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보의

‘마음의 절제’

 

일  시 : 1998년 11월 21일

장  소 : 수필문우회 회의실

참석 인원 : 33명

사  회 : 허세욱

정  리 : 권일주

 

사회 : 1999년 봄호, 계간수필 통권 제15호를 위한 합평회를 시작하겠습니다.

오늘은 위당(爲堂) 정인보 선생의 작품 ‘마음의 절제’입니다. 爲堂선생은 우리가 평소 애창하면서도 그분의 것인지 잘 알지 못하고 있던 노래, ‘흙 다시 만져보자, 바닷물도 춤을 춘다’로 시작되는 ‘광복절의 노래’ 작사자이십니다. 그 동안 우리가 이 합평회에서 다루었던 작품들은 거의 전문적인 수필가의 작품이나 전문적인 수필가는 아니지만 수필을 많이 남겼던 작고 문인, 혹은 현존 원로 문인들의 작품이었습니다만, 오늘은 처음으로 국학자이며 한글 수필작품을 남기신 위당선생의 작품을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새로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분은 1893년 서울에서 출생하시어 1950년에 돌아가신 것으로 학계에서는 추정을 하고 있습니다. 돌아가신 해를 확실히 알 수는 없습니다만 학계의 추정에 의하면 겨우 57년쯤을 살다 가신 셈입니다.

정인보 선생의 號는 爲堂, 守坡, h園 등 여러 가지로 불리었습니다. 이분의 일생을 제 나름대로 대략 다섯 가지 신분과 그 업적으로 정리해서 말씀드릴까 합니다.  

첫째 이분은 국학자였습니다. 우리 나라에서 국학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등장시킨 분이며, 한글과 한문을 겸용한 개명된 국학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송강과 단재, 다산 등을 연구한 『담원 국학산고』를 비롯하여 『양명학연론(陽明學演論)』, 『조선사연구』 등 세 권과 그 외에도 한문 저작이 따로 있습니다.

두 번째는 교육자로서의 신분입니다. 연희전문, 이화여전, 중앙 불교 전문학교 등에서 국학과 중국 문학을 포괄한 동양학을 광범위하게 강의하셨습니다.

세 번째는 언론인으로서의 신분입니다. 시대일보를 비롯하여 동아일보의 논설위원을 지내며 많은 논설을 통해 일제의 압박을 비판했습니다. 민족 선구적인 언론을 폈던 분입니다.

네 번째는 관료로서의 신분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지만, 6·25 전쟁 때 잠시 감찰위원장을 지내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다섯 번째가 오늘 우리가 연구할 대상 분야, 즉 문학 활동 분야입니다. 전 조선문필가협회 창립 회원을 지내시며, 이분이 남기신 작품은 크게 시조와 수필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시조는 1948년에 『담원 시조집』이 발간되었는데 여기에 양주동 선생이 서문을 썼습니다. 이 가운데 아까 말씀드린 ‘광복절 노래’뿐만 아니라 ‘개천절 노래’ 등 생활화된 노래들이 많이 들어 있습니다.

수필은 현재 130여 편이 확인되었는데, 그 가운데 ‘금강산 기행’ 등 기행문이 40여 편, 여행 견문을 서간문식으로 쓴 작품이 ‘남유기신’을 비롯하여 43편, 논설수필이 40여 편, 그리고 그 외 비문, 추도문 등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합평 대상으로 올린 작품 ‘마음의 절제’는 감찰위원장 시절에 쓴 것으로 지방관료의 청렴을 강조한 칼럼식 글이라고 봅니다.

약정 토론을 해주실 분은 선비문학을 강조해오신 윤모촌 선생님을 비롯하여 평생 우리 국학을 연구하신 정규복 선생님, 그리고 교육 일선에서 청렴과 윤리로 학생들을 가르치시는 최병호 선생님입니다. 오늘은 특히 저의 잡지를 통해서 등단한 4명의 신인들이 참석해 주셔서 더욱 뜻깊은 합평회가 되겠습니다. 먼저 작품을 읽고 합평에 들어가겠습니다.

김수현 선생이 읽어 주시겠습니다.

 

 

(본문)

마음의 절제

 

 

세상에 제 일을 남이 알까봐서 능청스럽게 속이려는 무리가 많다. 남을 속이려 하는 그것이 벌써 제게 용납되지 못한 증거다. 철인이 별 사람이 아니다. 나 혼자만 아는 속에 부끄러울 것 없는 분이다.

