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골목길

                                                                                                羅 熙 子

 신문을 집어들며 내다보는 새벽녘 작은 골목길, 나에게는 할머니 등보다 더 좁은 골목길을 쳐다보는 습관이 있다.

어린 동심들이 꿈을 키우던 공간이며, 미로와 같은 공간인 그 골목길을 내다보면 어린 시절의 내가 나타나기도 한다. 어른들에겐 거저 일터에 나아갔다 돌아오는 작은 통로의 의미지만, 아이들에겐 바로 생활의 터전이며 수많은 동심들이 어우러지던 꿈의 공간이었다.

그래서 언제나 자유로운 마음의 공간은 골목길이었다. 어둡고 비좁은 방과 부모들의 잔소리, 가난과 배고픔으로부터 잠시 벗어나 티없이 맑은 동심으로 서로를 위로했던 곳, 토담집의 굴뚝은 해질녘에 은밀히 모이는 집합 장소였고, 달밤의 후미진 방앗간 모퉁이에서는 우리만의 밀어와 정보가 교환되던 곳이었다.

3학년 담임 총각 선생님과 새로 부임한 여선생님이 느티나무 아래에 다정하게 앉아 있는 모습이 심상치 않다던가, 아무개의 여동생에게 옆동네 대학생이 구구절절한 연애편지를 보냈다던가, 그래서 때로 질투하고 작은 상처들을 어루만져주었던 곳도 역시 골목길이었다.

수많은 ‘가위 바위 보’와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와 ‘여우야 여우야 뭐하니’의 외침 속에서 저마다 놀이를 통해 꿈을 어루만졌다. 비오는 날은 골목길에 떨어지는 낙숫물을 바라보며 적막과 고독을 익혔고, 함박눈 쏟아지는 겨울철엔 눈덩이를 굴려 거대한 눈사람을 만들어 하얀 축제를 열기도 했다.

골목길, 그 이미지에 서려 있는 생생한 추억과 냄새와 소리와 빛깔과 친구들의 몸짓들이 아직도 내 가슴에는 모깃불처럼 아련하게 피어오른다. 딱지치기하고 고무줄 놀이하던 아이들은 유수한 세월 속에 어른이 되었고, 그런 골목길의 추억을 잊어버리고, 시멘트 콘크리트 쭉 뻗어난 골목길로 변화하면서 시골이나 서울이나 이제는 냉혹한 현실 속으로 사라진지 오래다.

우리는 골목길을 잃었다.

전직 대통령이 뻔뻔한 표정으로 우리들의 가슴을 아프게 한 담화가 생중계되던 곳도 집앞 골목길이다. 다듬이질 소리와 개 짖는 소리가 멀어지면서 주차 난으로 앞집, 옆집의 다툼만을 만들어 내는 곳도 골목길이다. 그 언젠가 미모의 아줌마가 어린이를 유괴하여 살해한 곳도 골목길이었다. 늦게 귀가하는 딸을 염려하게 만드는 곳도 골목길이다. 오늘 아침 뉴스의 탈주범 신창원이 출현하고 도주한 길도 골목길이었다.

그래도 골목의 정서는 살아 숨쉬는지 골목길의 이름은 아름답다. 언제부터였는지 골목마다 아름다운 이름이 표기되어 있었다. 말머리길, 달터길, 단비길, 구룡길, 잔디길…….

요즘 나는 이런 골목들을 만나고 지나친다. 그 정겹고 예쁘고 당당한 동네 고유의 이름들이 내 발길을 자꾸만 멈칫대게 한다. 세상살이에 빠진 나에게 묵묵히 걸어보라고 나지막이 속삭여 오는 듯하다.

그 향수가 누룽지처럼 깔려 있던 골목길에 핑계와 소란, 유괴의 위험 그리고 불안으로만 새겨지는 오늘이지만, 이제 다시 그 옛날의 골목길과 그 어린 동심들을 만날 것만 같다.

내가 사는 깊숙한 골목은 아직도 꼬불꼬불해서 20~30미터, 그 밖은 아리아리 보이지 않는다. 조금 전, 한 짐이나 되는 책과 남들보다 큰 도시락을 들고 학교에 다녀오겠다고 나선 아이의 뒷모습에서 나의 힘없는 미소만이 녀석을 따른다. 시험 준비에 지친 아이 몰래 안쓰러운 마음 감추며…….

내일 아침엔 종 소리 울리며 두부장수가 오겠지.

 

 

나희자

현대수필로 등단(93년).

저서 "돌을 깨는 사람들" 공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