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질서

                                                                                         정 규 복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노라면 쓴맛과 단맛으로 엉켜 살아가는 가운데에도 누구이고 단맛만을 맛보며 살기를 원한다. 하지만 인간은 운명적으로 쓴맛과 단맛을 함께 맛보며 나름대로 성장되면서 살아가게 마련이다.

이같은 되풀이되는 쓴맛과 단맛의 교차 질서와는 달리, 요새와 같은 교통의 폭주시대에 난데없는 교통사고로 죽거나 불구자가 된다던가, 심하면 가족이 몰살하는 큰 불상사를 만나게 됨을 종종 보게 된다. 이런 대형의 비극을 과연 어떻게 풀어야 할 것이냐?

인간이 애초에 종교를 지니게 된 데는 그와 같은 불상사를 방지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지만, 예기치 않은 끔찍스런 불행은 종교를 지니고 있건 없건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가능의 것이라는 것이다. 다만 그런 끔찍스런 불행을 당하여도 종교의 유무에 따라 그 아픔을 극복하고 안정을 되찾게 하는 힘은 생기게 될 것으로 기대된다.

근래에 나의 주변에서 일어난 끔찍한 참사와 슬픔 또는 행·불행을 들어보기로 하자.

내 큰자식과 절친한 친구는 40대 초반의 행복한 크리스천이며 샐러리맨으로서 슬하에 초등학교의 두 딸을 가진 단란한 가정의 가장이었는데, 그의 두 딸은 모두가 유난히 노래를 잘 하였다. 어느 날 콩쿠르 대회에 출전시키기 위해 이른 새벽에 고이 잠자는 아이들을 깨워 새벽길을 달리다가 그만 난데없는 교통사고로 두 딸을 모두 잃었다. 또 어느 교회에서는 4·50대의 한창 일할 전도사와 목사가 성실하게 교회에 봉사하여 그야말로 누구나 부러워한 교회로 꼽혔는데, 한 달 사이에 전도사는 간암으로, 목사는 선교 사업차 외국에 출장중 교통사고로 세상을 떴다는 것이다.

위와 같은 예기치 않은 비극과는 달리 나의 지기 L형은 지난해 낙방했던 큰아들과 연년생인 작은 아들이 응시하여 한꺼번에 모두 일류 대학에 합격되어 축제가 벌어진 반면, 같은 지기 K형은 그 전해에 낙방했던 큰아들과 역시 연년생인 작은 아들이 함께 응시하였지만 보기 좋게 낙방한 사건이 있어, 우리 친구들 사이에 큰 대조의 화제가 되었다. 더구나 낙방된 K형은 내성적인데다가 본래 술도 입에 대지도 못하는지라, 그 낙방의 아픔을 달래기 위해 하루에 10여 군데의 다방을 방황하였다고 한다.

위의 예기치 않은 크리스천들의 두 사건의 비극은 특정한 의식의 기도가 있었을 것이라 짐작되지만, 낙방의 쌍곡선인 희비극의 두 친구는 특정한 종교가 없어 별다른 사전의 기도가 없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인간이란 다시 말하거니와 행과 불행이 엇갈리는 가운데 성장되고 늙고 병들어 죽어야만 하는 무상의 동물이지만, 순간에 교통사고로 식구들이 몰살한다든가, 아니면 하루 저녁에 일확천금이 생긴다든가 하는 것은 그리 흔치 않은 드문 사건들이다. 말하자면 이런 것들은 종교적 기도나 혹은 당한 당사자들의 적선과 적악과는 전연 무관한 누구에게나 예기치 않게 당할 수 있는 가능의 것이다. 속된 말로 재수가 없으면 당하고, 재수가 있으면 모면되는 운명의 사항이란 것이다.