이퇴계(李退溪) 선생이 젊었을 때 종로거리를 지나가다 관기(官妓) 한 패가 ‘보교바탕’을 타고 지나가는 것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고개를 푹 숙이면서 혼잣말로,

“이 마음이 나를 죽이는구나.”

하였다고 한다. 다른 말이 아니다. 저기를 보고 마음을 그리 끌리니 내가 나를 주장하지 못한 것이요, 잠깐이라도 내가 스스로 서지 못하게 되면 내가 없다, 내가 없어지도록 되고 보면 죽은 이나 다르지 아니하므로, 이 마음이 나를 죽인다고까지 한 것이다. 철인일수록 작은 외유(外誘)에 대하여서도 큰 도적같이 보이는 법이다.

남이 모르고 나 혼자만이 아는 이것이 수행(修行)하는 추요지대(樞要地帶)다. 아무리 잘 속이는 무리라도 저는 못 속인다. 속일 길이 없는 이 한 자리가 사람으로서 사람 노릇하는 학문을 하는 다시 없는 외길목이다. 퇴계선생 같은 어른은 지나가는 관기를 바라본 것을 곧 민란이나 막지 못한 것같이 알았으니, 모르는 사람에게는 귀에도 아니 들어갈 이야기일는지도 모르나, 내가 나를 아무것도 아니게 안다면 말할 것이 없거니와 그렇지 아니 하면 내 속이 외물(外物)에 끌리어 스스로 서지 못하는 것을 관계치 아니한다고 하지 못할 것이다.

털끝만한 일에도 저같이 삼엄한 것을 보라. 과히 용렬하지 아니 한 사람일진대 제 옷자락에 쌓여 있는 먼지를 한 번 털어버리고 일어서 볼 만도 하리라.

중국 북송(北宋) 때 조변(趙G)은 외방장관(外方長官)으로 있을 때, 연회에서 가희(歌姬) 하나를 마음에 두어 저녁에 하졸(下卒)을 시켜 불러오라 하고, 이내 내심상(內心上) 절제가 풀어진 것이 한편으로 편치 못하여 얼마 동안 방 안을 돌더니 와락 큰 소리로,

“조변아, 네가 어찌 예(禮)가 없느냐?”

하면서 아까 보낸 그 사람을 급히 쫓아가서 도로 불러오라 하였다. 이러한 즈음에 아까 보낸 그 사람이 장막 뒤에서 나와,

“소인 여기 있습니다.”

하였다.

“어찌하여 아니 갔느냐?”

하니까,

“평일에 하시던 바를 미루어 보건대, 얼마 아니하면 도로 부르라 하실 것 같기로 애초에 가지 아니하였습니다.”

고 하였다.

이분의 이 일이 또한 너무 심한 것 같기도 하나, 그러나 수행이 무엇인 줄 모르는 유속인(流俗人)으로 보면 심하고, 뜻있는 이로서 보면 좋은 자취의 하나이다.

지금으로부터 140~150년 전 영조 때 명상(名相) 서문청공(徐文淸公 : 志修)은 수상으로 있을 때 여러 대신들과 궐내에 모여서 집에서 해 들여온 점심상들을 받는데, 서문청공의 집에서는 겨우 호박죽 한 그릇이 들어왔었다고 한다. 그 집이 가난할수록 이 마음은 넉넉하였을 것이다.

나라가 이지[脂]고 내 몸이 여위[瘠]면 여윈 속에 광휘(光輝)가 있다. 이러한 분들은 일생에 유쾌만이 있을 것이다. 온몸에 더러운 것만 잔뜩 채워가지고 그래도 남의 눈을 가리려는 무리야말로 살아도 산 것이 아니다.

그러니 제 일을 남이 알까보아서 속이려 하는 것도 오히려 실낱만한 무엇이 있는 연고다. 지금으로 보면 알까보아 하는 그것조차 아울러 옛날 일이 아닌가 한다.

