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궤(族譜櫃)

                                                                                        김 형 진

 두세 평이 될까말까한 내 방 윗목에 검은 옻칠이 퇴색하여 땟국이 전 듯 보이는 작은 궤 하나가 놓여 있다. 이 궤는 내가 어렸을 적부터 고향 집 안방 윗목, 허드레 반닫이 위에 붙박이로 놓여 있던 것인데, 부르기를 달리 할 뿐 모양은 반닫이와 별로 다를 것이 없다. 있다면 반닫이의 문은 전면 상당부가 다 열리게 되어 있는데 비해, 이 궤는 전면 상당부의 좌우를 살려둔 채 중앙에 누운 직사각형 모양의 문을 내어 놓았다는 것 정도이다. 그런데도 우리 집안 어른들은 이를 ‘족보궤’라 부르며 항상 안방 상좌에 모셔왔다.

아버지는 명절 아침마다 지방(紙榜)을 쓸 때면 이 궤에서 족보를 꺼내놓고 가문의 명예를 드높인 선대들의 함자를 짚어가며 그분들의 직함과 행적을 소상히 이야기해 주곤 했다.

그럴 때면 거의 빼놓지 않고 퇴색한 창호지로 둘둘 말아 노끈으로 단단히 묶어놓은 내 5대조의 과거 합격장이라는 것을 펴보이며 그분의 외모와 성품까지 직접 만나본 듯 생생하게 그려 보이곤 했다. 나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기 전까지 명절 아침마다 통과해야 하는 이 의식(儀式)에 대해 별로 거부감을 가진 적이 없었다. 궤에서 꺼내놓은 족보와 홍패(紅牌)에서 은은히 풍겨나오는 향내가 싫지 않아서였는지도 몰랐다.

내가 중학교에 들어간 뒤 처음 맞은 명절부터 아버지는 지방 쓰는 일을 내게 넘겨주고, 서툰 붓글씨와 씨름을 하고 있는 내 옆에 앉아 천륜의 소중함과 조상 숭배의 중요성을 차근차근 설명해 주곤 했었다. 그때의 나로서는 긴가민가한 이야기일 뿐이었으나, 아버지는 명절마다 끈질기게 그런 의식을 반복하였고, 나는 차츰 싫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에는 격한 거부감이 끓어오르기까지 했다. 이 낡아빠진 족보궤를 안방 상좌에 모셔놓고 별난 신물이기나 한 것처럼 떠받드는 것은, 미개인이 조상 대대로 물려 내려오는 삭아빠진 물소 뿔을 문 앞에 걸어놓고 자기들의 용맹을 뽐내는 행위와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대학생이 되어서는 몇 줄 얻어 읽은 사회 인류학자들의 견해를 피상적으로 끌어들여 친족 관계의 강조는 생물학적 유대에 바탕을 둔 미개 사회의 유물로서 선진 문화를 구가하는 서구 사회에서는 이미 퇴색하여 폐품 처리된 것이라는 의식의 무장까지 갖추게 되었다.

그러다가 어느 명절엔가 내가 지방 쓰기를 거부하자, 아버지는 버럭 화를 내며 내 등을 손바닥으로 사정 없이 내리쳤다. 내가 아버지의 손바닥에서 전해오는 짜릿한 해방의 쾌감을 음미하고 있는 동안, 망연히 나를 바라보고 있는 아버지의 눈빛에는 짙은 회색 안개가 자욱히 서려 있었다.

그 뒤 학교를 졸업하고, 결혼을 하고, 직장을 얻고, 큰아이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20년이 넘게 나는 족보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미개 사회의 표본인 혈족 관계의 틀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인간 관계를 체결하고 해지할 수 있는 광활한 선진 사회에 내 영토를 구축해 가고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아버지를 대신하여 족보에 관심이 없는 나를 질책하는 어머니의 잔소리쯤 귓등으로 흘려버릴 수 있었고, 문중 회의에도 묘제(墓祭)에도 코빼기 한 번 내밀지 않았다.

 

그런데 아버지의 장례를 치른 뒤 사정이 달라졌다. 고향 집 안방 윗목에 붙박이로 들어앉아 있던 족보궤가 내가 사는 집으로 옮겨졌고, 나는 내 좁은 방 윗목에 족보궤가 들어앉을 자리를 마련해 주어야 했다. 그때까지 취해온 족보에 대한 나의 거부감을 감안한다면 그리 쉬이 용납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는데도 어찌 된 일인지 별 저항 없이 내 방 상좌를 선뜻 내어 주고 말았던 것이다. 왜 그랬는지는 나로서도 명쾌히 설명할 수 없지만, 아버지의 유산을 물려받듯 응당 그렇게 하는 것이 순리라는 생각이 내 의식의 바닥에 눌러붙어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족보궤를 받아들인 뒤 얼마 동안은 그저 무심히 지냈다. 그러나 한 방에서 기거하는 기간이 길어감에 따라 차츰 궤에 대한 관심이 일기 시작했다. 실용적인 가구도 예술적인 공예품도 아니면서 누대에 걸쳐 떠받들림 받아온 이 낡은 궤의 실체를 한번 알아 보고 싶은 충동이 슬며시 고개를 들기도 했다.

