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주의

                                                                                                     정 규 복

 이 세상에는 무슨 무슨 ‘주의’가 많다. 가장 흔한 ‘민주주의’를 비롯하여 이와 대응되는 ‘공산주의’, ‘사회주의’ 또는 이들과 맞서는 ‘자본주의’, 심지어는 인간의 향락을 최고 목적으로 추구하는 향락주의의 Epicureanism 등 헤아릴 수 없는 ‘주의’가 역사와 문화의 변화되는 과정에서 부침해 왔다. 즉, 주의란 것은 소수의 생각이 크게 부상되어 집단에서 계속 수용될 때 논리가 부가되어 형성된 것이다.

이 글에서 주안점으로 삼고 있는 ‘문화주의’는 오늘날 지나치게 다원화된 삶의 시대에 서로의 폭력적 충돌은 말할 것도 없고 사상의 갈등과 알력을 방어하기 위해 어떤 삶의 형식이든 우리 인간 생활에 보탬이 되는 한 천한 것이건 귀한 것이건 또는 작은 것이건 큰 것이건, 모두 ‘문화’의 범위로 수용하자는 뜻에서 감히 ‘문화주의’란 용어를 원용하여 이 글을 엮고자 한다.

‘문화주의’란 낱말은 현재까지만 하더라도 잘 통용되지 않고 있는 말이다. 다만 프랑스에서 이루어진 백과사전의 하나인 왃?루스(a rousse)왎?‘문화주의(culturalisme)’가 등장하여 거기에 문화인류학적 관점에서 ‘인간의 행동이나 심성은 문화에 의해 기술된다’고 간단히 언급되었을 뿐, 기타 영어권의 권위 있는 웹스터 사전이나 브리태니카 백과사전에도 전연 일언의 언급이 없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후진문화의 근대적 의식이 싹트기 시작한 한국에서는 이미 1920년 초에 동아일보가 창간된 발기문에 하나의 사시 형식으로 민족·민주·문화주의가 등장하고 있고, 좀 뒤의 일이지만 김구 선생의 왇埇活舊?에도 문화주의란 노골적인 낱말은 아니지만, 김구 선생이 독립국가의 민족적 최고의 덕목으로 내세운 ‘문화’가 전제되어 ‘오직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으로 그것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까지 행복을 준다’는 취지의 언급이 출현하여 필자의 문화주의를 내세우는 이 마당에 매우 흐믓한 자족감을 주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더욱이 근자에 우리 나라 민중서관의 국어사전(1974)이나 최근에 금성출판사에서 출간된 국어대사전(1991)엔 문화주의를 선명하게 풀이하여 똑같이 ‘문화의 향상과 가치의 실현을 인간 생활의 최고 목적으로 하는 주의’라 언급되어, 필자가 문화주의에 대하여 술회하고자 하는 그 중요 목적에 잘 부합되어 더욱 흐믓함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옛날 문화가 적극적으로 열리지 않은 원시시대에는 위압적인 종교가 모든 것을 지배하였지만, 문화가 열리고 과학이 일어나자 원시종교의 힘은 계속 쇠퇴 일로를 걷게 되고, 대신 각종 문화가 생기고 뒤섞이면서 현재는 다원화 문화의 전성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거기서 현대를 흔히 ‘다원문화주의(multi culturalism)의 시대’라고들 한다.

18세기에 이르러서야 칸트는 문화의 개념을 비로소 진·선·미 세가지로 나누어 조직화하여 문화가 고도한 삶의 의식으로 정의가 내려진 이래, 문화는 계속 초고속도로 발전되어 현재는 갈피가 잡히지 않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로서 인간의 삶에 필요한 것이면서, 저급한 것이건 고급의 것이건 가릴 것 없이 성과 속의 장벽도 무너짐과 동시에 일반 대중이 결국 문화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즉, 학문에 있어서는 지난날 철학·윤리학·미학이 주도권을 차지한 것과는 달리 현재는 일상생활의 요긴한 음식학·복식학·풍속학 등이 중요하게 대두되어 지난날 천대를 받았던 이런 잡학이 일반화되었다. 발전의 템포가 느린 우리 나라 문화사도 예외가 아니다. 지난날 직업의 신분을 士農工商으로 규격화하여, 성인의 학인 경학을 제일 위에 두고 장사 따위를 천인시하던 것이 엊그제였지만, 천시를 받던 실학이 오늘날엔 떳떳히 일반화되었다.

현재는 확실히 우주의 신비가 하나하나 벗겨지고 인간의 복제 문제까지 왈가왈부하는 우주 첨단과학의 시대요, 문화의 향방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의 다원문화주의의 시대이다. 지난날 소수의 특수층만이 문화를 향유한 것과는 달리 이제는 인생의 보탬이 되는 한 누구이고 간에 문화를 만들고 누릴 수 있는 자격이 부여된 것이다. 옛날 성인과 현인의 학으로 군림한 종교, 철학 등도 형이하학인 과학, 사회학, 복식학 등이 과학문화, 사회문화, 복식문화로 호칭되는 것과 같이 종교문화, 철학문화로 균등하게 불리워지게 되었다.