사회 : 감사합니다. 먼저 주제 및 내용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그 다음에 과연 이런 도덕적 수필에 예술성이 있는가, 어떤 기교를 부려서 이렇게 성공할 수 있었나 하는 것을 살펴보겠습니다. 그리고 이밖에도 우리가 처음으로 국학자의 수필을 다루는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 관계되는 이야기를 폭넓게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윤모촌 : 여러분도 잘 아시겠지만 이 글은 퇴계선생과 조변의 예화를 들어서 마음의 절제를 나타냈고, 서문청공(徐文淸公)의 예로 가난의 절제, 즉 가난하면 마음이 넉넉해진다는 것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불멸의 고서와도 같은 향기가 느껴집니다. 옛 글에서 느끼는 이런 향기, 그것이 바로 이 글이 존재하는 의미가 되고 글을 읽게 하는 힘을 가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글 읽는 재미라고 할까요, 감동을 많이 받았습니다. 마음의 절제, 가난의 절제를 절제된 언어로 썼는데 그러면서도 그것이 주는 문장의 무게가 크게 느껴지는 글입니다.

정규복 : 유가(儒家)에서 말하는 수양의 제일 큰 덕목인 신독(愼獨)이 이 글의 주제라고 봅니다. 혼자서도 속이지 않고 삼간다 라고 하는 신독의 개념이 바탕에 깔려 있으면서 문장이나 표현, 기교, 주제 등 어디에나 이분의 인격이 그대로 드러나 있습니다. 인간과 문학이 잘 조화된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최병호 : 저는 이글의 주제를 이 분이 문장 속에서 말씀하신 그대로, 자신은 속일 수 없는 수행의 추요지대(樞要地帶)라고 정리해 보았습니다. 극기를 말씀하신 것이지요. 세 이야기, 즉 퇴계 선생이 관기를 보고 ‘이 마음이 나를 죽이는구나’ 하는 부분과 조변의 가희 이야기에 나타난 유머, 그리고 서문청공의 청빈, 이 세 이야기가 잘 구성되어 있어서 재미를 더해 주고 있습니다. 세 이야기 모두 결국에는 극기를 말한 것이라고 봅니다.

 

사회 : 세 분의 말씀을 간추려보면 수행에 관한 것을 절제된 언어로 쓴 향기 있는 작품이다, 신독을 반향한 수필이다, 극기를 강조한 수필이다 라는 말씀이지만, 세 분 말씀의 공통분모를 찾아보면 역시 이글의 제목에서 드러난 것과 같이 ‘절제’라는 것과 같은 선에 모아집니다. 잠시 여담이지만, 위당의 제자였던 민영규 씨가 『위당문전』 서문에 쓴 문장 가운데 이분의 인격을 표현한 부분이 있어서 그 구절을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위당을 뵌 적이 있는 분들은 한 번 상기해 보십시오.

‘짙은 회색의 무명 두루마기, 검은색 펠트 모자, 검은 천으로 된 두툼한 신발, 도수 높은 검은테 안경, 언제나 한 발 먼저 가던 검은색 지팡이’. 이런 것이 모두 변하지 않는 평소 그분의 모습이었다고 합니다. 제 생각에는 이 형용이 이 수필과 맞아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이 글의 주제는 너무나 뚜렷해서 여기서 그치기로 하고 다음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이런 수필을 두고 소위 도덕수필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만약 이것을 윤리나 도덕적 수필이라고 보았을 때 이런 수필이 이 시대에, 20세기도 다 저물어 가는 이 시대, 이런 공업 사회에서 바람직한 것인지, 또 이런 수필을 우리의 차세대에게 어떻게 읽힐 것인지 등에 관해 말씀해 주십시오. 또한 여기에 겸해서 이 수필의 품격과 이 수필의 가치를 어떻게 인정할 수 있을 것인지에 관해서도 말씀해 주십시오.

윤모촌 : 윤리성, 도덕성이라는 것은 시대에 따라 변합니다만 아무리 사회가 변해도 그 사회가 요구하는 윤리성, 도덕성은 있는 것입니다. 글이 있어야 하는 이유에 대한 답이 저절로 나오는 것이지요. 다만 수필에서 우리가 삼가야할 점, 즉 독자에게 요구하려 하거나 설득하려고 하는 점에서만 벗어날 수 있다면 이런 수필이 당연히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정규복 :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유가에서 말하는 신독 개념이 이 글의 주제를 이루고 있는데, 이 신독이라는 것은 다원주의 문명에서는 자칫 위선자로 떨어질 수 있는 개념입니다. 현대 문명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이 주제가 필수적으로 사회에 바람직하지는 않다고 봅니다. 어느 정도 조정이 되면 좋겠지만 잘못하면 위선이 되기 때문이지요.

