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에프의 큰 문

                                                                                            柳 惠 子

 무소르크스키의 ‘전람회의 그림’은 제목이 특이해서 쉽게 떠오르는 음악이다. 가끔 방송에서 흘러나오면 그 그림들은 인쇄화로 친숙한 19세기의 정물화나 풍경화려니 짐작했었다.

어느 날 이 웅대한 인상의 음반을 찾아 들으면서 도대체 어떤 그림들이 작곡가의 마음을 움직였을까 궁금해지는 것이었다. 해설집을 구해서 펼치니 화가이자 건축가인 하르트만의 수채화, 건축 설계도, 기물 디자인 등 10작품을 소재로 작곡한 10개의 모음곡이었다. ‘고성’, ‘튀일르의 정원’, ‘비들로, 폴란드의 우차’, ‘달걀껍질을 단 병아리’ 등 동화와 전설 어린 듯한 제목이 주욱 열거돼 있는데, 마지막 악장 ‘키에프의 큰 문’이라는 제목에 눈이 끌렸다. 그것은 보통 회화가 아닌 큰 문의 설계도로 3층이나 되는 종루에 끝이 뾰족한 러시아식 지붕의 웅장한 규모여서 설계도가 6장이나 되는 것이었다.

그런 규모를 묘사했다는 사실을 알고 음악을 들어 보니 더욱 장대한 느낌이 들었다. 그토록 큰 문은 도대체 어떤 배경으로 세운 것이었을까.

당시 러시아의 황제 알렉산드로 2세에겐 목숨을 잃을 뻔한 암살사건이 있었다고 한다. 다행히도 미수로 그쳐 황제는 무사했고, 그 무사함을 축하하기 위해 키에프 시에 기념문을 세울 계획이었다. 이 뜻있는 문의 설계를 무소르크스키의 친구인 하르트만이 맡았었다.

무소르크스키는 하르트만을 누구보다도 자기 음악의 이해자로 여겼고 예술 활동의 동반자로 의지하고 있었다. 그런 그가 젊은 나이에 심장마비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상심하고 슬픔에 빠졌었다. 친구는 가고 없는데 그의 분신인 유작 전시회에 가서 작품들을 보면서 온갖 감회를 누를 수가 없었다. 심혈을 기울인 작품들을 인상 깊이 새겨 애도의 뜻으로 이 음악을 만들었던 것이다.

특히 ‘키에프의 큰 문’은 서사시적인 장대함을 맘껏 과시한 작품이다. 오늘날 우리가 듣는 이 음악은 원래 피아노곡이던 것을 라벨이 관현악곡으로 편곡한 것이다. 라벨은 큰 규모의 문을 묘사한 무소르크스키의 원뜻을 살려 트럼펫 3대의 당당한 연주인 프롬나드로 시작을 했다. 이어서 사원의 종 소리와 서두에 나왔던 화려한 선율이 클라이맥스를 이루면서 힘차게 끝을 맺는다.

실제로 키에프의 큰 문은 계획이 취소되어 건축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음악은 장대한 문처럼 듣는 이를 압도한다.

문이라는 것, 새로운 세계에 대한 동경이 있을 때 그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문이 존재한다. 수많은 문을 통과해야 다다를 수 있는 세계, 도중에 닫혀진 문이 가로막혀 있을 때는 좌절하게도 된다.

무소르크스키가 ‘키에프의 큰 문’을 마지막 악장으로 한 것은 자신 앞에 모든 문들이 잠겨져 있는 절망감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을까.

무소르크스키는 귀족이며 대지주 집안 출신으로 일찍이 음악 공부를 시작했고, 천재성을 인정받았다. 성장해서는 출세의 지름길인 육군사관학교로 진학해서 졸업 후 기병연대에 들어갔다. 거기서 선배 음악가인 보로딘을 만나, 발라키레프를 소개받아 작곡 지도도 받고, 그들과 함께 러시아 음악계를 주도한 막강한 ‘러시아 국민음악 5인조’의 멤버가 되었다. 짧은 군 복무를 끝내고 소망하던 작곡에 전념하기까지 그의 앞에 막힌 문들이 차례로 스르륵 열리는 순조로움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그는 어릴 때부터 민중과 농민에 대한 애정이 깊었다. 그래서 러시아를 뒤흔든 보수와 진보 두 사상의 대립 투쟁을 담은 예술관과 세계관이 자리잡고 있었다. 지배 권력의 횡포에 대한 분노로 날카로운 풍자의 가곡들을 많이 썼다. 특히 사후에 음악사상 높은 평가가 내려진 ‘보리스 고두노프’는 사회적 가극인데, ‘전람회의 그림’보다 5~6년 앞서 작곡했었다. 등장인물의 리얼한 성격과 표현, 신선한 선율과 화성 등 새로운 타입의 오페라로 청년들에게 지지를 얻었다. 그러나 내용 때문에 상류 계급의 적대감을 샀다. 두 번이나 고쳐 쓴 뒤 작곡 6년만에야 겨우 극장에서 공연되기까지, 그는 굳게 닫힌 문 앞에서 괴롭게 두드리지 않았을까.

순수하고 신념에 찬 그는 ‘러시아 5인조’ 동료인 큐이의 악평이 견디기 어려웠다. 게다가 시대적으로 그가 살았던 1870년대의 러시아는 60년대에 싹텄던 민족주의가 탄압을 받아 우울감에 빠졌었다.

답답하게 닫힌 문 앞에서 그는 명작을 써서 기쁨의 실체를 찾고 생동감과 활력을 얻으려고 무진 애를 썼으리라. 친구의 유작 전시회를 다녀오자마자 착수하여 모음곡 ‘전람회의 그림’을 3주도 안 되어 완성한 것으로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역작에 대한 평가도 못 받고 힘든 시대에 살 때 문을 함께 열어주던 동료도 잃고, 이런 열세에 작곡한 ‘전람회의 그림’인데도 높은 기세가 느껴진다. 그의 높은 예술 혼은 죽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런데 이 곡도 생존시에는 한 번도 연주된 일이 없다고 한다. 어떻든 힘차고 웅대함 때문에 이 음악이 친구에 대한 애도에서 비롯된 것임을 잊게 한다.

몇몇 다른 친구들의 원조로 근근이 연명하면서도 ‘온몸을 인류를 위해 바치는 것을 바야흐로 예술이 요구하고 있다’고 친구에게 편지할 정도로 의지에 차 있었다. 그러나 이 말을 써보낸 다음 해 42세의 나이로 숨을 거뒀다.

그는 사명감에 불탔으나 두드렸던 이상적인 예술세계로의 큰 문이 잠궈진 듯, 생존시에는 작품들이 인정을 못 받았다. 사후에도 이를 애석히 여긴 친구 림스키 코르사코프가 미완성의 오페라 등을 보충해 표하기도 했으나 러시아에선 몇 년 안 가서 그 이름이 잊혀진 존재였다고 한다.

그러나 닫혀 있던 큰 문, 그것은 그를 가로막은 것이었지만 새로운 세상으로 통하게 하는 가능성은 있었다. 후일 프랑스의 드뷔시 등 음악가에게 큰 영향을 주어 숨을 거둔 40년 후에야 진가가 밝혀졌다. 러시아를 비롯해서 세계적으로, 음악의 리얼리즘을 확립한 선구자로 평가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나는 때때로 CD 플레이어에 ‘키에프의 큰 문’ 커트를 맞춰 틀어놓고 내게 막혀 있던 문들을 생각해 보노라면 5분짜리 이 음악이 먼저 끝나버리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