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관에서

                                                                                       나 용 미

 두 장의 명함판 사진을 내보이는 딸아이의 표정은 불만스러움이 역력했다. 지난 여름, 대학 졸업사진을 찍는다며 입을 옷을 의논해 왔을 때만해도 벌써 그렇게 세월이 지났는가 하는 생각을 잠시 해보았을 뿐, 사진 찍는 것에 대해서는 별 생각 없이 무심코 지나쳤다.

아이의 불만인즉 첫번째 찍은 사진은 턱이 둘로 겹쳐 나와 심통맞아 보이고 살이 쪄보인다는 것이었다. 마음에 들지 않아 또다시 찍은 사진도 얼굴은 예쁘게 나왔으나 이번에는 표정을 지어낸 듯하여 자기의 분위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아이의 말이 맞는 것도 같았다.

다시 찍기로 했다. 지정 사진관에서는 더 이상 찍을 수 없어 다른 곳에서 찍어 필름을 갖다주어야 하는데, 이번에는 나와 함께 가고 싶다고 했다.

삼성동에 있는 사진관까지 따라갔지만 막상 내가 도와줄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이가 몇 가지 도구를 들고 분장실이라고 쓰여 있는 방에 들어가 있는 동안 소파에 앉아 벽에 촘촘히 걸려 있는 사진들을 둘러보았다.

잇몸이 다 드러나게 웃고 있는 스튜어디스 차림의 여자 사진이 먼저 눈에 띄었다. 스튜어디스를 할 나이가 훨씬 넘은 듯한 사십대 여인은 무슨 상을 받았거나, 진급을 했거나, 자신이 사진으로 남기고 싶은 어느 날 찍었음직했다.

그 옆에는 돌사진이 있었다. 태어난 지 일년이 된 아이의 표정은 얼마나 천진난만하고 귀여운지, 찍을 때 부모들이 그 앞에서 울지 않게 하느라고 쩔쩔매며 얼르는 모습이 눈에 선해 웃음이 절로 나왔다. 신랑과 신부가 뺨을 대고 푸르른 초목을 배경으로 행복하게 찍은 결혼사진도 있었다. 고궁에서 떼를 지어 몰려다니며 유난을 떤다고 눈살을 찌푸렸던 사실마저 잊고 젊음이란 얼마나 아름다운지, 사랑이란 얼마나 귀한 것인지, 신혼이란 또 얼마나 꿈 같은 것인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 중에서도 제일 많은 것이 가족사진이었다. 거실 한가운데 자랑하듯 걸어놓는 가족사진. 돌이켜보니 여태껏 사진관에서 가족사진을 찍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몇 년 전, 친정집 가족사진을 찍었을 때 딸의 식구로 잠시 들러리를 섰을 뿐, 막상 우리 식구끼리 오붓하게 찍은 가족사진이 아직 없다.

사진관 벽에 걸린 가족사진 중에 낯익은 얼굴이 있었다. 십여 년 전쯤 유부남과 말이 많았던 유명 연예인이 이제는 남편이 된 그 남자와 유치원생인 듯한 아들을 데리고 찍은 사진이었다. 사진 속의 그들은 모두 행복한 듯 웃으며 가운데 서 있는 어린 아들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사진사의 연출이었겠지만 가족이란 그렇게 자식을 사이에 두고 손을 잡듯 연결된 것이 아닐지. 다른 가족사진도 모두 부모를 중심으로, 아니면 자식을 중심으로 서로가 가족임을 증명하기 위하여 찍은 증명사진 같았다. 그리고 행복하다는 것까지 인화지에 확인해 보이고 싶어 모두들 웃고 찍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준비가 다 된 듯 딸아이는 분장실에서 나와 스튜디오로 들어갔다. “웃을까요?” 하고 사진사에게 물었다. 기사는 아이를 의자에 앉히더니 “고개를 아래로, 아니 위로, 조금 더 옆으로…….” 자세를 고쳐주며 사진을 찍는 순간에만 웃으라고 했다. 나도 그 앞에 서서 마주보며 기사가 지시하는 대로, 아이가 움직이는 대로 똑같이 따라 했다. 아이는 어색한 듯 자꾸 어깨를 움츠리기도 했고 눈을 깜빡거리기도 했다. 나도 덩달아 긴장이 되어 숨을 죽이고 있다가 기사가 준비하는 동안 참았던 심호흡을 한꺼번에 했다.

