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딱보 선생님

                                                                                           具 良 根

 나의 중3 때 도덕 선생님. 그 선생님의 별명이 할딱보였다. 우리 고장 사투리로 대머리를 할딱보라 한다. 그 선생님은 머리가 거의 벗겨지고 뒷머리 몇 가닥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 선생님이 오랫동안 가슴에 남아 잊혀지지 않는 것은 웬일일까. 가끔 중학교 동창을 만나면 꼭 그 도덕 선생님 이야기를 하며 한바탕 웃음꽃이 피게 되어 있다.

지금은 성함도 잘 기억할 수 없지만, 그 선생님은 확고한 자기 철학과 교육 지침이 있었던 듯하다. 그의 교육의 꽃은 성교육이다. 실은 지금 알고 보니 성교육이지 그때는 그것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나는 너무 어려서 학교에 입학하였기 때문에 다른 숙성한 아이들에 비해 상당히 감각이 늦은 편이었다. 그런데도 중3쯤 되니 무엇인가 감각이 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무척 호기심이 쏠리던 부분이었다.

그런데 우리 할딱보 선생님은 마음껏 우리의 궁금증을 풀어주셨고 흥미진진한 웃음보따리 속에서 다 이해가 가게 해주셨다.

“야, 이놈들아! 느그덜 ××× 쳐봤냐?”

온 교실은 박장대소 웃어대고, 어떤 아이는 책상을 치고 발을 구르며 웃어댄다. 그런데 선생님은 한 수 더 떠서 칠판에 ‘×××치다’고 판서를 한다.

아이들은 자기 눈을 의심하고 다시 보다가 거짓말 아닌 참말이란 것을 확인하고는 배꼽이 빠질 정도로 웃다가 지쳐서 책상에 쓰러질 정도가 된다.

선생님은 자기 의도대로 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셨는지 재미진 그 뒷풀이 설명이 이어진다. 그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며 자연적인 현상이란 것, 너희만한 때면 오히려 그런 감각이 있어야 정상적이란 것 등을 설명한다.

당시에 ‘도덕’이라는 책이 있긴 하였으나, 그 선생님은 한 번도 교과서를 펴고 강의를 한 적이 없었는 듯하다.

그 선생님이 대단한 선생님이란 것은 그때 담임 선생님에게서 들어서 알게 되었다.

교실 조회 시간에 누가 그 선생님이 웃긴다고 하자, 담임 선생님은 그분은 학생들의 어떤 반 담임도 맡지 않으며, 무슨 대학을 나온 분으로 우리 학교의 문에 벗는 분이라고 말씀해 주셨다.

우리는 가장 웃기는 그 선생님이 가장 훌륭한 선생님이란 말씀에 이해가 가지 않아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어느 땐가는 노트에 받아쓰기를 하라고 한다. 판서 글씨만 베껴 보았지 받아쓰기를 해본 적이 없는 우리는 어리둥절하였다. 아마 받아쓰기도 그 선생님에게서 처음 배운 것 같다. 하여튼 노트를 펴고 받아쓰기 준비를 하고 있는 우리에게 ‘남녀 교제시 주의할 사항’이라고 쓰라고 한다.

첫째, 단 둘이만 방에 있지 말 것.

둘째, 부득이하게 단 둘이만 방에 있을 경우에는 방문을 쬐끔(조금) 열어 놓고 있을 것.

셋째, 야외에서는 단 둘이 수풀에 들어가지 말 것.

넷째, ……….

 

여섯 항목을 부른다.

학생들은 쓰는 둥 마는 둥 또다시 웃음바다가 되어 자세가 형편없이 흐트러지고, 어떤 애들은 쓸데없는 농담인 줄 알고 웃다가 안 써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웬일인가, 시험 때 바로 그 문제가 나올 줄을. 아마 그 여섯 항목을 안 틀리고 다 쓴 아이는 거의 없었으리라.

다음 시간에 들어오신 선생님, 자기에게 공부한 학생은 절대 남녀 교제시 실수를 안하게 되어 있다고 역설이시다.

나는 그때 광주의 산수동이란 데서 자취를 하고 있었다. 금동이라는 우리 반 학생 집인데, 나는 형주라는 아이와 같이 한 방에서 살며 큰방에서 빌려온 나뭇가지들로 불을 때서 밥도 짓고 국도 끓이고 나물도 무쳐 먹었다. 나머지 시간들은 금동이, 형주와 함께 세 명이 한 패가 되어 별의별 장난을 다하고 산천을 쏘다니며 놀았다.

