, 그 소녀가 내심 부러웠다.

그렇게 그녀를 알고 있었지만 막상 전화를 받으니 무척 당황스러웠다. 상대방의 목소리도 떨리고 있는 듯했다. 빨리 수화기를 남편에게 건네주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마침 그이는 해외 출장중이라서 그녀의 이야기를 고스란히 들을 수밖에 없었다. 혹시 기나긴 이민생활 속에서 외로움을 달랠 길 없어 옛 동무를 찾아 나선 걸까? 어른이 되고 난 후 다시 만나 지난날을 함께 회상하고 싶은 마음으로, 세월의 간격을 뛰어넘어 TV의 어느 프로그램처럼 수소문해서 찾아 온 것일까? 어느덧 나는 남편과 그녀가 무척 반가워하면 서로 만나는 장면을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그 옆에서 어색하게 서 있는 나도 감동받은 듯 좋아하는 모습이 떠올랐다.

순간적으로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전화를 통하여 그녀는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지금 미국에서 서울로 나와서 할 사업을 구상중인데, 시장조사를 위해 남편의 도움을 받고자 한다고 했다. 다른 교회 친구를 통해서 남편이 하는 일을 알았으며, 갑자기 전화를 하게 되어서 미안하다고 했다. 나는 남편 회사 전화번호와 그의 부재를 가르쳐 주었다. 그녀는 계속 미안하다는 말을 거듭했고, 나는 계속 괜찮다고 대답했다. 그녀는 언제고 한번 나와 만날 것을 기약했고, 우리의 통화는 끝났다.

나는 내가 너무 사무적으로 전화를 받지 않았나, 좀 따뜻하게 대해 줄 걸 하고 후회하는 마음이 들었다. 어쩌면 그이에게서 그녀가 첫사랑이었다는 고백을 듣지 않았다면, 그냥 다른 어릴 적 친구였다고 했다면 내가 좀더 허물없이 대했을 텐데…….

그런데 그녀가 미안하다고 한 말이 마음에 걸리는 건 왜일까?

무엇이 미안한 걸까? 내가 만약 나의 첫사랑과 연락을 하게 된다면 그의 아내에게 미안한 걸까. 생각해 보니 그럴 것도 같다. 미안해서 그의

아내에게는 말하지 말라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우연히라도 나의 첫사랑과의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기를 바란다. 그 사람이 지금 어떤 모습을 하며 일상을 살고 있을까 너무 너무 궁금하지만. 그때 그 시절의 모습을 고스란히 내가 만나고 싶을 때 마음 속에서 꺼내 볼 수 있도록 그렇게 감추어 놓고 싶다. 나는 ‘그리워하는 데도 한번 만나고 못 만나게 되는 것보다는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사는’ 편을 택하고 싶은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