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의 파티

                                                                                       홍 혜 랑

 남편의 선심이 없었다 해도 이번엔 내 스스로 넉넉한 한복 한 벌쯤 해 입으리라 마음먹고 있었다. 한껏 호사하는 마음으로 맞춰 입은 옷은 값이 비싼 최고급 옷도 아니고 색깔이 날아갈 듯이 화사하지도 않다. 그저 몸에 맞게 편안한 것이 좋았다. 남편의 정년퇴임 식장에서 이 편안한 옷차림으로 그의 옆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는데, 뜻밖에도 평소엔 잊고 지내던 30여 년 전의 베이지색 원피스가 몸에 와닿는다.

 

유럽으로 가는 비행기 요금이 서울의 조그만 집 한 채 값과 맞먹던 1960년대에 가난하게나마 남편이 유학길에 오를 수 있었던 건, 그리고 1년 후에 내가 독일 땅에서 남편과 합류할 수 있었던 건 농촌에 계신 시부께서 외아들에게 쏟으신 남다른 집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떠나는 짐 속엔 새로 맞춘 남편의 검정색 정장 한 벌도 끼어 있었다. 그것은 공부를 마치는 날 구술 시험장에서 입을 예복이었다. 씨를 뿌리기도 전에 추수할 곡간을 마련하는 낙천적인 농부였다고나 할까. 그랬다. 이 옷을 입고 시험을 치를 수 있는 날을 우리가 정하고 계획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어떤 고생도 각오가 되어 있다’고 말할 때의 고생은 기껏해야 자신이 예견하고 상상할 수 있는 고생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독일 땅에서 제2차 세계대전이 종료된 것이 1945년이고, 우리 땅에서 한국전쟁이 휴전된 것이 1953년이니까, 그들은 우리보다 불과 8년 먼저 종전을 맞이한 똑같은 분단국이었는데 60년대 말 내가 독일 땅을 밟는 순간, 내 눈에 비친 그들의 풍요와 안정은 우리와 8년의 차이가 아니라 우리는 영원히 다가갈 수 없는 피안의 세계처럼 느껴졌다.

당시 우리의 것이 해외에 나가 평가절하되기는 화폐나 학력이나 마찬가지였다. 내가 고국에서 최고 학부를 나왔건 초등학교를 나왔건 독일 땅에서 유학생의 아내로 호구(糊口)를 위하여 일자리를 찾는 데는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그들의 풍요와 안정 속으로 들어서는 바로 그 순간부터 나는 자신의 신체적, 정신적 의지를 시험하는 혹독한 삶을 시작했다. 이 역설적인 현실 속에서 나는 개인의 몸이 이 지구상 어느 곳에 가 있거나 그의 운명은 고국의 흥망성쇠에 의해서 원격조정되고 있음을 뼛속까지 느꼈다.

하루 하루의 혹독한 노동 조건 속에서 내 자신의 학업을 놓지 못하고 매달리다가 스스로 병객이 도어 남편을 벼랑으로 몰고 가던 배움의 한(恨)이 실려 있었기에 나에게 지워진 후진국의 멍에가 더욱 무겁게 느껴졌던 것 같다. 그래도 먹구름 뒤의 태양을 믿는 것처럼 나를 버티게 해주는 신앙 같은 것이 있었으니, 남편이 짐가방 속에 들어 있는 정장 차림으로 구술 시험을 볼 수 있는 그날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운명은 우리의 계획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지도교수가 급서하셨다는 비보를 듣고 망연자실하는 남편의 모습은 참으로 애처로웠다. 유학 생활 3년만의 일이었다. 짐가방 속에 들어 있는 검정색 정장이 지도교수의 장례식에 입을 상복(喪服)이 될 수도 있다는 건 우리가 예견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중도 하차하고 귀국할 것인가를 놓고 한없이 고민하고 방황하던 끝에 사제지간에도 인연이란 것이 있는지 뜻밖의 학문적 대 스승을 새 지도교수로 맞이하게 되었다.

