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나무

                                                                                    정 진 권

 우리 집 대문 곁에 감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심은 지 어언 이십 년이다. 회초리만하던 것이 어느덧 자라 키는 세 길을 넘고 열매도 적잖이 열어 작년에는 일곱 접이나 땄다.

내가 이 감나무를 심은 것은 뜻밖에 실직을 당하고 그 울적한 마음을 달래보려 함이었다. 하필 감나무를 심었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나는 그때 혹 깊은 향수에 빠져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한다. 내 고향은 지금도 감나무가 지천으로 많다.

 

해마다 봄이 되면, 죽은 듯 거무튀튀한 우리 집 감나무의 빈 가지에도 새잎이 피어난다. 밝은 봄볕 속에 윤 흐르는 그 연둣빛 어린 잎새들, 그 잎새들에는 아름다운 미래에 대한 기쁜 꿈이 있다. 담 밖으로 내닫는 버스들의 독한 매연이 끊임없이 침범하지만, 우리 어린 잎새들은 조금도 그 꿈을 잃지 않고 여름으로 자란다.

여름이 되면, 그 연둣빛 어린 잎새가 더없이 짙푸른 큰 잎새가 된다. 감나무 한 그루를 다 뒤엎는 그 짙푸른 잎새들, 그 잎새들에는 삶의 왕성한 의욕이 넘친다. 세찬 소나기가 무섭게 퍼붓는 날에도 쉽게 지는 법이 없다. 오히려 그 소나기도 제 몸에 낀 때를 씻어내고 더 싱그러운 모습으로 드러난다.

드디어 가을이 되면, 그 잎새들이 노랗게 붉게 단풍이 든다. 티없이 맑은 가을 볕 속에 찬란한 그 잎새들, 일생을 다하여 소담스럽게 열매를 맺어 놓은 그 잎새들에는 회심의 미소가 흐른다. 그러다 늦가을의 어느 날 바람이 불면, 이제는 갈 때라는 듯이 후회도 미련도 없이 가지를 떠난다.

 

감꽃은 사월 말, 오월 초에 핀다. 바탕은 희지만 고추 꽃처럼 깔끔하지도 못하고 딸기 꽃처럼 산뜻하지도 못하다. 물론 라일락 같은 향기도 없고 목련처럼 훤한 데도 없다. 그저 무덤덤, 작고 촌스럽기만한 것이 감꽃이다. 게다가 잎새들에 가려서 어느 산골 오두막집의 언년이처럼 눈에도 잘 안 띈다.

그러나 제비는 작아도 강남을 간다고 했다. 눈에도 잘 안 띄던 그 언년이가 머잖아 시집을 가서 튼실한 아들딸을 쑥쑥 잘도 낳듯, 감꽃은 머잖은 가을날에 소담스럽게 빛날 열매를 꽃마다 맺는 것이다. 라일락이나 목련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잎새에 단풍이 들면 열매도 샛노란 빛이 된다. 높푸른 가을 하늘에 그 노란 열매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서 있는 감나무는 여간 자랑스러운 모습이 아니다. 나는 날마다 그 자랑스러운 모습을 바라본다. 그러다가 어느 날 문득 생각난 것처럼 장대를 들고 대문 지붕 위로 오른다. 하루에 한 접도 따고 반 접도 딴다.

감을 따노라면 지나가던 사람들이 신기한 듯 쳐다본다. 그들 중에는 한 개 달라는 사람도 많다. 나는 큰 인심이나 쓰듯이 한두 개씩 던져준다. 드문 일이기는 하지만, 그 감을 소매로 쓱쓱 닦아서는 주먹으로 툭 깨어 입에 넣는 사람도 있다. 옛날 내가 하던 방식이다. 그들의 고향에도 감나무가 많았을까? 땡감은 체하기 쉬우니 먹지 말라시던 우리 어머니의 말씀이 들려오는 듯도 했다.

감을 따고 나면 뜰에 자리를 깔고 아내와 마주앉는다. 곶감을 깎는 일은 언제나 즐겁다. 깎은 감은 스무 개씩 서른 개씩 엮어서 볕 좋은 곳에 넌다. 온 집안이 환해진다. 곶감이 고들고들 말라 단이 나면, 아내는 제사에 쓸 만큼만 남겨두고 여기저기 나누어 주기에 바쁘다. 동창 곗날에도 넉넉하게 싸 가지고 간다. 나도 학교엘 가지고 가서 교수들과 나누어 먹는다. 언젠가 한 노교수의 말이 이 곶감 하나 얻어먹으려고 남의 시사 지내는 데 쫓아다니던 생각이 난다고 했다.

웬만큼 곶감을 깎고 나면, 나머지는 여러 상자에 담아서 광에다 갖다둔다. 그리고 눈 내리는 어느 날 가만히 열어 보면, 하나같이 빨간 홍시가 되어 있다. 긴 겨울밤 속이 출출할 때 그 한두 개는 그렇게 달고 든든할 수가 없다. 어린 시절 내가 잠 투정을 할 때 할머니가 꺼내다 주시던 홍시도 그랬다.

나도 우리 집 감나무에 까치밥 몇 개는 남겨둔다. 빈 가지에 매달린 까치밥을 보노라면, 내 고향 그 냇가 미루나무에 틀었던 까치집이 그 위에 겹쳐온다. 까치 소리도 반갑게 들려온다. 까치 소리를 듣고 거울 앞에 앉는 옛 여인의 모습도 떠오른다.

우리 집 대문 곁에 서 있는 감나무 한 그루, 세상에는 그 잎새처럼 꿈과 의욕을 가지고 살다가 깨끗하게 떠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 꽃처럼 남의 눈에 띄지 않으면서 자기의 사명을 다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그리고 그 열매처럼 풍성한 업적을 이룩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사람도 많을 것이다. 되는 대로 살다가 후회와 미련 속에 떠나는 사람, 아무 이루는 일도 없이 그저 남의 눈코나 어지럽히는 사람, 가을이 와도 광주리나 내려다보고 서 있는 사람, 이런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사실에서 위안을 받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