갠지스 강의 생리

                                                                                          宋 圭 浩

 인도의 마음의 고향은 갠지스 강(강가)이다. 따라서 흰두교도들의 평생 소원은 이 성스러운 강물에 몸을 씻고, 죽어서는 재가 되어 뿌려지는 영광에 있다. 그리하여 모든 죄와 괴로움이 말끔히 씻겨 흘러내려간다고 믿는다.

히말라야의 설산과 빙하에서 3천㎞나 길게 이어 흐른 이 강기슭의 3대 성지에는 수많은 가트(계단식 목욕장)가 마련되어 있다. 시골 사람들의 가장 큰 효행은 부모님을 바라나시 아니면 리시케쉬 또는 하르드와르의 목욕장으로 모셔드리는 효도 여행인 것이다.

 

히말라야 산달에의 들머리인 하르드와르는 일반 신자들의 도시다. 이곳의 ‘하리키 파이리’는 갠지스 강의 가장 아름다운 목욕장이다. 도도히 넌출져 흐르는 강물 속에는 어쩐지 물귀신이라도 도사리고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다.

한낮의 목욕장으로 사람들이 한없이 몰려든다. 아까부터 물 속에서 어깨동무를 하고 건들거리던 여인들도 이젠 잠잠해졌다. 더러는 뒤따라 들어오는 인파에 못이겨 차츰차츰 깊은 곳으로 떠밀려 들어가게 마련이다. 그리하여 헤어날 수 없는 소망의 물 속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것이다.

목욕장의 혼잡은 어떤 축제도 관광 상품도 아니다. 생활화된 지극한 신앙심이 빚어낸 광란의 도가니다. 한 소년이 허우적거리며 떠내려온다. 아래쪽 다리 위에서는 갈고리를 든 장사꾼이 떠내려온 물지게와 지팡 막대 따위를 건져 올리기에 바쁘다.

강물이 내려다 보이는 시와힐크 산마루의 만사데비 사원도 붐비기는 마찬가지다. 딸을 낳기 위해 비는 분향의 연기가 자욱하다. 산기슭부터 오체 투지로 올라온 여인의 못박힌 발바닥을 원숭이가 똥그란 눈으로 지켜본다.

 

히말라야의 관문으로 들어가는 허가증을 받아들고 리시케쉬로 떠난다. 자동차는 끝없이 이어진 가로수를 누비며 냇물을 건너서 구불구불 산허리를 돌아 넘는다.

갠지스 강의 성스러운 물을 나르는 행렬로 말미암아 모든 차량이 가까운 길을 두고도 2시간이나 더 멀리 돌아가야 하는 형편이다. 먼 길을 오고 가는 이들은 뙤약볕에 모자도 없이 샌들이 아니면 거의 맨발 바람이다.

온종일 겹겹으로 이어지는 이 행렬은 어느 누구도 간섭할 수 없는 그야말로 움직여 다니는 성역이다. 갠지스의 강물은 이들의 영원한 유산이며 생명의 원천인 것이다. 그러나 갈림길이 나타나고 샛길을 만나면 이 성스런 행렬도 차츰 줄어들게 마련이다.

이제는 성수 행렬도 뜨음해졌다. 그러나 뒤에서 ‘홀리(성수를 뜻함)’라고 외치면 얼른 길을 비켜 서야 한다. 드문드문 나타난 조촐한 휴게소마다 카펄(성수를 나르는 멜대)을 걸어놓을 걸대가 손님을 기다린다. 울긋불긋하게 꾸며진 카펄의 양쪽에 황금빛 천으로 둘러싸인 둥그런 강가자리(성수 물통)가 매달려 있다. 차를 마시며 이야기꽃을 피우는 사람들의 표정이 밝기도 하다.

성수를 땅바닥에 내려놓을 수는 없다. 물통이 다치거나 넘어가기라도 하면, 부정탔다 하여 먼 길을 다시 가서 길어와야 한다. 이렇듯 소중한 성수는 맨 먼저 마을과 집안의 신전에 바쳐지며, 이웃에게 나누어지기도 한다.

 

리시케쉬는 가진 것이라고는 지팡이밖에 없는 사두(수행승)들이 모여든 선경이다. 강가 양쪽의 계곡에는 갖가지 승원과 많은 수도장이 자리잡았다. 섬기는 대상이야 서로 다를지라도 끝내는 나름대로 그 무엇에 의지하고 있는 것이다.