족보궤를 내 방에 들여놓은 뒤 한 달이 조금 지났을 즈음의 일요일이었다. 내 손으로 직접 족보궤를 열어보기로 했다. 봉투에 담아 책장 옆구리에 끼워두었던 열쇠를 찾아 궤 앞에 쪼그리고 앉아 몇 번이나 헛손질을 하고 나서야 겨우 자물쇠를 열었다. 궤 문을 여니 퀴퀴한 곰팡내와 뒤섞인 고서 특유의 냄새가 역하게 코를 찔렀다.

궤 안에는 선반이 질려 있고, 선반 위에는 명절 아침마다 지방을 쓸 때 사용하던 작은 벼루와 연적과 붓과 먹이 담긴 벼루집이 놓여 있었다. 그러나 내 관심은 선반 아래 차곡차곡 쌓여 있는 족보와 그 위에 놓인 홍패에 있었다.

족보 더미 위에서 홍패 뭉치를 꺼냈다. 노끈을 풀어낸 다음 퇴색한 창호지를 서너 겹 벗겨 내니 한지를 여러 겹 부하여 주황 물감을 먹인 듯 불그죽죽하고 빳빳한 종이 한 장이 나왔다. 그 종이의 오른편 상단에 자리한 ‘교지(敎旨)’만이 비교적 뚜렷이 보일 뿐 나머지는 글자를 판독하기조차 힘들 만큼 흐려져 있었고, 하단 모서리에는 좀까지 슬어 있었다. 이것이 아버지가 그리도 자랑스럽게 여기던 우리 가문의 심벌이라니, 참으로 허망했다.

다음에는 족보를 꺼내기 시작했다. 맨 위에 놓인 파보(派譜) 한 권을 꺼내니 그 밑에는 대동보(大同譜)였다. 대동보는 다섯 권, 여섯 권을 꺼내도 끝이 나질 않았다. 이 많은 책들 속에 차가운 활자로 누워 있는 조상들의 함자(銜字)와 행장(行狀)들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걸까. 꺼내놓을수록 퀴퀴한 곰팡이 냄새만 짙어갔다.

그런데 족보를 다 꺼내고 궤 바닥을 확인해 보던 나는 바닥에 납짝 깔려 있는 얄팍한 서첩(書帖) 하나를 발견하였다. 일부러 손으로 더듬어 확인해 보지 않았더라면 그냥 지나쳐버렸을 만큼 두께도 없고 면도 좁은 서첩이었다. 내심 놀라며 유심히 살펴보니 한지를 여러 겹 접어 부한 표지에 거뭇거뭇 곰팡이 자국이 지저분할 뿐 글자 한 획이 없다. 호기심이 부쩍 일어 조심스럽게 표지를 넘겼다. 뜻밖에도 ‘호남가(湖南歌)’가 필사되어 있었다. 제목은 한자로 쓰고 노래말은 국문으로 씌여 있는데, 달필은 아니었지만 세필로 꼼꼼히 써나간 글씨가 친근감을 주었다. 표지에 수택(手澤)이 덜하고 아직 까실까실 부풀어 있는 걸로 보아, 본판이 한량이었다는 증조부가 아니면 무너져가는 가문은 아랑곳하지 않고 세월타령으로 살았다는 조부가 심심소일로 적어놓고 흥얼거렸던 흔적일 법도 했다. 코에 가까이 대고 냄새를 맡아보니 곰팡이 냄새 속에 은은히 배어 있는 구수한 체취가 감지되는 것도 같았다.

나는 초등학생처럼 소리를 내어 호남가의 노래말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맞춤법도 띄어쓰기도 아예 없는 문장이었으나 글자 획 하나하나에 훈훈한 기운이 전해왔다. 글자를 읽어감에 따라 그 훈훈한 기운은 그대로 내 호흡 속에 녹아 나의 체온이 되어버림을 느꼈다. 호남가를 끝까지 읽고 난 나는 서첩을 두 손으로 받쳐들고 거실로 나가 햇볕이 드는 곳에 펴놓았다. 그리고 살살 부채질도 해 주었다. 그렇게 하면 그 오랜 세월을 홍패와 족보 밑에 깔려 답답했을 숨통이 트일는지도 모른다는 심산에서였다.

거실에서 햇볕이 물러난 뒤에야 서첩에 묻은 곰팡이 자국을 털어낸 다음 원래대로 접어 궤 안 선반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면서 그 서첩 옆에 놓일, 내 체취와 체온을 담아 후손에게 물려줄 유물을 상상해 보았다. 좀처럼 그 실체가 잡혀오질 않았으나 차츰 피가 더워짐을 어쩔 수 없었다.

다음 명절에 아들녀석이 내려오면 이 족보궤를 열어놓고 이 서첩을 보여 주며 족보궤의 의미를 설명해 주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차가운 활자로 누워 있는 함자와 행장이 아닌 체온과 체취를 후손에게 전할 수 있는 선대들의 유물로 그득 채워질 족보궤. 이 족보궤는 그 동안 서구식 의식에 젖어 살면서도 늘 허해 있었을 아들녀석의 가슴 한복판을 훈훈한 기운으로 메워줄 수 있을는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서둘러 집앞 가게에 나가 나프탈렌을 구해다가 족보궤 선반 위에 놓았다. 예전에 아버지가 향나무 가지를 잘게 썰어 궤 안에 넣었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