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이 날개라지만

                                                                                                吳 景 子

 광화문 버스 정류장에서 친구를 기다리다가 길 옆 덤핑 옷가게에 들어갔다. 가게가 비좁아서 인도에도 옷걸이 틀을 여러 개 내놓고 옷을 진열해 놓고 있다. 넝마라고 말해야 할 옷이 태반이었으나 그 중 몇 벌은 쓸 만한 것도 눈에 띄었다. 마음에 드는 것 두세 가지 중에서 몸에 맞을 듯한 깃이 없는 녹색 웃옷을 골라내 입어보았다. 허리께가 조이는 듯했으나 손을 조금 대면 너끈히 입을 것 같아 만 오천 원을 주고 샀다. 옷감의 촉감이 가슬가슬하여 초가을과 늦은 봄에 입으면 좋을 것 같았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옷장 안에서 그 웃옷과 색깔이 맞을 듯한 옷들을 꺼내 입어보았다. 옷을 아주 잘 산 것 같았다. 재빨리 허리선을 손질해서 옷장 안에 걸어놓았다.

저녁 식사를 치르고 식탁에 앉아 며느리와 이야기하다가 낮에 산 옷 자랑을 했다. 며느리가 한번 입어보라고 권해서 새 옷을 갈아입고 전문 모델처럼 주방 안을 오갔다. 그런데 며느리의 반응이 이상했다. 얼굴을 찡그리고 양 손을 흔들며 도리질을 하고 있었다.

“어머니, 새마을 운동이요, 새마을 운동이 생각나요.”

며느리의 말은 내 옷이 새마을 운동을 할 때 운동원이 입던 유니폼과 색깔이나 모양이 같다는 것이다. 며느리는 그 말끝에 충고의 말까지 덧붙였다.

“어머니, 이제는 그런 싸구려 옷은 사지 마세요. 어머니쯤 되시면 고급 옷을 입으셔야지 그게 뭐예요.”

나는 뜻하지 않은 며느리의 말을 듣고 머쓱해졌다. 며느리는 의상학을 전공했고, 유행을 따르고 멋을 내는 면에서는 조금도 남에게 뒤지지 않는 편이었다. 그런 며느리가 그처럼 질색을 한다면 문제가 있는 것이다. 싼값으로 샀다고 기뻐하던 내 머리 속에서 거금 만 오천 원을 내다버린 자책감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슬그머니 안방으로 들어가 거울 앞에 서보았다. 내 눈에는 녹색 옷이 요즈음 유행하는 회색이나 검정 계통의 옷보다 훨씬 더 내게 어울리는 것 같았다.

며느리가 말하는 값비싼 옷은 옷감의 소재가 좋고 입으면 품위가 있어 보인다고 하지만, 값을 생각하면 서민의 입장에서는 좀처럼 가까이 할 수 없는 물건이라, 나는 아예 외면하고 있다. 잠깐 지나가는 유행을 따라 무리한 낭비를 한다고 내가 더 돋보일 리도 없기 때문이다.

내가 비싼 옷에 관심이 없는 이유는 또 하나 있다. 백화점 안을 다 돌아도 내 몸 치수에 맞는 옷을 찾기 힘들어서이다. 맞춤옷을 주문할 수도 있으나 가격 할인도 되지 않아서 남보다 더 비싸게 사야 하니 그런 어리석은 일을 할 수는 없었다. 그저 오다가다 거리에서건 시장에서건 몸에 맞는 윗도리를 만나면 사 입었고, 이따금 동대문 시장의 맞춤집에서 바지를 맞춰 입곤 했다.

글을 쓰기 시작한 후로는 옷을 고르러 다니는 시간도 아까워서 가지고 있는 옷으로 대강 색깔을 맞춰 입는다. 그래도 내 몫이 된 옷은 오래되어도 버리지 않고 아껴서 손질해 입기 때문에 내 옷장 안에는 옷이 가득 차 있다.

숙련된 솜씨는 아니지만 아이들을 기르면서 옷을 거의 내 손으로 만들어 입혔다. 만약 글을 쓰지 않았다면 내 옷은 내가 만들어 입었을 테고, 손녀들의 옷도 예쁘게 디자인해서 만들어 주었을 것이다.

나에게는 옷에 대한 아픈 추억이 있다. 옷이 귀했던 일제 말기와 6·25를 겪은 세대는 모두 엇비슷한 추억이 있겠지만,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나는 그때가 생각날 때면 옷을 더 아끼고 소중히 다루게 된다.

6·25 전쟁 전해에 중학교에 입학했는데 교복을 준비해야 했다. 흰 깃을 덧댄 감색 웃옷과 치마와 겨울용 바지 그리고 여름용 흰색 블라우스가 필요했다. 9월 초의 입학 때는 집에서 만든 흰 옥양목 블라우스에 어머니가 입으시던 갈색 주름치마를 입고 갔다. 누구나 생활이 힘들 때였고 곧 동복을 준비해야 했으므로, 내가 입은 갈색 치마를 나무라는 사람은 없었다.

동복을 준비하는 것은 집집마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종로에 있던 지정 양장점에서 감색 사지 옷감으로 맞추는 학생도 있었으나, 언니나 선배의 옷을 얻어 입기도 했고, 광목에 검정물을 들여 만들어 입기도 했다.

내 교복 마련을 걱정하시던 할머니는 어느 날 나를 데리고 고향 사람이 하는 양복점을 찾아나섰다. 남대문 시장을 지나 남산으로 오르는 언덕길에 판자촌이 있었는데, 지저분한 가게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그곳에 양복점이 있었다. 한 평 정도 크기의 가게는 재단대로 쓰는 책상과 발재봉틀 하나로도 꽉 차버려서 주인 남자가 좁은 골목길에 나와 내 몸 치수를 쟀다. 할머니는 윗도리를 만들라고 이르셨다. 바지는 고모의 감색 바지를 얻어 입기로 했고, 치마는 이듬해 봄에 마련하기로 했다. 교복 치마는 결국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마련하지 못했다.

완성된 교복을 찾아왔는데 깃이 좁은 신사복을 개조한 것이라 우리 교복의 깃 모양보다 훨씬 작았고, 허리띠는 작은 조각 천을 여러 개 이어 겨우 만들어 놓았다. 흰 깃을 덧달아 입으니 깃 문제는 해결되었다. 교복을 입게 된 것만 기뻐서 위아래가 색깔이 다른 교복을 입고 즐거운 중학 생활을 시작했다.

이듬해 겨울, 부산으로 피난을 가서도 오직 그 교복 한 벌로 학교에도 갔고, 어린이극을 하러 방송국에도 다녔다. 안감이 삭아서 너덜거리게 되자 안감을 모두 뜯어내고 겉부분만 남은 것을 입고 다녔다. 학교에서 조직한 군부대 위문단에도 참가했는데, 내가 안감도 없고 세탁 한 번 한 적도 없는 교복을 입고 있다는 것을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사춘기를 맞은 한창 나이의 소녀가 옷차림에 대해서 전혀 부끄러움을 모르고 그 시절을 보냈기에 옷에 대해서는 지금도 무덤덤한 모양이다.

내일은 낡은 검은색 원피스에 새로 산 녹색 웃옷을 걸치고, 친구의 두 번째 시집 출판기념회에 갈 예정이다. 친구의 시 한 편을 골라 멋지게 시 낭송도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