최병호 : 이 글의 끝에 ‘제 일을 남이 알까보아 속이려 하는 것도 오히려 실낱만한 무엇이 있는 연고다. 지금으로 보면 남이 알까보아 하는 그것조차 아울러 옛날 일이 아닌가 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글을 쓸 당시에도 이미 절제의 한계가 느슨해졌다고 할까, 넓어졌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옛날에도 공식적으로 관기도 있었고 주연도 있어서 그쪽으로 난 문이 열려 있었다고는 하지만, 오늘날에는 그런 문이 더 많이 열려 있는데 그런 절제가 가능할 것인지 하는 것을 느낍니다.

 

사회 : 세 분이 역시 비슷한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윤모촌 선생께서는 도덕성이 높은 수필을 찬양하시면서 기교상 설득하려 하거나 딱딱한 느낌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셨고, 두 분께서는 신독에 대한 한계, 극복의 한계와 인간성의 갈등에 대해 이야기하셨습니다. 『담원 시선집』을 보면 양주동 선생이 쓴 서문에 ‘위당은 매우 정적인 분이었다. 다감했고 섬세하였으며 은근한 정이 있었던 분이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사적으로 담원과 가까웠던 양주동 선생의 이런 평가와 이 글의 주제와는 상당한 거리감이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면 이제 객석으로부터 좋은 고견들을 듣겠습니다. 주제에 관한 것도 새로운 견해가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정진권 : 전체를 뭉뚱그려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글을 읽고 참으로 높은 정신세계가 존재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만, 반면에 우리 같은 보통 사람으로서는 인간적인 체취를 맡을 수 없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리고 글의 구조로 볼 때 조금 의아스러운 점이 있습니다. 이 글은 맨 앞 석 줄이 서론에 해당하고 마지막 다섯 줄이 결론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글의 서론에서 제시한 이야깃거리는 속이는 것에 대한 이야기이고, 결론에서도 ‘제 일을 남이 알까보아서 속이려 하는 것은 오히려 실낱만한 무엇이 있는 연고다’, 즉 속이는 이야기에 대한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예를 든 세 가지 이야기는 속이는 것과 별로 관계가 없는 높은 정신세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앞의 두 이야기, 퇴계선생과 조변에 대한 이야기는 여자에 대한 것이고, 뒤의 서문청공의 이야기는 가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글 전체로 볼 때 균형이 맞지 않습니다. 앞에 여자 이야기가 나오고 다음에 가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끝에는 하다못해 벼슬에 대한 이야기라도 나오든지 해서 절제하는 분야가 좀 달라야 할 텐데, 앞의 두 이야기가 여자에 대한 것이고 다음의 하나가 가난에 대한 것이어서 균형이 맞지 않는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서론에서 제시한 것과 결론에서 맺은 것은 일치하지만, 본론에서 제시한 것이 그것들과 거리가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문장을 보면 상당히 꼬이고 꼬인 문장이 많습니다. 한참 생각을 하고 따라가야 했습니다. 특히 세 번째 문단, ‘남이 모르고 나 혼자만이~ 에서부터 ~관계치 아니 한다고 하지 못할 것이다’ 부분이 그렇습니다.

고봉진 : 제 생각에는 앞의 석 줄과 뒤의 두 줄도 서로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서론에서는 남을 속이는 것을 공격했는데, 끝 두 줄에서는 ‘남을 속이려 하는 것도 오히려 실낱만한 무엇이 있는 연고다’ 했습니다. 즉 양심을 이야기한 것이지요. 그런 양심이라도 남아 있으니까 다행이다, 요즈음은 아예 제쳐놓고 철판 깔고 한다 그런 이야기인 듯합니다. 마치 ‘天知 地知 子知 我知’라는 말이 나오는 후한(後漢) 시대 양진(楊震)의 ‘四知’ 고사를 읽은 것과 같은 느낌이 듭니다. 글이라는 것은 머릿속에서 생각을 하고 생각한 것을 정리해서 쓰는 것인데, 이 글은 하나의 글로는 생각의 맥락이 흐트러져 있고, 논리적으로도 세련이 덜 되어 있다고 봅니다.