새 지도교수에게서 4년여의 공부를 마치고, 7년 4개월이란 긴 항해 끝에 드디어 포구에 닻을 내리는 남편의 구술 시험날이다. 나는 이날을 위하여 소중하게 간직했던 남편의 정장 양복을 꺼내서 다림질했다. 그런데 입고 나선 남편의 모습은 자기 옷을 입은 게 아니다. 그 동안의 혹독한 세월이 이 옷의 크기를 마음껏 늘려놓았다. 헐렁하다 못해 옷이 걸어가는 것 같은 남편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나는 형언하기 어려운 운명의 힘 같은 것을 느꼈다. 출가(出家)한 구도승이 인연법에 따라 살아가듯이 학문도 인연법에 따른 구도자의 길이 아닌가 싶었다. 이 고달프고 험난한 길을 선택한 인연이 자신의 의지였다고만 생각되지 않았다.

남편이 시험장으로 떠난 후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아래층 주인 아주머니의 전갈이 들린다. 학교에서 전화가 왔다. 지도교수의 비서실에서 온 것이다. 졸업식이 따로 없는 독일에서 시험에 통과하면 지도교수가 제자에게 파티를 열어준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당일 그 자리에서 있을 줄은 몰랐다. 뜻밖의 초대에 나는 당황했다. 입고 나설 옷이 없다. 나야 수험생이 아니니 정장은 아니어도 되겠지만 마땅한 옷이 없다. 단벌 외출복인 베이지색 원피스를 꺼내 보았지만 짐작한 대로 작아져서 지퍼가 올라가지 않는다. 그때 나는 임신 5개월의 몸이었다.

어찌할 것인가. 시간이 없다. 숨을 죽이며 지퍼를 가까스로 올리고 집을 나섰다. 학교에 당도하니 구술 시험이 끝나고 나이든 여비서가 파티 준비에 바쁘다. 파티라야 지도교수와 심사위원들 그리고 낯익은 몇몇 조교들이 둘러앉아 다과를 드는 조촐한 축하의 자리다. 나를 보신 지도교수가 반색을 하면서 내 팔을 잡아당기며 옆에 앉을 것을 강권하신다. 어쩌면 좋은가. 숨을 죽이며 겨우 지퍼를 올린 이 위기의 원피스를 그분이 아실 리 없다. 후드득 바늘질밥이 나갈 것만 같다. 순간 마네킹 같이 몸이 굳어버린다. 팔을 움직여서는 안 될 것 같다. 눈앞의 다과와 샴페인 잔에 손을 갖다 댈 수 없다. 누가 무슨 말을 하는지 들리지가 않는다. 함께 웃을 수도 없다.

오늘 정년퇴임 식장에서는 남편의 후학들에게 둘러싸여 덩달아 호강을 했는데 기분이 참 묘했다. 이승을 마지막 떠나는 사람이 꽃상여를 타면서 느끼는 분리감과 아쉬움이 이런 것일까 싶다. 호강 중에서도 꽃상여를 타는 호강은 철두철미하게 마지막을 의미하지 않던가. 종착역에 닿아서도 내리지 않으려는 막무가내의 승객이 되어버린 느낌이다. 그런데 한복의 치마폭 뒤로 그날의 베이지색 원피스가 나타난 건 또 어인 만남인가.

주연이든 조연이든 무대를 떠나는 예술가는 자신이 열연(熱演)할 때 입었던 의상을 챙기려 든다. 자신의 연기가 열연이었다고 믿으려는 건, 은막을 떠나면서 짐짓 ‘후회가 없노라’는 말 한 마디를 하고 싶어서가 아닐는지. 연습이 없다는 인생의 무대에서 후회가 없을 만큼 연기를 잘할 수 있는 연기자가 있을 것같지 않다. 최면을 걸어서라도 열연이었던 장면들을 생각해 내야 한다. 종착역의 광장을 평화롭게 입성할 수 있는 입장권이 필요한 것이다. 오늘 내가 베이지색 원피스의 잔영(殘影)을 만나게 된 것도 바로 그 때문이리라.

 

 

 

홍혜랑

한글문학으로 등단. 경희대학교 독일어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