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료(自由寮)

                                                                                         김 태 길

 ‘자유료’는 내가 20대 초반에 다녔던 어느 학교 기숙사 이름이다. 그 학교의 교육 방침을 상징하는 말이 ‘자유’였던 연유로, 기숙사의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고 들었다.

말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정말 학생들의 자유에 일임하였다. 수업 시간에 교수가 나타나도 담뱃불을 끄지 않는 학생이 있었으나 내버려두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강의를 듣는 대신 소설을 읽는 학생이 있어도 교수는 모르는 척하였다. 그 학교의 교수들은 대부분이 그 학교 졸업생이었고, 그들도 학생 시절에는 제멋대로 굴은 과거를 가지고 있었다.

그 괴상한 학교의 자유분방한 교풍을 길러낸 근원지가 바로 그 ‘자유료’라는 이름의 기숙사였다. 기숙사 생활을 하지 않고는 그 학교의 진수를 체험할 수 없다고 하기에, 나도 자원하여 요생(寮生)이 되었다.

신입 요생을 환영하는 모임이 있었다. 총대(總代)라는 직책을 가진 상급생 대표가 ‘환영사’를 위하여 첫번째로 등단하였다.

“제군! 제군은 이제까지 부모의 말씀 또는 선생들의 말씀을 따라서 꼭두각시 인생을 살아왔다. 지금부터는 제군 자신의 생각을 따라서 참된 삶을 살기 바란다. 제군은 이제 완전한 자유의 주인공이다. 다만 제군의 자유에 대해서는 제군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한다…….”

그의 환영사에는 ‘환영한다’는 말이 없었다.

부모의 말씀 또는 선생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 꼭두각시라면 그 상급생의 말을 따르는 것도 꼭두각시가 아닐까 하는 의심은 전혀 들지 않았다. 그의 말에는 ‘진리’로서 가슴을 때리는 힘이 넘쳤다.

나는 그의 말을 따라서 ‘참된 삶’을 살기로 결심하였다. ‘참된 삶’은 자유분방한 삶이었고 그것은 즐겁기 그지없는 나날이었다. 참된 삶을 위해서는 수업 시간을 무시하고 상급생을 따라서 다방에 갈 필요가 있었다. 다방에는 젊은 레지가 있었지만, 여자에게 눈길을 주는 것은 속물에게나 어울리는 졸장부의 짓이었다. 다방이라는 곳은 인류의 장래를 논하고 젊음의 고뇌를 말하기 위하여 있는 지성인의 공간이었다. 인생을 논할 때는 모름지기 심각한 표정을 지을 필요가 있었다. 반드시 말을 많이 할 필요는 없었으며, 심각한 표정으로 침묵을 지키는 것도 무방하였다.

자유료의 건물은 이층집이었고, 아래층은 독서와 대화를 위한 생활 공간이며, 위층은 침실로 사용되었다. 생활 공간은 마룻방으로 되어 있었고, 한 방을 열 사람이 함께 썼다. 자유분방한 열 사람의 젊은이들이 한 방에서 우굴거리니 항상 떠들썩했다. 실원(室員)들이 다방 또는 영화관으로 몰려갔을 때 혼자 남으면 조용히 예습과 복습을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쩨쩨한 친구’라는 오명을 면하기 어려웠다.

자유료는 학교 공부를 위한 곳이 아니라 ‘인생 공부’를 위한 곳이었다. 그곳에서는 ‘인생 공부’를 위한 크고 작은 모임이 자주 있었다. ‘신(神)’에 관한 대화를 위한 모임도 있었고, ‘일본의 군국주의 비판’을 위한 모임도 있었다. 더러는 모닥불을 피워놓고 둘러앉아서 혹은 고담준론하고 혹은 비분강개하는 모임도 있었다.

그러나 모임에 참석하고 안하는 것은 각자의 자유였다. 그러나 나는 거의 빼놓지 않고 참석하였다. ‘인생 공부’에 대한 열의가 각별해서라기보다는 ‘쩨쩨한 친구’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도 하고, 내가 통이 큰 사람이라는 자신감을 갖기 위해서 그렇게 했을 것이다.

‘콤파’라고 불린 그 숱한 모임에서 하는 일 또는 짓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말잔치고, 또 하나는 북치고 춤추며 노래하는 짓거리. 이 두 가지를 모두 잘 하면 ‘쩨쩨한 친구’의 반대인 ‘말이 통하는 친구’ 또는 ‘위력(偉力)을 가진 친구’로서 인정을 받게 마련이었다.

나는 우선 말잔치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싶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말잔치에서 발언할 사람들이 미리 정해져 있는 경우는 적고, 대개 기회를 포착하여 발언권을 차지해야 했는데, 조선 반도 충청도 출신인 나는 순발력이 약하고 과단성이 부족하여 늘 한 발 늦었다.

나로서는 북치고 춤추며 노래하는 쪽으로 진로를 모색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짓거리에 특별한 소질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저 미친놈처럼 나대면 그럴듯하게 보일 수도 있었다. 그러는 가운데 배짱도 조금은 늘었고, 어쩌다 발언의 기회를 잡으면 짧게 한 마디 인상적인 말을 토하는 요령도 터득하게 되었다. 어쨌든 나는 피나는 노력을 했고, 그 결과로서 이백 수십 명 요생(寮生)들 가운데서 서열로 2위에 해당하는 감투까지 쓰게 되었다.

그러나 감투의 대가는 엄청난 것이었다. 학교 성적이 엉망으로 떨어졌고, 외국어 실력을 쌓아야 할 귀중한 시기를 허송세월한 꼴이 되었다. 그 당시에 나는 장차 학자가 될 생각은 없었지만, 결국 학자의 길을 걷게 되었으니 그 시절에 치른 대가가 치명적 상처로 남아서 평생토록 따라다녔다.

그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 얻은 것이 저 어줍잖은 감투 하나만은 아니라고 스스로 위로하기도 한다. 처음에는 ‘쩨쩨한 친구’가 아닌 통이 큰 인물의 흉내를 내며 공연히 겉멋만 부리고 세월을 보냈지만, 학교 성적이나 여성 교제 따위의 일상적인 것을 무시하고 거들먹거리기를 오래 하는 동안에, 다소는 자아(自我)의 세계가 넓어졌다고 믿는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장차 돈 벌 궁리나 출세할 계략 따위는 염두에 없었다는 사실이다. 막연하기는 했지만 항상 민족의 문제 또는 독립의 문제에 마음을 썼으며, ‘나’ 개인의 이익만을 계산하는 따위의 쩨쩨한 친구는 아닌 경지가 어느 정도 사실로 다가왔다.

 

대학 교수가 되고, 근 30년이 지난 뒤에 그 기숙사에서 함께 지냈던 일본 동창생을 서울에서 만난 적이 있다. 일본의 동창생들은 내가 동분서주하는 직업을 갖지 않고 앉아 있는 시간이 많은 철학 교수가 된 것을 매우 뜻밖이라고 생각한다는 말을 그때 들었다. 내가 학생 시절에 껄렁패였다는 글을 읽은 오늘의 독자들이 내가 허풍을 떨고 있다며 믿지 않는 심정과 대조적이다. 그러나 사실은 사실이다. 한국에서의 내가 샌님인 것도 사실이고, 일본에서의 내가 껄렁패였다는 것도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