김진식 : 이 글을 읽고 저는 위당선생이 이 세상 사람들을 완전히 이분화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예 이것저것 모르는 사람과 알 만하고 또 뭔가를 아는 사람입니다. 이 글은 그 가운데 알 만한 사람에게 주는 글이라고 봅니다. 선비정신에는 유교 철학 쪽에 가까운 도학을 추구하는 쪽과 풍류를 즐기는 쪽이 있다고 보는데, 정인보 선생은 도학을 추구하는 쪽이라고 봅니다. 정신적으로 높은 경지에 비중을 두었고, 이 글은 거기에 속해 있는 사람들, 공직에 있거나 사회 지도계층에 있는 소위 알 만한 사람들에게 주고 싶은 이야기입니다. 자신에게 좀더 엄격하라는 교훈을 이야기했다고 봅니다. 그리고 앞부분과 마지막 부분에 대해서는 저는 고선생님과 약간 의견을 달리 합니다. 맨 마지막 두 줄은 우리말의 부정의 긍정이라 봅니다.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라’라는 우리말의 강한 표현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앞의 석 줄을 더 강조하기 위해서, 그나마 속이려 하는 것은 실오라기 같은 양심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요즈음은 그렇지도 않고 아예 대놓고 하는 그런 세상이다 라는 것을 개탄하는 것으로 봅니다. 그렇다면 앞뒤가 서로 맥락을 같이 한다고 볼 수도 있지 않느냐는 생각입니다.

고봉진 : 제가 말씀드린 것은 논리가 엄밀히 맞지 않는다는 뜻이었습니다.

정봉구 : 저는 이 글의 주제가 ‘내가 나를 아무것도 아니게 안다면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렇지 아니하면 내 속이 외물에 끌리어 스스로 서지 못하는 것을 관계치 아니한다고 하지 못한 것이다’라는 문장 속에 있다고 봅니다. 이 글의 목적을 청백리의 기준에 두고 예화를 세 가지 들어서 욕구의 절제, 즉 마음의 고삐를 잡는 것, 그런 마음의 고결성에 대해서 쓴 것입니다. 저는 이 글을 읽고 옛날에 어떤 양반 하나가 길을 가다가 갑자기 소나기가 퍼부으니까 자신도 모르게 막 뛰어갔는데, 비가 그치자 양반인 체면에 뛰어서야 되겠나 싶어 뛰어온 것으로 다시 되돌아갔다는 이야기가 먼저 생각났습니다. 그러니까 이 글은 옛 선비들의 정신세계를 나타낸 하나의 고증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아까 고선생님이 말씀하신 대로 세련미가 없고 서두에도 무리가 보입니다. 도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쓴 예화들이 서로 균형이 맞질 않습니다. 그것은 위당선생이 아까 말씀드린 ‘내가 나를 ~하지 못할 것이다’라는 것에 기준을 정해 놓고 거기에 맞추어서 글을 쓰셨기 때문에 그런 무리가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사회 : 이상 네 분께서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공통적으로 이 글의 주제는 자기 수련과 정신세계의 점검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만, 이것은 조금 전에 약정 토론자들이 이야기한 심독이나 극기와 비슷한 표현이라고 봅니다. 이 글의 구성이나 기교에 대해서는 네 분 모두 내용의 혼돈성, 균형의 상실, 문법의 당착과 혼란을 취약점으로 지적하셨습니다. 혹시 반론이 있으십니까?

윤모촌 : 우리는 이 자리, 이 합평회에서 한 세대 전의 수필에 대해 여러 번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때마다 문장의 흠이 지적되었지요. 그러나 저는 한 세대 전의 글을 읽을 때 처음부터 문장에서 흠을 잡으려는 의도없이 글을 읽습니다. 왜냐하면 그 시대 문장가의 글은 다 그러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발달된 국어학이나 문장학의 엄밀한 잣대로 보아서 그런 것이지, 그 시대에는 그런 기준을 두고 문장을 쓰지는 않았다고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흠을 잡자면 당연히 나오게 되어 있는 것이지요. 그보다는 글에 무슨 뜻이 담겨 있는가, 실려 있는가에 목표를 두고 글을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규복 : 동감입니다. 이 글이 잘되었다고 하는 것은 그 당시 수준으로 잘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정인보 선생의 글은 개화기와 현대, 그 사이라고 보는데 저는 문학이라고 하는 것의 기준은 그 당시에 충실했으면 그대로 성공한 것이라고 봅니다. 그런 한계를 미리 두고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봅니다.