그뿐이랴! 인류의 살상을 자행해온 군사·전쟁도 얼마만큼 우리의 삶에 보탬이 되는지는 몰라도 어느 때부터인가 군사문화란 용어로 떳떳히 불리워지고 있음을 본다. 또한 현재 미국에는 클린턴 대통령의 성추문으로 스캔들을 캐내는 것을 업으로 하는 ‘드러지(druggy)’란 직업이 생겨났다고 하고, 우리 나라에는 IMF 한파로 중국·러시아를 왕래하는 신종 보따리 장사가 생겨났다고 듣고 있다. 이를 감안한다면 지난 봉건사상의 물결 속에서 점잖은 집안의 아가씨가 감히 연애를 자행할 경우, 가문을 망쳤다는 것으로 머리가 깎기고 내쫓기는 등 폭거를 일삼던 시대와는 달리, 오늘날 스스로 짝을 찾아야 하는 연애전성의 시대에서는 딸 가진 부모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서도 마땅히 연애문화와 연애학이 아울러 등장해야 할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만큼 문화는 역사가 지속되는 한 계속 다양화되면서 인류의 평화와 질서를 위해 봉사하고 있는 것이다.

문화주의의 철학적 바탕은 건전한 동양사상에 기본을 두어야 한다. 가령 유가의 경우, 동양의 최고 철학 고전인 『주역』의 ‘태극이 음양을 낳고 음양은 사상을 낳고 사상은 팔괘를 낳는다(太極生兩儀 兩儀生四象 四象生八卦)’는 것이나, 도가의 경우, ‘도는 하나를 낳고 하나는 둘을 낳고 둘은 셋을 낳고 셋은 만물을 낳는다(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는 『노자(老子)』의 말이나, 또는 불가의 경우, ‘전체이면서 하나요 하나이면서 전체이다(全體則一 一則全體)’의 화엄 사상 등은 모두가 본체와 현상은 하나인 것이 전례가 되어, 현상은 아무리 변화와 발전을 거듭하더라도 결국은 본체로 귀결된다는, 하나이면서 둘이요 둘이면서 하나인 원리에 귀속된다는 것이다.

문화주의의 범위도 물질문명을 ‘문명’, 정신문화를 ‘문화’로 풀이하는 소위 훔볼트 식의 물질과 정신을 개별화하는 것이 아니라 문명과 문화, 물질과 정신을 하나로 아우르는 것이고 또는 칸트 식의 소위 이성적 규준에 의한 제한된 문화가 아니라 이성과 감성, 성과 속이 하나로 아우르는 차별 없는 포용주의이다.

위에서와 같이 문화주의가 건전한 동양사상의 본체와 현상이 하나가 된다는 일원론으로 통어가 되어 있으므로 문화가 삶의 보탬이 되는 한, 문화주의는 결국 어떤 한 문화를 절대주의의 입장에서 독선화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 하나의 개체는 서로 포용하면서 상대주의의 입장에서 서로 보완하고 융합하고 조화를 이루는 호혜주의요 평화주의이며 자유주의인 것이다. 그러므로 거기에는 투쟁·알력이 있을 수가 없고 대화와 이해가 있을 뿐이다.

이제 문화주의가 다원화의 우주과학시대에서 대중화된 마당에 문화의 다양한 발전을 위해 제언해 둘 일이 있다.

문화주의의 실현을 위해 우선하여 배척할 것은 남의 것을 배격하고 자기만을 독선화하는 절대주의이다. 문화주의는 거듭되는 말이지만 상대주의요 평화주의이며 자유주의인 것이다.

옛날에는 가령 종교만 하더라도 특수 종교를 절대화하고 남의 것을 비하하여 군림했던 관계로 종교 정신인 사랑과 평화, 봉사와 희생과는 달리 종교전쟁이 끊임없이 일어나 많은 무고한 인민이 피로 희생되었다. 이런 십자군 전쟁류가 지금도 지구촌 곳곳에서 자행되고 있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또한 이런 종교적 절대주의가 해방 후, 특히 우리 나라 이데올로기 갈등의 와중에서 적지 않은 애국자와 무고한 많은 인민이 희생되었다. 요새 이런 이데올로기의 문제가 다시 머리를 들고 있다. 즉, 극우성향의 모 일간 신문사가 합리적 개혁 자유민주주의자를 친공 내지는 신 막스주의자로 몰고가는 매카시적 횡포가 그것이다. 당연히 문화주의의 정신에서 배격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내일이면 21세기의 문화지상주의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다. 東과 西의 갈등은 말할 것도 없고, 성과 속, 정신과 물질, 자연과 인간이 하나로 융합되고 조화가 이루어져야 하고, 또한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