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月의 1月

                                                                                         변 해 명

 학교에서는 11월이면 신년 1, 2월을 염두에 두고 계획을 세우게 된다. 12월 겨울방학이 시작되기 전에 학기말고사 일정과 방학식, 방학 일수, 신년도 2월의 개학일, 졸업식, 종업식 등의 일정들을 잡아 수업시수를 맞추어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려면 다음해 1, 2월의 달력이 있어야 한다.

99년 2월에는 졸업식을 아무리 늦게 잡아도 12일을 넘길 수 없다. 예년에는 14일이나 15일쯤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2월 13일 토요일부터 구정 연휴로 이동하는 가정이 많고, 14일에서 17일까지 구정 연휴이고 보니 일정을 뒤로 미룰 수가 없다. 학년 말 종업식은 20일경으로 잡고(20일 이후는 교사들의 인사이동 관계로 봄방학에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면 2월은 개학하고, 신입생 소집 사무에 종업식까지 수업할 시간이 많지 않다. 그런저런 일로 겨울방학, 여름방학 일수가 조정된다. 그래서 신년도 달력은 사실 11월부터 필요한 것이 아니라 여름방학 전부터 참고하게 된다.

나는 연중에 신년도 달력(1, 2월을 참고하기 위해)이 필요하면 으레 금년 달력 안에서 만들어 쓴다. 지금 쓰고 있는 달력에서 신년도 1월의 날짜 배열이 요일과 맞는 것을 골라 신년의 달을 하나 더 써넣고, 신년과 구년의 달을 넘나들며 사용하는 것이다. 그러다 정작 연초에 새 달력을 구하지 못하면 불편없이 그것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다.

99년 1월은 98년 5월과 날짜 배열이 같다. 나는 5월 달력을 펴놓고 1월 달력을 만든다. 5월 1일의 1자는 검은 글씨니 빨간 펜으로 1자를 덮어 1월 1일의 공휴일 표시를 한다. 5월 5일은 어린이날로 빨간 글씨니 그것은 검은 펜으로 검게 고친다. 5월의 달을 표시하는 5자 옆에 1자를 크게 동그라미 속에 써넣어 달을 표시하고, 98년 아래 99년을 써 넣으면 98년 5월 달력은 99년 1월 달력으로 새롭게 태어난다.

지금 책상 위에 세워놓는 달력은 눈덮인 산천의 그림이 있는 1월의 달력이 아니라 우리 산야에 피어나는 각시붓꽃이 화사한 초여름의 1월 달력이다. 나는 이 달력을 바라보면서 1월에 이미 5월을 꿈꾼다.

각시붓꽃을 보고 있으면 그 꽃 뒤에 숨은 개동백꽃이며 진달래, 철쭉이며 소쩍새, 뻐꾸기, 꾀꼬리까지 계절의 빛과 소리들을 더듬어 보게 된다. 부채살 속에 접힌 시간들, 3개월의 접혀 있는 시간들을 함께 바라본다.

금년 1월 교단은 너무 춥고 어둡고 을씨년스럽다. 이 달력처럼 계절을 훌쩍 뛰어넘어 5월의 어느 하루처럼 밝고 화사한 달로 바꿀 수는 없을까?

겨울 날씨는 체감온도에 따라 사람마다 느낌이 다르다지만 ‘반 병의 술’을 바라보는 많은 교사들의 시각은 계절의 추위보다 더 춥게 느끼고 있다. ‘벌써 반 병이야? 반 병밖에 남지 않았어?’ 하는 아쉬움과 서운함과 절망의 표정이다. ‘아직 반 병이 남아 있네’ 하는 여유로움의 교사들도 있긴 있을 것이지만.

금년은 시작부터 쫓기듯 살 것 같다. 늘 불안하고 바쁘고, 여유가 없고 미진한 듯한 시간 속에서 앞이 보이지 않는 답답함으로 뛰게 될지도 모른다. 아직도 남아 있는 반 병의 술이 아닌 벌써 반 병의 술이 곧 비워질 것 같기에 허망한 발걸음이 될지도 모른다. 나는 그런 시작이 아니기를 1월의 문턱에서 서성거린다.

1월과 함께 하는 5월을 본다. 5월은 희망과 기쁨과 삶의 보람이 넘치는 달이다. 1월은 한 해를 설계하고 다짐과 약속으로 백지 앞에 앉은 엄숙한 달이라면, 5월은 신록의 푸르름처럼 생명이 넘치고 희망과 기쁨이 용솟음치는 달이다. 그러기에 5월엔 어린이날이 있고 어버이날이 있으며 스승의 날이 있고 세종대왕탄일이 있고 석가탄일이 있다. 사람 사는 세상의 가장 소중한 사람들을 모두 모아 생각하게 하는 달이다. 어느 달이 이처럼 값진 날들로 채워져 있겠는가?

일년의 단 한 번, 꽃 한 송이를 들고 불효를 뉘우쳐보는 어버이날, 나를 오늘이 있도록 가르쳐 주신, 그래서 그리워지는 스승을 한 번쯤 생각해보는 스승의 날, 그런데 금년의 5월은 눈밭의 나목으로 서는 많은 어른들을 생각하면서 엉거주춤 멍청히 서 버릴 것 같다.

나는 다가올 5월이 두렵다. 한 번뿐인 이 5월을 어떻게 맞고 보낼 것인지. 평생 교직에 서서 최선을 다했던 원로 교사들은 곧 교단을 떠날 터인데 그들을 외면하며 바쁘다고 돌아가는 우리가 스승의 날이 없는 5월을 만들어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무엇이 우리를 그토록 부끄럽고 서글프게 몰아가는지 알 수가 없다.

나는 1월의 어두운 하늘을 바라보며 5월의 하늘을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