정진권 : 이 자리에서 다른 글의 합평을 할 때도 그런 이야기는 있었습니다. 즉 문장은 그 당시의 기준으로 보아야지 지금의 기준으로 볼 수는 없다는 것이었지요. 그런데 정인보 선생의 글 가운데 ‘유관순 열사 출어문’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옛날 국어 교과서에 실려 있었고 제가 가르친 적도 있는 글입니다. 그런데 그 문장은 이렇지 않습니다. 상당히 좋은 문장이었다고 지금도 생각합니다. 같은 분의 글로써 두 개의 글을 비교할 때 너무나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이 글은 서론에서 속이는 것에 대한 것을 쓰고, 본문에서는 거것과 상관없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 것도 당시의 기준인가 하는 생각입니다.

정봉구 : 내용이 다르다고 하시는데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앞의 퇴계선생과 조변에 대한 이야기는 여성에게 혹하는 마음에 대한 것이고, 뒤의 이야기는 재물에 대한 이야기로 모두가 자기가 욕심 내는 것에 대한 제동, 마음의 절제에 대해서 쓴, 같은 이야기로 봅니다. 물론 문장이 세련되었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정진권 : 그렇다고 한다면 서론을 다시 써야지요. 서론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앞으로 이런 이런 이야기를 하겠다는 것을 쓰는 것 아닙니까. 이것은 누가 보아도 속이는 것에 대해 쓰려고 한 글이지요.

사회 : 지금 우리 토론 가운데 철학적인 문제가 상당히 부상되고 있습니다. 윤리 교과서 같은 절제를 호소한 것과 실존하는 인간의 인간적인 것과의 갈등이 그것입니다. 마침 이 자리에 윤리학의 권위자이신 김태길 회장님께서 계시니까, 그 문제에 대한 의견을 들어보겠습니다. 이 글은 우리에게 절제를 요구하는 글입니다. 그러나 독자의 인간적인 입장에서는 갈등이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보십니까?

윤모촌  : 나는 갈등을 느끼지 않습니다만…….

김태길 : 나중에 말할 기회를 또 주신다고 믿고 그 문제만 이야기하겠습니다. 교과서적인 글이니까 이렇게 쓸 수밖에 없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정진권 :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사회 : 화제를 바꾸어 보겠습니다. 공부하는 젊은이들에게 이런 글을 권하신다면 어떤 방법으로 소화하라고 권해야할지 말씀해 주십시오.

윤모촌 : 젊은 세대들이 이해할지 모르겠지만 저는 이런 글을 읽으면 한국적인 전통이나 분위기에 젖게 됩니다. 이런 선인들의 분위기, 이런 향기에 젖는 것은 젊은이들도 계승해 나가야 할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오늘날의 문장과 비교할 때 이런 글은 차이가 많이 납니다. 여기 이 글에는 잡소리가 없습니다. 설명적 요소도 모두 개념화해서 행간 속에 모두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런 예스런 글을 통해서 바로 그런 점을 배워야 합니다.

최병호 : 소박한 이야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옛날 분들이 덕육을 교육의 기본으로 삼았던 것은 그것이 하나의 향수가 되었든 하나의 청신제가 되었든 오늘날의 교육 현장에서 볼 때 긴요한 과제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사회 : 이 글에 나타난 수사나 기교, 구성 문제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아까 몇 분이 말씀을 하셨지만 다시 말씀하시고 싶으신 분들께서 자유롭게 해주십시오. 단점으로 보이는 것은 직설적으로 표현해 주십시오.

정진권 : 문학의 기능이 무엇이냐 할 때 가르침을 주는 것이다, 아니다 즐거움을 주는 것이다 라는 싸움은 여전한 듯합니다. 그러나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가르침을 주기 위해서 소설을, 수필을 쓰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쓴 것을 읽고 결과적으로 가르침을 받는 것이고, 즐거움 즉 감동을 얻는 것이지요. 그리고 가르침을 독자에게 주는 것도 감동적인 세계를 통해서 주어야지 꼭 초등학교 담임선생님의 말씀처럼 해서는 독자가 문학적인 체험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메마르게 쓰지 말고 감동적으로 제시를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사회 : 수필인 이상 예술적인 구성과 표현이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만, 수필이니까 가르침이라는 것을 그렇게 중요시 할 필요가 없다는 반론이 나올 법도 한 것 같습니다.

