往生의 길잡이

                                                                                           孔 德 龍

 분명 잠든 사이다. 가래가 끓어올라 숨이 막힐 듯 답답하였다.

‘깨어나야지…….’

잠결에서도 의식을 다그치며 눈을 번쩍 떴다. 사위는 고요하고 변한 것이란 하나도 없다. 벽시계는 똑딱 제 시간을 새기고 있었다.

잠든 사이에 기도가 막혀 꼴깍 숨이 넘어가는 수가 있다던데…….

불교에서는 운명을 ‘왕생’이라 하는데, 임종이 깨끗하면 극락정토를 간다고 한다. 부처님쯤 되면 ‘대왕생(大往生)’이라 한다던가. 성철 큰스님은 운명할 날을 미리 짚고 있다가, 그날이 오니 조금도 흐트러짐없이 왕생하였다고 전해진다. 광주의 K  수필가의 노모는 이틀 동안 혼수 상태에 있다가, 아들이 당도하니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다시 감았다. 모두 거룩한 임종이었다.

천주교에서는 신부의 운명을 ‘선종(善終)’이라 한다. 얼마 전 별세한 오 신부님은 평생 나병 환자들의 동반자였다니, 그 죽음은 가히 ‘선종’이란 말이 어울린다.

그러나 우리 중생은 편안히 눈 감기 어렵다. 임종을 맞은 한 환자는 “내가 죽은 후에도 태양은 여전히 동쪽에서 뜨고, 지방 선거는 어김없이 치루어질 것이다. ’98 파리 월드컵 대회에서 한국팀이 16강에 오르는 것도 못 보고, …차마 눈이 감기지 않는다.”고 하면서 눈을 감았다던가.

괴테는 임종을 맞아 “더 많은 빛을…….”이라 하였다는데, 괴테가 한 말이라서 무슨 심오한 뜻이 있는 것 같지, 한 시정인이라면 그저 앞이 어두워진다는 소박한 소리로 들렸을 것이다.

일본의 한 광가사(狂歌師)*는 의사로부터 기한부 인생 선고를 받고, “아니, 벌써? 큰일났구나!” 수선을 떨었다는 것이다.

논어에서 한 마디 인용해 보자.

‘새가 죽으려 할 때 그 우는 소리는 슬프고, 사람이 죽으려 할 때 그 말은 착하다.’ ─ 이렇게 사람은 제 본성으로 돌아가는가 싶다.

‘우리들에게 곧 마지막 시간이 와서  / 인생을 하직한다면 / 고맙습니다 한 마디 남기고 떠납시다.’ ─ 어떤 시인의 ‘감사’의 한 구절이다.

국군의 날이나 5·18 광주 항쟁의 추도식에서 유족들을 지켜보니 해마다 나이를 보태가는 모습이 뚜렷하다. 그런 어버이들도 후일 떠날 때는 ‘감사합니다’ 한 마디 남기라고 부탁한 것이다.

자신의 운명에 감사하고 묘비명을 미리 적어둔 사람이 있었다. 문학사에서는 ‘마지막 로맨티스트’라 불리우는 영국의 시인이자 작가인 R.L. 스티븐슨(1850~94)이다.

세속적인 견지에서 그는 결코 다복한 인생을 살지 못했다. 44세라는 나이가 아깝다. 요양차 고향 스코틀랜드를 떠나 사모아 섬에 정착하였다. 낮에는 개간하고 밤에는 야학 가르치고… 그의 출세작 『보물섬』은 미국인 유부녀의 덤받이 자식들을 위해 쓴 작품이라니, 어지간히 무던한 의붓아버지였다.

1894년 12월 3일 아침, 『허미스턴의 강둑』을 집필하던 중, 갑자기 혼절하여 이튿날 숨을 거두었다. 그의 유작 가운데 『묘비명』이 있었다. 바에아(Vaea) 산정 무덤 앞에 그 원고가 새겨진 비석이 섰다.

 

‘넓고 별빛 찬란한 하늘 아래

무덤을 파고 나를 눕혀다오

즐겁게 살다 가는 한평생, 기쁘게  죽어서

 나는 내 뜻에 따라 여기 누웠노라.’(이하 생략)

 

‘즐겁게 살다 가는 한평생’─  그래서 ‘기쁘게 죽어서’ …이것은 큰 지명(知命)이요 깨달음이라 하겠다. 즐겁게 산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기쁜 죽음이 아닐까.

