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랭이꽃 그 향기는

                                                                                      이 정 호

 한낮 더위가 한풀 꺾이고 서늘한 바람에 어둠이 묻어오는 청냉(淸冷)한 저녁, 나는 이런 저녁이 너무 좋다. 푸른 저녁 그림자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거기엔 부드럽고 느긋하게 해주는 평화와 삶에 지친 가슴을 어루만져주는 포근함이 있고, 가슴을 시원스럽게 터주는 신선한 기운이 있다. 풀벌레가 울고 한무리 새 떼가 붉은 놀을 날아서 둥지를 찾아가는 때, 모두가 편안하고 선하디 선하다. 번잡스럽고 힘겨운 세상살이도 그런대로 참고 견딜 만하다 싶다.

이때는 이유 없이 행복하다. 삶이 지극히 단순해진다.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고맙다. 놀을 바라보고 있으면 현실이 문득 아름답다. 그래서 저녁 나절 삶들은 너그러워지고 얼마쯤은 성숙해진다.

휴일인 그날도 저녁 나절 야외용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 서쪽 하늘 불그레한 놀을 바라보면서 서늘한 바람을 쐬고 있었다. 저녁놀진 구름이 환상적이었다. 그때 한줄기 바람에 실려온 난향 같은 냄새가 콧속 깊이 파고들었다.

패랭이꽃 향기였다. 어쩌다 그리 되었는지 모르겠는데 뜰에 있는 한 화분에서 돋아나 꽃을 피운 것이다. 줄기나 잎은 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풀과 같고, 가녀린 꽃잎도 언뜻 보아서는 눈에 들지 않는다. 내가 이 꽃에 관심을 두게 된 것은 전적으로 향기 때문이었다.

코를 대어보았다. 상큼한 향이 톡 쏘듯 한다. 바람만 살짝 불어도 힘없이 부서질 것만 같이 실갈래진 꽃에서 어떻게 이런 향기가 나는 것일까. 그러나 자세히 보면 볼수록 꽃이 재미스럽고 예쁘다. 미모를 안으로 감추려는 듯 수줍은 자태가 한층 눈길을 끈다. 강하게 잡아끄는 또 다른 매력, 성적인 매력이라고나 할까. 그만큼 고혹적이기도 하다.

나는 그만 홀딱 반했다. 하찮게 보아왔던 이 조그만 야생 꽃에 혼을 빼앗길 정도로 반해버린 것이다. 이후로 나는 야생 꽃들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

사람들은 편히 배불리 먹고 눈을 즐겁게 하려고 야생을 가져다 품종을 개량하고 있다. 그런데 꽃의 경우는 잘못하고 있는 것 같다. 다른 것은 몰라도 더 예쁘게 하려는데는 실패했다고 생각한다. 이는 내가 패랭이꽃을 보고 나서 얻은 결론이다.

장미꽃이 찔레꽃보다 아름답다고들 하나 그렇지 않다. 찔레꽃을 조금만 관심 있게 살펴보면 아름다울 뿐 아니라 향기도 장미보다 윗길이다. 꽃의 구조나 향기의 순수성이 그렇고, 더구나 자연 본래의 완벽함에서 느낄 수 있는 꽃다움에서 그렇다. 두고두고 보아도 지리하지 않는 데에 이르면 더 이상 말할 것도 없다.

매발톱을 보면서 개량종 꽃 어느 것이 이처럼 묘한 생김새를 하고 있나 생각해 보았는데, 아무리 해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매발톱꽃은 그야말로 신이 짓궂은 상상과 장난기가 발동해서 만들어낸 것 같다.

학문적인 이론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오묘한 자연을 그대로 두지 않고 변질시키려 할 때 본래의 맛과 향을 따를 수 없음은 당연하다. 사람의 눈맛에는 들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야생이 지니고 있는 순수함을 잃음으로써, 맑음이나 그윽함 또는 싫증나지 않는 자연미 등은 훼손되지 않았나 싶다. 약초에 있어서는 더해서 인삼이 약효가 좋다 하나 산삼을 따르지 못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왜 그럴까. 패랭이꽃만 해도 그게 어디 저 혼자서 된 것인가. 산과 들을 스쳐온 바람이 어루만지고 싸아한 새벽과 놀진 저녁, 새들의 노래 그리고 촉촉한 비와 따사로운 햇볕이 함께 만들어낸 자연의 산물, 그러나 이들 모두가 하고자 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저절로 그렇게 저답게 살아갈 뿐인 것을. 그런 가운데 꽃이 피고 씨를 맺고 그 씨가 바람에 실려 또 다른 곳을 찾아 뿌리를 내리면서 저대로의 존재를 자연스럽게 실현하고 있는 것, 사람의 손이 닿으면 그 자연스러움이 왜곡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야생 꽃씨는 한겨울에도 밖에 놓아두어야 싹이 튼다는 걸 알았다. 위한답시고 방안에 따뜻히 모셔놓으면 싹이 나지 않는다. 이놈을 속이는 것 같지만 이런 때는 냉장고에서 얼렸다가 심으면 된다. 패랭이꽃이 얼마 전에 시들어 씨를 맺는가 싶었는데 오늘 씨를 받으려고 씨주머니를 만져보니 비에 절어 썩어버렸다.

전문가에게 알아보아야겠지만, 집에서는 안 되는가 보다. 저 있는 곳으로 보내달라는 무언의 반항인가. 순간, 꽃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매발톱꽃은 안 그런데 이놈은 개성이 퍽이나 강한 놈인가 보다. 하기야 야생 것은 야생 그대로 놓아두어야 하는 것이다. 제 식대로 움터 꽃을 피우고 씨를 맺어 대를 잇는 그들 삶 속에는 강인함 그 이상의 깊은 철리가 담겨 있는 것만 같다.

고향 앞산은 그저 밋밋하니 볼품 없어도 평생 뇌리를 떠나지 않는 까닭은 자연 그대로가 지니고 있는 무한의 멋과 그 속에 깔려 있는 신의 의지 같은 것 때문이다.

화가가 산수화를 그리면서 가장 신경을 쓰는 것 중 하나가 산과 들, 골짜기와 나무의 형태라 한다. 자연에는 똑같은 것이 없기 때문인데 붓을 놀리다 보면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형태가 같은 산, 같은 바위와 나무가 그려지는 것이다.

인공의 특징이 획일적이라면 자연의 그것은 다양성이라 할 수 있다. 인위적인 것은 무엇이든지 곧 식상하게 되어 있다. 자연적인 것이 싫증나지 않고 언제나 새로운 까닭도 이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어렵게 생각할 것 없이 한 마디로 삶을 풍요롭고 행복하게 살려고 하는 것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분명하다. 당장 더 많이 더 쉽게 얻기 위해서 종을 개량하고 자연을 파헤쳐 개발하는 데에만 신경쓸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자연 그대로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데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인간이 아무리 지능을 내세워 잔재주를 부려보았자, 어차피 자연의 한 존재로서 자연의 품안에서 삶을 영위할 수밖에 없을 것이며, 따라서 자연 속에서만이 삶의 가치와 행복이 보장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