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밤 단상(斷想)

                                                                                              최 숙 희

 빗소리가 그친 어두운 방에 대금 소리가 가득하다. 아들아이가 대금을 불고 있다. 보던 책이 지루할 때나 계획했던 일을 해냈을 때 아이는 대금을 분다. 아직 서툰 솜씨이지만, 뱃속 깊이에서 뿜어올린 기운이 황죽(黃竹)의 관을 통해 울리는 청아한 음을 듣고 있으면 내 마음도 함께 정화되는 듯하다.

 어느 먼 그리운 이의 기척인가. 집 앞 작은 동산을 지나온 바람이 가만가만 커튼 자락을 흔든다. 젖은 풀 향기도 묻어온다. 장맛비로 생겨난 저 아래 물구덩이에서는 개구리 울음도 들린다. 나는 문득 지금 내가 도시의 고층 아파트가 아닌, 고향집의 대청마루에 와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어렸을 적, 아버지는 일 때문에 늘 집을 비우셨다. 장손인 오빠는 신학문을 하신 십팔세 위의 아버지를 어려워 하였으나, 할아버지가 계신 집에서는 자유분방하였다. 오빠는 일찍부터 아버지가 계신 도시에서 학교를 다녔는데, 오빠가 오는 방학이면 온 집안이 떠들썩하였다. 친구들과 야학에서 농촌 어른들에게 한글을 가르치고, 연극 공연을 하느라 무대 옷을 만들고 소품을 준비하는 등 부산하였다.

오월에 태어난 내가 칠월생으로나마 호적에 오른 것은 그런 오빠 덕분이다. 나는 유아 때부터 병치레가 끊이지 않았기에, 어머니는 내 출생의 기록보다는 건강을 지키는 일에 더 정성을 쏟으신 것 같다. 뒤늦게 출생신고를 하여 다음 날로 초등학교에 입학하였다. 내가 일곱 살이 되던 해였는데, 이틀 후에 여름 방학이 시작되었다.

방학식 날, 선생님은 종이 한 장을 주시며 오빠에게 갖다주라고 하셨다. 나는 그 전날 내가 시험을 보았는지, 그 종이가 전날 내가 본 시험 답안지인지는 물론, 내가 시험에서 빵점을 맞았는지도 알지 못하였다. 그날로 오빠에게서 한글을 배웠다.

야학에서 어른들을 가르치다 답답해지면 오빠는, 빵점 답안지를 가져온 동생이 하룻 동안에 한글을 깨우쳤으며, 이제는 이야기책도 줄줄 읽는다는 말을 하였다. 그리고 어른들도 부지런히 배우면 책도 읽을 수 있다고 용기를 주었다.

부모에게서 이런 말을 전해 들은 같은 학교 남자애들이 길에서 나를 만날 때면, 다른 말은 다 빼고 ‘빵점짜리’라며 놀려댔다. 창피스러워 집 밖에도 못 나가고 답답한 여름을 보내야 했다.

마을 앞을 돌아 흐르는 개울이 있었다. 낮에 우리가 송사리를 잡으며 놀던 곳이다. 밤이 으슥하기를 기다린 동네 여인들이 하나 둘 개울가로 모여들었고, 나직이 얘기를 주고받으며 목욕을 하였다. 그 밤의 개울물은 머리 위의 은하수처럼 맑았고, 별빛 아래에서 여인들은 선녀보다도 더 고왔다. 그때, 가장 물 깊은 곳으로 철버덩 떨어지는 돌멩이. 사위는 일순간에 정지된다. 누군가의 장난이다. 잠시 후 정적을 깨뜨리고 여인들 가운데 연장자가 둔덕 위를 향해 점잖게 나무라는 것으로 수습이 된다.

그러나 나는 안다. 그것이 오빠 일행의 장난이라는 것을. 목욕하는 여인들 누구라도 그들에게는 당숙모나 고모 뻘이며, 또는 혈연만큼 가까운 한동네 사람들이기에 외지의 부랑자들 소행인 척하여 놀래켜 주려던 것이다.

한밤중, 두런거리는 소리에 깨어보면 참외며 수박이 툇마루에 가득하였다. 때로는 누구네 닭장에서 잡혀왔음직한 닭이 겁먹은 눈을 뒤룩거리고 있었다. 성화에 못 이긴 언니와 내가 잠이 덜 깬 눈을 비비며 아궁이에 불을 지필 즈음에는 이미 우리도 오빠와 한편이 되어 있었다. 집에는 어머니가 기르는 닭도 있었던 것을, 오빠는 아마도 주위 사람들이 갖는 기대에 거역이라도 하듯, 무법자다운 행위 그것을 더 즐겼던 것 같다.

그때는 그랬다. 감나무에 매달아 둔 육포가 밤사이 소쿠리째 없어져도 할아버지는 “허어, 참!” 혼잣말 한 마디로 그만이셨고, 아침이면 출처를 알 수 없는 수박 껍질이 돼지우리 안 여기저기에 뒹굴어도 쯧쯧 혀를 차실 뿐이었다.

매캐한 모깃불 향이 마당에 자옥히 번지는 저녁, 평상에 누워 별이 총총한 밤하늘을 가만히 바라보노라면, 하늘도 우리가 누운 평상도 함께 먼 곳으로 천천히 떠가는 듯하였다. 교과서의 동시도 다 외우고 끝말잇기도 신명이 없어지면, 우리 네 자매는 가물가물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러다 툭, 풋감 떨어지는 소리에 놀라 깨면 사랑채 마당에서는 그때까지도 오빠의 노랫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영문학도이면서도 어쩐지 오빠는 그 당시 다들 부르던 영어 노래는 하지 않았다. ‘물방앗간 뒷전에서 맺은 사랑’이니, ‘귀밑머리 쓰다듬어 하는 맹세’니 하는 노래를 불렀는데, 나는 눈을 감은 채 가사가 주는 퇴폐적인 분위기에 젖어들었다. 그러한 노랫말은 오빠에게 있음직한 사랑이나 이별 얘기일 것만 같아 가슴이 아렸던 것이다.

한껏 멋내어 부르는 오빠 노래를 들을 때 열한 살의 내 뺨에 눈물이 흐르던 것은 모깃불 때문만은 아니었으리라.

 

대금을 부는 아들애와 한 세대 전의 오빠. 요즘 나는 이 두 사람을 나란히 놓고 생각할 때가 있다. 내가 가장 가까이서 본 스무세 살의 두 남성이다. 지난해 아들애를 한국으로 오라고 했을 때, 처음 아이는 싫다고 하였다. 나서부터 계속 외국에만 있어 온 때문이다. 아마 숲속의 새가 조롱 속에 갇히는 것과도 같은 기분이었을 것이다.

이십여 년 그와 함께 했던 모든 것에서 혼자 떠나온 아이는 대금을 배우면서 자유로워지고, 그것으로 인해 생기를 얻은 것 같다. 그 애에게 있어 대금 연주는 일종의 카타르시스적 의식이다.

이 밤, 나는 아들이 부는 대금 소리에 실려 가슴 가득 먼 옛날의 모깃불 향을 맡고, 개울물 소리를 듣는다. 아마 아이의 마음도 푸른 숲속을 훨훨 날고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