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화(國花)

                                                                                        정 부 영

 남의 집 뒷 화단에 핀 보라색과 흰색의 꽃을 무심히 본다. 녹색 잎 사이사이로 탐스러이 꽃을 피운 나무는 이층 창가까지 긴 목을 드리우고 있다. 몇십 년은 된 나이로 보인다. 그것이 바로 무궁화 나무란다. 여기에서는 하이비스커스(Hibiscus)라고 명명한다는 것을 알았다. 아들이 머무는 뉴욕 시 퀸즈에 있는 오층 아파트 베란다에서 그 꽃을 내려다보며 반가움으로 가슴이 뭉클했다. 그 꽃은 상징성을 띤 국화(國花)가 아닌가. 거기에는 기품과 서기(瑞氣)가 어려 있었다.

정말 무궁화인지 의아스러워 꽃잎을 가까이 들여다본다. 채도가 다른 투명한 꽃잎의 엮임과 암술과 수술과의 조화는 맑은 음률이 고여 금시라도 뽑아낼 것만 같다. 역시 어떠한 꽃에서도 느껴지는 위대한 탄생이다. 윤기나는 이파리들은 활기찬 함성을 지르는 듯하다. 이국땅이라선지 우리 꽃에 대한 애착이 스멀스멀 솟아오른다. 저 꽃은 번지수를 잘못 알고 태어난 것은 아닌지, 여기가 아닌 우리 나라가 제격일 것만 같아 반가움에 뒤이어 석연찮은 기분이기도 하다. 하긴 서울에서는 잘 볼 수도 없거니와 어쩌다 담 뒤편이나 길 옆에서 본 무궁화는 벌레가 잔뜩 먹은 이파리에 어렵사리 꽃송이를 달고 있을 뿐이다. 그걸 볼 때마다 관심에서 멀어져 천덕꾸러기 대접을 받는 것만 같아 연민과 안쓰러운 심정이 되곤 했다.

몇 년 전 신문 지상에서 나라꽃을 바꿔 보는 것에 대한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병충해에 약하여 쉽게 번식이 안 되고 크게 자라지 못하는 무궁화가 부적합하다는 의견이었고, 일본의 식민사관에 의해 정해졌다는 말도 있었다. 국화는 국기만큼 크게 부각되진 않아 나라를 소개하는 어떤 소책자에는 싣지도 않은 것을 본 적이 있다. 하긴 나도 미국의 국화가 어떤 꽃인지 아직 모른다. 그러나 여전히 무궁화는 우리 가슴에 국화로 낙인되었고, 위엄 있는 보라색 꽃은 애국가 속에서나 여러 문양에서도 대한민국의 상징이 되었다.

그 꽃이 이 땅에서는 저렇게 충실하게 피어날까. 그 후로 무궁화를 곳곳에서 보았다. 길거리를 걷다 보면 집 앞 자그마한 뜰에도 야무지게 피었고, 왕래가 적은 길가에선 키 큰 나무를 자주 보았다. 부르클린의 어느 작은 교회 앞 뜰에는 100년이나 된 잘생긴 나무가 심벌인 양 버티고 서 있다. 꽃 모양이 종(鍾) 같아 복음을 전파하는 의미로 심지 않았나 싶다.

이 땅은 국토가 넓고 자원이 풍부해서인지 모든 것이 커 보인다. 언젠가 저녁 무렵, 암청색의 드넓은 하늘가를 보고 놀란 적이 있다. 또 하나의 태양의 연출이 이루어진 듯 그림 같은 달덩이가 나지막이 둥실 걸려 있는 밤하늘은 잠시 꿈의 세계를 헤매이게 했다. 샤갈의 ‘어두운 태양 속의 마을’이 떠올랐다. 고국에서보다 달도 더 크게 보이는 것은 넓은 광야에서 느끼는 착시 현상일까, 아니면 여행객의 풍선 같은 기분 때문일까. 달이 커 보이는 현상은 그 후 몇 번이나 느껴지곤 했다. 달과 같이 무궁화 꽃잎도 선명해 보인다.

