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심심했으면 좋겠네

                                                                                                 이 정 호

 토요일 어제 아침, 팔달산 길로 돌아서 가다가 마침 막 떠오르는 해를 보았다. 성벽에 비켜 뻗은 노송 사이로 비치는 햇살이 더없이 깨끗하고 신선했다. 늘 대하던 아침 해가 유난히 새롭고 별나 보였다. 그 동안 하루하루가 너무 무의미하게 지나갔다고 생각했었는데, 주변에 관심을 쏟을 마음의 여유가 없었거나 아예 눈길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란 걸 새삼 느꼈다.

일이 아무리 중요하다 해도 때로는 훌훌 털어버리고 한가로운 시간을 갖고 싶을 때가 더러 있다. 무엇 때문에 바쁜지 모르도록 정신 없이 하루하루를 보내는 요즈음, 도대체 내가 어디에서 무엇 때문에 무엇을 하고 있는지조차 모를 지경이다. 가끔 ‘왜 이렇게 바쁘지’ 하고 스스로에게 묻고는 씁쓰레 웃곤 한다.

톨스토이 같은 이는 무엇에건 미쳐야 살 수 있다고 했지만 무덤덤히 지낼 수 없을 만큼 천재였기에 그랬을 것이다. 신은 그들의 머리를 잠시도 가만히 있게 내버려두지 않는 것일까. 범인들이라면 무심코 지나쳐버릴 사소한 것들까지도 그들의 머리를 자극할 것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있어서 무료한 시간은 정말 견디기 힘겨운 고문일 것이다. 그도 그렇지만 그가 말한 미친다는 의미는 가치 있는 무언가에 깊이깊이 몰두한다는 뜻이지, 나처럼 정신 못차리고 허우적거리는 것과는 그 개념이 다를 것이다.

부지런하기로 이름난 한 유명인사에게 쉬지 않고 그렇게 몸을 돌보지 않으면 병나지 않느냐고 했더니, 아플 시간이 어디 있느냐고 오히려 반문하더라고. 어느 수도인도 수도 생활을 옳게 하면 병 같은 것은 생기지 않는다고 했다. 참말 그렇겠다. 정신이 허를 보이지 않으면 병이 침입할 수 없을 것이다. 눈을 똑바로 뜨고 집을 지키고 있는데 도둑이 스며들 리가 없기 때문이다. 정신을 제대로 차리고 정말 깊이깊이 빨려들어 시간을 잊을 정도라면 병마가 기어들 틈새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야말로 아프지 말아야 할 텐데… 감기 몸살, 남 앓는 병은 다 앓아가면서 바쁘다.

실직자가 늘고 돈벌이할 데 없이 야단인 세상에 바쁜 타령하다니 사치스런 행복 투정이 아니냐고 욕할는지 모르겠다. 먹고 자고 하는 생존의 기본 능력까지 상실한 비참함, 여기에 비하면 일하는 즐거움이야말로 삶의 가치와 행복 그 자체라 할 것이다. 땀 없이는 한가의 참맛을 알 수 없다. 모르는 게 아니다. 다만 요즈음 너무 피곤하고 지쳐 있기 때문에 휴일만큼은 마음 편히 쉬고 싶었던 것이다. 햇살 좋은 창 옆에서 느긋하게 앉아 아무 생각 없이 멍하니 있고 싶었다. 나무들처럼 그저 그렇게 무덤덤히, 그러면서도 안으로 안으로 가슴에 가득 눈물이 고여 숨쉬기 벅차도록 겸허히 나를 느끼고 싶었다.

 

오늘, 나는 종일 대문 밖에도 나가지 않았다. 낮잠도 자지 않았고 잠시도 눕지 않았다. 다행히 걸려온 전화도 없었다. 창가에 앉아 허리가 아플 만큼 꼬박 앉아서 보냈다. 이따금 마루와 뜰을 서성거렸을 뿐 생각을 다른 데 빼앗기고 싶지 않아서 책도 보지 않았다.