이런 불가사의한 운명의 기로에서 흔히들 말하기를, 운명은 아무도 모르는 불가지론이란 것이다. 그러나 운명은 아무도 모른다는 불가지론과는 달리 인생의 순간 순간은 모른다 할지라도 인생의 시간과 폭을 크게 보면, 콩 심은데 콩나고 팥 심은데 팥난다는 속언과 같이 환경과 조건에 따라 대충 파악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춘하추동의 시간적 추이에 따라 따뜻한 봄이 지나면 무더운 여름이 오고, 여름이 가면 서늘한 가을이 오고, 가을이 지나면 추운 겨울이 오고, 겨울이 지나면 아름다운 꽃의 계절이 오면서 다시 순차적으로 질서 있게 사계의 이행이 되풀이되는 가운데 영원히 지속된다는 것이다. 여기에 변칙이 있다면 따뜻하고 덥고 서늘하고 추운 기후의 이행이 질서정연하게 되풀이되는 가운데에도 간혹 따뜻함과 무더움, 서늘함과 추움이 좀 길게 혹은 짧게 혹은 강하게 혹은 약하게 혹은 드물게 변칙을 일으키는 경우도 있지만, 여름이 될 때 겨울이 온다든가, 가을이 올 때 봄이 온다는 변칙은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인간도 그런 테두리를 벗어날 수가 없다. 유년기를 지나면 소년기가 오고, 소년기가 지나면 순차적으로 청년기·장년기·노년기가 누구에게나 이행되지만, 유년기에서 청년기를 건너 뛰어 장년기가 된다든가 하는 변칙은 전연 상정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다만 사람의 체질과 환경에 따라 나이에 비해 더 젊고 더 늙고 변칙은 있을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유년기와 소년기·청년기·장년기·노년기의 일정한 순차에서 때로는 요사하는 사람, 한참 일할 청·장년기에 과로로 죽는 것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거의가 본인의 부주의와 부모의 무관심 등의 과실이 일반적이라는 것이다. 이런 불가사의한 변칙의 사건을 옛날에는 신의 작위로 돌려 종교적 행례를 벌렸지만, 인지가 발달됨에 따라 과학의 발달로 많은 불가사의한 것이 극복되었고, 지금도 운명으로 돌리는 사소한 분야까지도 앞으로는 결국 과학의 발달로 극복될 것으로 믿는다. 인간과 대치된 자연물도 거의 예외없이 과학의 발달로 수명을 다할 것을 기대한다. 즉 우리의 최대 관심사인 인간의 건강 및 수명은 신앙적 결단에 의해 좌우되기보다는 본인의 관심과 환경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의 근본 정신은 인간의 길흉화복에 예속시키기보다는 최상의 인생 문제인 윤리에 연관시키는 것이 오늘날 고도한 과학 문명의 시대에 걸맞는다고 생각된다. 즉, 유가의 경우 선을 쌓는 사람은 반드시 넘치는 경사가 따르고, 악을 저지른 사람은 필히 재앙이 내린다는 ‘善福惡禍’를 최대의 윤리강령으로 삼는 것같이, 불가에서는 ‘因果應報’로, 기독교에서는 드문 말이지만 ‘심은대로 거두리라’는 말로 대체하고 있다. 나는 이것이 인생의 가장 보편적 선악의 질서라고 강하게 믿는다. 즉, 창조주의 뜻이며 역사의 정신이라는 것이다.

희극과 비극, 행복과 불행은 인간이 살아가는 과정에서 누구에게나 부닥치는 필연적 사이클이지, 종교적 내지 기복적 기도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희극이 있으면 비극이 따라야 하고, 행복을 맛보려면 불행을 통하지 않고는 이루어지지 않은 불가리의 상승작용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은 누구나 행·불행의 수레바퀴의 틀에서 이를 일찌감치 인지하여 자기의 운명을 스스로 사랑하면서 ‘영원한 것(eternity)’에 대하여 불타는 정열로 이 생이 다할 때까지 끊임없이 추구하는 가운데 희비극의 순간적 아픔은 극복되리라고 기대된다. 결국 창조주의 본체는 초자연적으로서 불가사의라 하지만, 밖으로 표출된 현상의 질서는 가시적으로서 선악이 분명하며 과학적이며 질서정연하다는 것이다.

지구는 우주의 시간과 공간의 질서에 의하여 태양의 궤도를 영원히 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