정진권 : 아니지요. 결과적으로 가르침을 받겠지만 우리가 수필을 읽을 때 교훈을 얻기 위해 읽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즐거워서 읽고, 읽고 난 다음 깨닫고, 아? 그렇구나 하고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요.

사회 : 그러니까 가르침은 들어가되 표현 양식은 예술적이어야 한다는 말씀이지요?

정진권 : 그렇지요, 그렇게 해야 결과적으로 가르침을 받게 되는 것이지요.

유경환 : 수필의 기능이 죽어가는 어휘를 살리는 또 다른 일이라는 것을 이 글을 통해서 다시 알 수가 있습니다. ‘나라가 이지[脂]고 내 몸이 여위면’이라는 것에서 ‘이지[脂]’라는 말은 ‘기름지고’라는 말의 사어가 되어 있는데, 그것을 정인보 선생이 여기서 살려놓았습니다. 수필의 또 다른 기능이 이 글에 내재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수사나 기교의 단점을 이야기하라고 하셨지만, 저는 그것보다 퇴계선생이 종로거리를 지나가는 관기를 보고 ‘이 마음이 나를 죽이는구나’ 하셨듯, 이 글을 보고 정인보 선생이 표출한 절제라는 것의 격을 나는 도저히 따라 갈 수가 없어서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으니까, ‘이 글이 나를 죽이는구나’ 하고 느낄 뿐입니다.

정봉구 : 본문에 들어 있는 대화체의 처리 방식, 지문의 처리가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김시헌 : 이 글의 구성을 볼 때 예화 세 가지를 들어서 주제에 결속시키려는 의도는 좋았습니다. 그런데 아까 이야기가 나왔듯이 앞의 두 가지 예화와 마지막 것이 일관되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앞의 것들은 여자에 대한 자연스러운 마음, 그런 자연성과 이지와의 싸움, 갈등에 대한 것인데, 마지막 것은 다릅니다. 왜 이런 예화를 넣었을까 의문이 갑니다.

박재식 : 이 글은 정인보 선생이 수필을 쓰려고 쓴 것이 아니라 감찰위원장으로 재직할 때 직원들에게 훈시한 것을 정리해서 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앞의 두 예화는 극기, 금욕에 대한 것이고, 뒤의 것은 청빈에 관한 것입니다. 즉 공무원으로서의 마음가짐, 몸가짐에 대해 이야기한 것이지요. 그러니까 문학성은 없지만 공무원들의 사기나 정서를 북돋우는 데 도움이 되는 글이라고 봅니다.

김진식 : 여색이나 물욕을 모두 하나의 탐(貪)이라고 본다면 공인의 개결성을 강조하기 위해 이런 글을 쓴 것은 어색하지 않습니다. 즉 이 글을 문학작품으로 한 것이 아니라 감찰위원장으로서 쓴 것으로 볼 때 긍정적으로 볼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문학으로 볼 때는 문제가 많습니다.

정봉구 : 좋게 해석하면 칼럼의 일종이라고 볼 수도 있는 것이지요.

김채은 : 조금 분위기가 다릅니다만, 이 글을 처음 읽고 정인보 선생은 근사한 분이다, 근사한 글이다라고 느꼈습니다. 몇 분이 문학적 가치가 없는 글이라고 하셨습니다만 저는 좀 다릅니다. 여기서도 문학적인 향기를 느꼈습니다. 글에서 윤리를 찾고 뭐 그런 것은 좀 지나친 욕심이 아닐까요.

이경은 : 저는 글이라는 것이 문법이나 구성, 기교 등 겉으로 드러나는 것을 떠나 사람의 마음에 와닿는 것, 감동을 주는 것이 있다면 성공한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글에서는 마음에 와닿는 것이 있었습니다. 정인보 선생의 정신이 제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요즈음 젊은이들, 신세대들 사이에서 성(性)의 범람이 문제인데, 이런 글을 읽으면 좀 절제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글이란 마음을 전할 수 있으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사회 : 98년도 신인의 말씀이셨습니다. 그러면 97년도 신인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이옥란 : 앞으로 옛 분들의 글을 많이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회 : 약정한 분들께 짧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이와 같은 글, 즉 윤리를 위한 글을 쓰실 수 있으십니까? 만약에 쓰신다면 어떻게 쓰시겠습니까?

윤모촌 : 저는 감히 못쓰겠습니다. 마음의 절제를 못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쓰겠습니까. 이런 글을 다만 흠모할 따름이고 즐겁게 읽을 따름이지요.