어둠의 허물을 살그머니 벗어던지고 밝아오는 창호를 잠자리에 누운 채로 느긋하게 바라보았다. 창호에 번지는 아침 햇살, 어슴푸레하다가 차츰 희어지더니 젖을 물고 엄마 얼굴을 쳐다보는 아기 볼마냥 말그레 수정으로 감싼 듯 투명해진다. 창가에 놓아둔 군자란 잎줄기가 수묵빛 그림자를 긋는다. 산목련 가지와 몽실몽실한 꽃봉오리가 붓으로 그린 듯 변화로우면서도 단정하다.

햇살이 한껏 좋은 한낮, 창호가 사뭇 명징(明澄)하다. 저토록 투명한 그러나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속에 감추다 감추다 감추지 못하고 배어나는 순수, 맑은 향기가 감도는 듯하다. 바깥은 더 맑은 것 같아 문을 열어제쳐 보았다. 그러나 잔가지가 겨울바람에 싸늘한데 산목련 꽃봉오리 뽀얀 솜털이 햇빛에 희긋희긋 파르르 떨릴 뿐 허허로이 바람이 쓸쓸하다. 밝기로야 햇빛 그대로가 더하겠지만, 맑고 향기로워지려면 창호지에서 숙성시켜 걸러내야 한다.

창호에 번진 햇살에 아(亞) 자 창살이 선명하고, 노르스름한 방바닥이 정갈하다. 거친 듯 보드랍고 맑은 종이가 은어 속같이 속이 훤히 드러난다. 가는 실 모양의 닥나무 껍질 티들이 박혀 있다. 좀 긴 것, 자잘한 것이 가로 세로 또는 비스듬히, 어떤 것은 서로 맞물려 있다. 반지르르 고른 것보다 나무 성분을 그대로 느낄 수 있어서 정감이 간다. 거친 순박의 미를 세련미보다 더 윗길로 여겼던 우리 동양인의 감춰진 심미안(審美眼)이 창호에 반영된 것이겠다. 빛 그리고 창호와 방바닥이 만들어낸 조화의 아름다움은 지극히 동양적이고 선(禪)적이다. 늘 거처했던 그 방이 이리 달라 보일 수 있을까 싶다.

그렇다. 너무 허겁지겁대느라 주변에 널려 있는 아름다움을 보지 못한 것이다. 늘 먹는 밥, 국과 반찬 하나하나 고루고루 진정한 맛을 감지할 겨를도 없이 시간에 쫓겨 입에 퍼넣기 바빴던 것이다. 아니 바빠야 했는지 모른다. 보고 듣고 느끼는 것들 모두가 식사 습관과 다를 게 없었다.

오감은 제 고유한 기능을 뛰어넘어 다른 영역을 넘나들 때가 있다. 사랑이 충만한 눈빛으로 바라볼 때 눈으로도 얼마든지 향기를 맡을 수 있고, 영혼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눈과 귀, 코와 입, 모두가 마음이라는 뿌리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며, 사랑의 등불을 밝힐 때 마음은 비로소 부시시 눈을 비비고 잠에서 깨어나기 때문이다. 새로운 세계를 찾아 어디로 멀리 나설 필요가 없다. 생각의 각도를 틀어 바라보면 여기 이 자리에서 새로운 세계가 열리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따금 현실에서 벗어나 무료히 보내고 싶다. 내 원치 않아도 머잖아 그렇게 되겠지만 그건 그때의 일이고, 지금이라도 살아 있음을 실감하면서 삶을 제대로 맛보고 싶다. 고독은 아픔인가, 그러나 고독이야말로 나를 곱씹을 수 있는 입에 쓴약 같은 것, 새봄 씀바귀 나물처럼 쌉쌀하니 입맛당기는 그런 아릿한 고독을 맛보고 싶다. 그래, 좀 심했으면 좋겠다. 가끔은 미치도록 적적하고 권태롭도록 지리한 시간이었으면 좋겠다.

차분히 집에서 보낸 오늘, 하루가 긴 듯 짧다. 지리하면서도 감미로운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