새벽녘의 목욕장에는 아낙네들이 가장 먼저 나타난다. 격식에 따라 목욕을 끝낸 한 여인이 꽃배를 띄워 보내면서 합장을 한다. 소원을 싣고 떠난 나뭇잎 꽃배는 알았다는 듯이 가벼이 물결을 타고 연방 머리를 꾸벅거린다. 아니 멀리 가서 꽃배의 촛불은 꺼지고, 때마침 엷은 물안개가 사르르 번져난다.

 

인도의 한복판에 자리한 바라나시는 3천여 년의 역사를 간직한 성지다. 아울러 국제적 분위기가 감도는 힌두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밤낮 없이 뒤얽힌 교통으로 몸살을 앓는 거리, 여기에 순례자의 행렬과 들것에 실려가는 시체, 그리고 어슬렁거리는 소와 개, 귀가 따갑도록 울려대는 갖가지 소리, 아무데나 제멋대로 버려진 쓰레기처럼 발길에 차이는 사람들, 드러눕고 쭈그려 앉고, 그도 못해 멍하니 섰는 뜨내기들이다.

그러나 뒤죽박죽이 되어 어지럽기 그지없는 이 거리와 골목의 관습에 따른 저마다의 질서가 도리어 신기롭기만 하다. 캔트 역의 대합실에서 한 젊은 여인이 슬그머니 나가려고 하자, 곁에 누웠던 노인이 일어나면서 소리친다.

“여봐요, 왜 아기를 놔두고 가지?”

힘없이 되돌아선 앳된 여인은 벌거숭이 갓난이를 덜렁덜렁 겨드랑이에 껴안고 나간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겠으나 사람이 넘치는 곳도 인도요 귀한 것이 또한 사람이다.

무어라 해도 바라나시의 명물은 강기슭을 따라 마련된 가트와 송장을 불사르는 화장터이다. 그것도 이른 아침이라야 참모습이 드러난다. 이리하여 사람들은 동틀 무렵부터 움직이기 시작한다.

보트를 빌려 타고 바라보는 눈앞이 바로 마르카르니카 목욕장이다. 갠지스 강물은 언제나 어디서나 흙탕물 빛이다. 카펠에서 떨어져 나온 빨간 종이꽃 한 송이가 떠내려간다. 고둥이 부쳐살이 하는 물소의 시체는 까마귀들의 식당이다. 그리고 주인을 잃은 샌들에 올라앉은 달팽이가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흘러간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 목욕장에는 화장 끝에 뿌려진 재가 아직도 뿌옇게 떠다닌다. 저마다 롱기(두르는 천)만을 슬쩍 두르고 물 속에 들어서서, 손가락으로 이빨을 닦고 강물을 움켜 마신다. 바로 그 곁에는 불룩이 부풀어 오른 송장이 밧줄에 매달려 있다. 저승으로 가는 마지막 목욕인 것이다.

강기슭을 따라서 60곳의 가트와 많은 사원과 화장터와 숙박소가 서로 연계되어 있다. 새들의 낙원인 잔갈 섬을 둘러보고 나오는데 조각배가 그물질을 하고 있다. 강물에 뿌려진 조상들의 재를 먹고 자라는 물고기라 하여 잡지 않는다던 이들의 관습도 이제는 어스러져 가는가 보다.

남쪽의 하리잔(천민) 가트에서 연기가 솟아오른다. 서둘러 보트에서 내린 화장터 둘레에는 장작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어느 계급에도 들지 못한 천한 백성, 하리잔들만의 화장터다. 타오르는 장작불 속에 다리가 밋밋이 보인다. 때로는 잘 타지 않는 뼈를 두들겨서, 뼈붙이를 부지깽이로 뒤척이기도 한다.

또 상엿소리가 가까이 다가온다. 이윽고 종이 울리며 비둘기와 까마귀가 날아다니는 가운데 영소는 ‘또 왔구나’ 하는 표정이다. 그런데 원숭이는 무슨 까닭으로 나뭇가지에 흔들흔들 매달렸다가는 지붕에서 지붕으로 저리도 뛰어다니는지 모르겠다.

비교적 조용한 천민의 거리는 부드러운 분위기이다. 오늘날 데칸고원 지방에는 이들을 업신여긴 힌두교를 버리고 불교에 귀의한 수백만의 사람이 모여 산다. 아직까지 거기에 끼어들지 아니한 하리잔들이 이렇듯 옛 터에서 영광의 재가 되어 강가에 띄워지고 있는 것이다.

강물은 앞을 다투어 서두르지 않는다. 세상의 갖가지 사연들을 한가슴 모아 안고, 보다 넓고 훤칠한 바다를 향해 흘러갈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