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고리오 음악을 노래하며

                                                                                                          김 예 경

 성악곡보다는 기악곡을 즐겨 듣는 것이 음악을 듣는 내 편견이라면 편견이었는데 근래에 와서는 웬일인지 합창곡에 관심이 많아졌다. 취미 정도 수준의 합창단 두어 군데에서 노래를 불러온 것이 상당한 세월인데, 이제 와서 새삼 합창곡에 매력을 느끼게 되는 것은 의외다. 서당 개 삼 년에 풍월 읊는다고 이제야 합창 음악이 가진 묘미를 발견하게 된 것일까?

그 동안 합창단에 열심히 쫓아다닌 것은 그저 노래 부르는 일이 즐겁고 화음을 즐기는 것이 좋아서였을 뿐, 내가 꽤 쓸만한 목소리를 가졌거나 제법 합창 음악의 진가를 이해해서는 전혀 아니었다. 그런 내가 새삼 합창 음악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아마도 더 이상 합창 단원으로 남아 있기에는 눈치보이게 된 내 나이 때문이 아닌가 싶다. 오랫동안 생활의 일부가 되어왔던 합창과의 인연을 끊어야 하는 아쉬움 때문일 것이라는 말이다. 거기다 한 가지쯤 더 이유를 붙여 볼 수 있을 듯도 하다. 사물보다는 인간 존재에 더욱 관심을 가지게 된 나이 때문이라는, 그래서 기계적인 소리보다는 인간적인 소리에 더 애착을 가지게 되었다는 어찌 보면 자위(自慰) 같은 독백을 역시 그 이유로 들고 싶다.

사람이 모여서 사는 것, 특히 가족을 이루고 사는 것은 일종의 합창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가족이란, 한자리에 서서 같은 곳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쉽게 그런 가정(假定)을 해볼 수 있다. 합창과 가족이 지향하는 목표가 화합과 조화로운 소리라는 점에서도 그렇다. 가족이 아닌 사람들이 모인 것을 다성부 합창이라고 본다면, 가족의 경우는 그레고리오 음악 같은 단성부 합창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이 말은 획일적이고 일률적인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구태여 혈연을 주장하지 않더라도, 같은 음질의 소리를 만들어 내기 즉 같은 호흡으로 맞추어 화합하기에 가족만큼 좋은 구성은 없을 것이라는 뜻이다.

서양 음악의 원조인 그레고리오 음악(Gregorian chant)은 일체의 반주가 없는 단선율 합창곡이다. 지금은 극히 드물게 가톨릭 종교의식에서나 사용되고 있을 뿐이어서 일부러 찾아 듣지 않고서는 들을 기회가 별로 없는 것은 물론 노래할 기회는 더욱 없는 음악이다. 한 사람이라도 잘못 호흡하거나 달리 소리내면 즉시 조화가 깨어지는 극도의 예민함 때문에 대중적으로 노래하기에는 너무 어려워 결국 쓰이지 않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합창을 할 때는 좋은 목소리를 내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자기 소리를 주장하지 않고 옆사람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자기 소리를 잘 보태는 마음을 갖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자기 소리를 내세우지 않는 마음에는 자기를 낮추는 겸허한 태도가 깔려 있다. 그레고리오 음악에서는 특히 그런 겸손을 요구하는데, 서로의 호흡을 대신해 주며 노래하라고 말한다. 호흡을 맞춘다는 차원을 넘어 대신 해주라는 정도니, 그만큼 서로의 호흡 속으로 스며들어 가족 같은 영적 일치감을 가지라는 의미이다.

많은 사람이 함께 노래하면서도 마치 한 사람의 목소리처럼 화합된 소리를 내는 그레고리오 음악의 음률은 지극히 평화스롭고 전체적으로는 신비감이 흐른다. 하루를 여는 조용한 새벽이나 일상을 끝낸 편안한 저녁 시간, 선량한 하루를 감사하고 소박한 내일을 기대하는 가족을 축복하기에 그레고리오 음악만큼 어울리는 음악은 다시 없을 것이다. 그 가운데에 촛불 한 자루쯤 타고 있다면 가족의 일치감은 더욱 빛을 내리라.

그레고리오 음악은 흔히 영혼의 노래 혹은 천상의 음악이라고 불리워지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합창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음악 자체가 가진 절대적 상호 보완성 때문에, 독창으로 노래해서는 그 아름다움과 신비스러움을 나타낼 수 없다. 긴 노래말의 연결이 결속적인 프레임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서로 호흡을 나누어야 하는 상호 보완성이 필수다. 가족이야말로 같은 높이의 선상에서 결속을 유지하며 호흡을 대신해 주는 영혼의 노래요 그레고리오 음악이 되어야 할 존재다.

가족은 내 소유니까 마음대로 대해도 될 것 같고, 언제 어떤 호흡을 하는지 보지 않고도 속속들이 안다고 믿기에 특별히 신경쓰지 않고 사는 것이 사실이다. 너무 가깝게 비비대기치며 살다 보니 서로 상처내기 쉽고, 아무 스스럼없는 사이라 생각 없이 소리내다 보면 화음보다는 불협화음을 만들어 파열로 치닫기 쉬운 것이 가족이라는 합창단이 가진 약점이요 비참함이다. 불협화음의 단계를 넘어 그레고리오 음악처럼 편안하고 천상적인 합창에 익숙해질 때까지는 가족도 합창처럼 끊임없는 연습을 필요로 한다.

아직도 그레고리오 음악이 요구하는 겸손한 호흡에 이르지 못했고, 주위나 가족들에 대한 겸허한 배려에도 연습 부족인 채 이 나이까지 왔으니 결국 그것이 나의 한계였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합창곡이 듣기 좋아진 나의 변화도 어쩌면 합창 연습보다도 못했던 가족 연습에 대한 때늦은 회한에서 오는 것일지 모른다. 돌이킬 수 없는 지점에서 뒤돌아보는 씁쓸함이, 죽을 때까지 철든다는 어른들 말씀을 생각하게 한다. 자신의 부족함 내지는 인생의 유한(有限)을 깨달아 갈 때쯤에 철도 들기 시작하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