임종을 앞둔 환자를 보살펴주고 그 심리 과정을 연구하는 분야가 있다. 의학 용어로 ‘터미널 케어(Terminal care)’라고 한다. 이 분야의 연구가이고 세계적 베스트셀러 『죽음의 순간(On Death and Dying)』(1969)의 저자로서 널리 알려진 미국의 여의사 엘리자베스 큐불러 로스(71)는 지난해 가을, 독일의 주간지 슈피겔(Der Spiegel)의 취재를 받아, 그 인터뷰 기사가 게재되었는데(1997년 39호), ‘죽음의 연구가’로서의 체험이 사뭇 흥미롭다. 여사 자신이 몇 번인가 뇌졸중을 체험하고 죽음을 각오하고 있는 환자이다.

“지난 2년 반 동안, 밤마다 오늘 밤 죽었으면 얼마나 기쁠까 ─ 그런 생각을 되풀이 해왔답니다. 지금 나는 살아 있지도 죽은 상태도 아닙니다. 내가 나를 사랑할 수 있게 될 때 비로소 죽음을 각오하게 될 터인데,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는답니다.”

“내가 직업적으로 성공한 것도 나를 사랑하는 데 아무 보탬이 되지 않습니다.”

“나를 격려하는 팬들의 편지 같은 것도 아무 위안이 되지 않습니다.”

죽음에 임하는 환자의 심리 상태는 부인(否認) ® 노여움 ® 흥정  ® 억울, 마침내 수용 ─ 이 5단계를 밟아 임종을 맞이한다는 게 보통 사람들의 심리 과정이라 한다.

사후의 세계에 언급하자, 로스 여사는 과학자의 상식을 초월하여 “저세상이 있다.”고 단언하였다.

『죽음의 순간』이 세상에 나오면서 큰 반향이 일어났는데, 임종의 환자를 수없이 면접한 결과 얻어낸 ‘사후의 문제’가 언급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신과 의사들은 여사만의 ‘실험의 결과’ 정도로 받아들였지 ‘저승’을 인정하지 않았다. 숨을 거두기 전 두뇌의 산소가 희박해짐으로 그런 가정을 세웠으리라는 주장도 나왔다.

그런데 죽음을 눈앞에 둔 로스이고 보니 당연히 사후의 세계를 골똘히 생각하게 된 것이다. ‘죽음’을 정의함에 있어 사후를 고려하지 않으면 정의가 성립되지 않는다고도 하였다.

로스 할머니는 지금 애리조나의 황토 사막 한가운데 외딴 집에 혼자 살고 있다. 부군하곤 일찍이 헤어지고(같은 정신과 의사인데 이론상의 견해 차이로 이혼했다는 소문도 있다.) 아들은 멀리 분가해 나아가서 곁에 없다.

로스 할머니가 이야기하는 ‘사후의 세계’는 임사(臨死) 체험자의 증언을 분석한 것이다. ‘죽음이란 번데기에서 빠져 나아간 나비와 같은 것이다.’란 구절이 있는데, 인간의 사후 실체를 나비에 비유한 것이 재미있다.

또 충격적인 예를 들고 있다. 폴란드 유대인 강제 수용소에서 보았다고 하는데, 죽음을 앞둔 사람들이 벽에 그려놓은 수없이 많은 나비 그림들……. 수인(囚人)들은 머지않아 나비가 될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나비는 무엇인가. 전생(轉生), 환생(還生), 윤회(輪廻)의 상징적 존재로 받아들여진다. 하늘하늘 날다가 꽃잎에 앉는다. 꽃에서 푸대접받으면 다시 날개를 펴고 어디론가 사라지는 부유(浮遊)…….

사람의 경우는 숨을 거두면 고요함과 훈훈함에 감싸이고 곧 눈부신 빛을 만나는데, 그 ‘빛’이야말로 에너지, 영혼, 무조건의 사랑 같은 것이라 한다.

나비에 해당하는 그리스 말의 ‘푸시케’에는 나비 말고는 ‘마음’, ‘영혼’의 뜻이 있다고 한다.

로스 할머니는 ‘안락사’에 언급하여 “환자의 고통을 이유로 의사는 간단히 죽음 쪽으로 인도하는데, 이는 마치 인생을 졸업하기 전에 최후의 교훈을 배울 기회를 환자로부터 빼앗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 狂歌師 : 우스갯소리를 담은 단가를 짓는 사람. 형식은 5·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