그러나 실한 무궁화를 보며 아쉬워할 게 아니었다. 거기서는 국기(國旗)에서처럼 방방곡곡 세계 곳곳에 펄럭이는 나라의 얼굴을 보아야 했다.

저 하이비스커스를 보고 국화(國花)를 떠올리는 마음은 고국을 염려하는 마음이다. 이민자의 가슴 속에 남아 있는 무궁화의 얼굴은 고국을 그리는 사랑이다. 그것은 미국 속에서 일하는 한국인을 보는 것이다 ─ 동트기 전 새벽에 일어나 과일을 실어 나르고 야채를 씻는 상인의 근면과 성실에서 보인다. 또한 하루 종일 기계의 소음과 거품 속에서 세상살이의 때를 빼는 빨래방 주인의 서투른 한국말에서 느껴지고, 자녀의 교육을 위해서 피땀 흘리는 슈퍼마켓 주인의 거친 손에서 느낀다. 소호(soho)의 액세서리 집에서 아르바이트 하는 유학생의 고달픈 미소에서 보이며, 한국어 방송을 하는 아나운서의 자막 읽는 눈동자가 말해 주고, 사업을 위해 불철주야 고국을 드나드는 사업가의 활기찬 발걸음에서 듣는다. 그것은 미국 속에서 한국을 느낄 수 있는 것들 ─ 링컨 센터에서 우리 역사와 민족관을 보여준 뮤지컬 ‘명성황후’에 보내는 갈채 속에 있다.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 마련한 한국관의 작은 방에서 나오는 아쉬움에 섞여 있고, 신도가 많은 한국 교회의 십자가에도 있다. 또한 진열대에 놓여진 뻘건 굴김치와 오이지에서 풍기는 맛깔스러움, 진공 포장된 오징어의 퀘퀘함에 있다. 아파트 복도에 새어나오는 된장 찌개 냄새에서도 느낀다. 재활용으로 버려진 한국어 신문의 활자에 실려 있는 마음이며, 우리말 간판을 보면 반가워하는 심정이다. 실하게 피는 무궁화에서 고국과 동포를 돌이켜 보는 것은 잠시 머무는 나만의 일이 아닐 것이다. 이곳에 정착한 어떤 친구는 ‘고향’ 단어만 나와도 눈물이 고인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여기에 머무는 동안 아침마다 맨손체조를 하면서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의 첨탑과 클라이슬러 빌딩의 비늘 잎 같은 지붕이 햇빛에 반사되는 찬란함에서는 이국의 정취를 느끼고, 저녁 노을이 비칠 때면 두 그루의 무궁화에서 고국의 집을 그리며 지냈다. 비바람이 지나간 후 줄어든 꽃 수를 헤아리며 무성하던 잎이 서서히 줄어드는 광경을 향수 어린 정감으로 내내 지켜보게 되었다. 고국은 IMF로 어려운 상황이고, 빅딜이니 은행 구조조정이니 하여 시끄럽다. 실직자 수가 증가하고 홈리스의 생활고와 실태가 심층 취재되어 방영된다. 적적한 이국땅에 서니 나라라는 명제가 크게 부각되는 것 같다.

언젠가 천진암 성전으로 가는 길목에서 가로수같이 심어놓은 작은 키의 무궁화를 본 적이 있다. 벌레 먹지 않은 온전한 잎과 꽃이 소담스러웠고, ‘예쁘다’라기보다는 품위 있고 성스러웠다. 코스모스가 아닌 국화의 영접을 받으며 멀리 산천을 바라보니 관념 속에 있는 조국이 조금 비집고 나오는 듯하다. 그래서 상징적 꽃이 필요한가 보다. 국토에 알맞은 아담한 나무들과 대국의 훌쩍 큰 나무들이 비교가 된다. 그렇지만 꽃송이가 주는 메시지는 우리 것이 더 강한 듯하다.

지금 심정 같아서는 고국에 가면 무궁화를 새삼 살펴볼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