정규복 : 유가의 최고의 덕목이라면 맹자의 4단(四端)인 인·의·예·지입니다. 여러 가지 갈등구조에 이것을 섞어 쓰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최병호 : 학교에서 가끔 훈화라는 것을 합니다. 그 버릇, 그 색깔이 좀 가시면 쓸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지금으로선 어렵습니다. 훈화식으로 쓰면 안 될 것 같습니다.

김태길 : 먼저 위당의 명성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 이 글을 읽었을 때와 위당을 아는 사람이 읽었을 때 평가가 어떻게 달라지느냐 하는 것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것은 어떤 수필을 내놓았을 때 작가가 어떤 사람인가 하는 작가의 약력을 비추는 것과 비추지 않는 것, 어느 것이 나은가 하는 것과 관련이 되는 이야기입니다. 많은 문학잡지에서 작가는 작품으로 승부한다고 합니다만, 과연 수필에서는 어떤 것이 나은가 하는 문제를 이 글이 제기했다고 봅니다. 두 번째 제가 생각한 것은 문장에 관한 것입니다. 이 글은 50년 전의 것입니다. 지금의 것과는 문장의 수준이 다릅니다. 지금의 척도로 왈가왈부하는 것은 적당치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괴테나 셰익스피어의 문장을 오늘날에도 높이 평가하는 것이 그 시대의 잣대로 보았기 때문인가, 아니면 오늘의 잣대로 보아도 높이 평가할 만한 것이기 때문인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또 3·1 독립선언문은 1919년에 쓴 것이지만, 지금 보아도 명문인데 그것은 어떻게 생각해야 되는지, 오늘의 문장 기준으로 평가하면 안 된다 하면서 책임을 자꾸 시대에만 돌리다 보면 문화의 계주에 문제가 생길 것이라는 느낌도 듭니다. 문화라는 것은 이어받아져서 새로운 세대가 옛날 세대를 그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되어야지, 옛날 것은 그때로서 끝나고 오늘은 또 다른 기준으로 한다면 자연히 단절이 생길 것이고, 그렇게 되면 좋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또 하나 이 글에서 제기된 문제는 도덕을 주제로 삼은 문학적 수필이 가능한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수필 모임에서 가장 긴히 다루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도덕적 주제를 가진 좋은 수필을 쓰기는 어렵겠지만 그런 수필이 나와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이 수필이 성공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그런 좋은 수필을 쓰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느냐가 문제인데, 우선 솔직하게 써야 합니다. 자신의 체험을 솔직히 털어놓으며 그것을 해학적으로 다루어야 합니다. 내적 갈등을 그렇게 쓰면 자연히 문학적 감동을 주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또 왜 수필을 쓰는가 라는 커다란 문제에 수필 쓰는 목적을 한 가지로 못박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교훈을 주려고 쓴다든지, 재미를 주려고 한다든지, 수필이라는 것은 여러 목적으로 가능한 것이지 꼭 한 가지만 고집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입니다.

 

사회 : 우리가 오늘 처음으로 국학자의 도덕수필을 합평 작품으로 삼은 것은 이 시대의 오늘과 같은 수필 풍토에서 여러 가지로 의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시간이 많이 지났습니다. 여러분이 말씀하신 것들을 요약해 보고 오늘 합평회의 막을 내리겠습니다.

주제에 대해서는 유가적인 윤리 사고, 유가적 덕목으로 해석했습니다. 이 시대를 정화할 수 있는 의의가 있고, 감동을 주는 글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발언자에 따라 불멸의 고서와도 같은 향기를 지녔다, 절제의 승화이다 등 비슷한 견해를 보여 주셨습니다. 묘하게도 오늘은 객석에서 부정적이고 회의적인 견해를 내주셨습니다. 내용의 혼돈, 문법의 당착, 균형의 상실, 예화의 불일관성 등을 들었고, 심하게는 문학성이 없다 라고까지 말씀하셨는데, 이런 부정적인 시각에 대해서는 약정 토론자들의 애정어린 변호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런 도덕적 수필에 대한 조심스런 평가가 있었습니다. 즉 이런 도덕수필은 필요하다, 그러나 어떻게 써야 교훈과 재미를 겸비하면서 시대의 갈등도 극복할 수 있는 글을 쓸 수 있는가 하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이상입니다. 장시간 토론에 참여해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