그때 산수동은 경계가 시내에 들어와 있을 뿐 완전한 시골이었다. 대밭을 낀 초가집이 10여 채씩 드문드문 있고, 언덕에는 과수원이 즐비하고, 밭에는 참외, 물외, 옥수수, 호박, 콩 등이 그득그득 심어져 있어, 콩풀의 푸릇한 내음이며 참외 익어가는 단내가 길가에까지 넘실대 왔다.

자취집 뒷언덕에는 복숭아 과수원이 있었고, 앞쯤 언덕빼기 밑에는 감나무 과수원이 있었다. 감나무 과수원은 바로 할딱보 선생님 과수원이었다.

과수원 한가운데 그림 같은 기와집이 하나 있었다. 그 집이 바로 선생님의 가정집이고 동시에 과수원 움막까지 겸하는 집이었다.

할딱보 선생님의 아들 영수는 우리 반 학생인데, 공부는 상당히 못한 편이었던 걸로 기억된다. 자유분방하신 선생님은 자기 자식한테도 절대로 공부를 강요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우리는 밤이면 이쪽저쪽을 번갈아가며 서리를 하고 돌아다녔다. 복숭아 과수원을 서리하려면 탱자나무 울타리의 허스름한 쪽을 조심스러히 꿰어 들어간다. 금동이는 복숭아나무에서 딴 잘 익은 복숭아를 군고구마 장사 빵떡 같은 모자를 펼쳐서 담고, 우리는 러닝셔츠를 벗어서 한쪽을 묶어 자루를 만들어 담았다.

북쪽 움막에서 잠들어 있을 주인 아저씨가 깨면 어쩌나 가슴 조이던 일은 평생 잊을 수 없다. 어쩌다 움막 위에서 에헴! 하고 기침 소리가 들릴 때면 가슴이 천근이나 내려앉았다.

그런데 뒷언덕의 복숭아 서리는 용케 몇 번 성공을 하였는데, 앞 언덕빼기 감나무 과수원에서는 두어 번 만에 그만 덜미가 잡히고 말았다.

그날도 덩치가 작고 나무를 잘 탄 내가 나무를 오르고, 둘이가 밑에서 떨어뜨린 단감을 줍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손전등이 비취이며 밑에 있는 둘이는 고양이 앞에 쥐가 되어 두 명의 남자에게 덜미를 잡혔다. 그리고는 나무 위로 손전등을 비추며 내려오라 한다.

감나무 잎들을 뚫고 내 궁둥이를 비추어 새어 올라오던 강렬한 빛, 나는 그렇게 위협적인 빛을 일찍이 본 적이 없다. 도망칠 곳은 오직 하늘밖에 없었다. 나는 그때 하늘을 쳐다보았다. 어두운 밤하늘의 별들이 손에 닿을 듯이 촘촘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마치 코알라가 겁난 몸짓으로 나무를 기어 내려오듯 엉금엉금 내려와 땅에 훌쩍 뛰어내렸다. 내가 넘어져 채 일어나기도 전에 내 덜미를 덥썩 잡는 큰 손이 있었다. 나는 그를 쳐다보는 순간 기절을 할 뻔하였다. 바로 그 할딱보 선생님이 아닌가? 어스름 속에서도 그 반짝거리는 이마 때문에 단번에 알아볼 수가 있었다.

선생님은 우리에게 따라오라 하였고, 우리는 마치 보이지 않은 실에 끌려가듯 선생님이 공부하시던 서재로 딸려 들어갔다. 그 방에 들어가자 수많은 책이 꽂혀 있는 것을 보고 우리는 놀랐다. 그때까지 그처럼 많은 책이 꽂혀 있는 서재는 처음 보았다.

그런데 벼락이 떨어질 줄 알았던 우리의 상상과는 달리 선생님은 관대히 웃으시며 너무나 온화하게 몇 마디 훈계만 하시고 방면해 주셨다. 우리는 하두 긴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때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조차 기억할 수 없다. 아마 이런 작은 일을 가지고 벌을 주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그냥 돌려보내기도 그렇고 하여 형식적인 꾸지람만 몇 마디 하고 끝내신 것 같다.

우리는 학교를 오가며 그 과수원 길을 거닐 때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고개를 수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