나는 문득 가족들의 사진을 찍어주기 위해 열성이셨던 친정 어머니가 생각났다. 유년 시절, 사진관에 가면 내 앞에 서서 어머니는 지금의 나처럼 ‘몸을 왼쪽으로, 오른 쪽으로, 옳지. 그래 웃어봐라…….’ 하며 당신의 몸을 움직이셨다.

어머니는 이북에 계신 친정 식구와 헤어져 단신 월남한 실향민이다. 결혼을 한 뒤 먼저 서울에 와 있던 남편을 찾아 힘들게 38선을 넘기는 하였지만, 평생 다시 만날 수 없는 외조부모님에 대한 그리움을 가족사진 찍는 것으로 달래셨다. 헤어져 있었던 남편을 무사히 만나 아들 딸 낳고 잘 살고 있다는 소식을 전하고 싶어서, 이북으로 사진을 부치고 싶어서, 어머니는 지치지 않고 매년 무슨 날만 되면 사진관에 가서 사진을 찍었다. 뿐만 아니라 자식들에게는 생일마다 ‘몇 주년 생일 기념’이라는 글자를 넣어 독사진을 만들어 주셨다.

그 사진들은 다분히 보여져야 하는 것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언제나 단정하고 깨끗한 모습이어야 했고, 가능하면 내가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소품이 사진에 등장했다. 유치원 때의 생일 기념사진에는 체리가 꽂혀 있는 커다란 케이크를 앞에 두고 웃었고, 일곱 살 때에는 그때 막 배우기 시작한 바이올린을 턱에 대고 찍었다. 겨우 도레미파밖에 알지 못했지만 사진 속의 나는 아주 근사한 곡을 연주하는 모습이었다.

내 생일은 겨울이다. 앨범 속의 나는 언제나 겨울 옷을 입은 모습이었다. 어느 해에는 나뭇잎 모양의 모자를 쓰기도 했고, 조금 더 커서는 토끼 털이 달린 가죽 신발을 신기도 했다. 그뿐인가, ‘생일 십주년 기념’이라고 씌여 있는 사진에는 며칠 전에 산 스케이트를 안고 찍었는데, 그 다음 날 덕수궁 연못으로 아버지와 함께 스케이트를 타러갔던 포근한 기억도 있다.

어머니에게 있어 사진을 찍는 것이란 평생 계속 하신 일 중에 빠질 수 없는 중요한 행사셨다. 그리고 외조부모님께 그 동안 열심히 살아왔다고 자랑하고 싶은 당신의 슬픈 기록이기도 했다.

형편이 좋을 때에는 화신 백화점이나 동화 백화점에서 산 옷을 입고 찍었지만, 형편이 좋지 못할 때에는 남대문 시장에서 산 옷을 입고 찍었다. 사진을 보면서 어머니는 “이땐 잘 살았단다.” 하기도 하고, “이땐 힘들었지. 그래도 생일사진은 매년 찍어주어야 하니 어떡하니. 남대문 시장 앞에서 국화 한 다발을 샀지.” 하며 설명을 곁들이셨다. 그 사진은 내가 국화를 한아름 안고 찍어, 입은 옷이 잘 보이지 않은 그런 사진이었다.

그렇게 나의 생일 기념사진은 그때 그 시절 우리 가족의 이야기를, 그 주변의 이야기를 알려주고, 언제나 착하고 단정하고 그 당시 내가 지녔던 최고의 모습으로 남겨졌다.

통일이 된다 해도 이제는 어머니가 사진을 보여드릴 외조부모님이 안 계실 테니 그저 몇 권의 낡은 사진첩으로 남아 있겠지만, 그래도 그 덕분에 나는 어릴 때의 사진첩을 갖게 되었다.

나는 갑자기 딸아이에게 미안해졌다. 돌이 되었을 때 사진관에 안고 가서 한 번 찍어주었던 기억밖에 그 후로는 없었다.

“치~즈. 자, 웃으세요.” 하더니 곧이어 플래시가 터지고 아이는 살짝 웃었다.

40년 전, 사진찍기 싫어하는 나를 데리고 소공동 허바허바 사진관에 가던 날이면 어머니는 명동 입구의 낡은 중국집이나 한일관에 꼭 들르셨던 생각이 났다.

“어디 근사한데 가서 우리 점심하지 않을래?”

아이에게 물었다.

나도 딸아이에게 무엇인가 사서 먹이고 싶었다. 친정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아니 더 솔직히 말한다면 먼 훗날, 아이의 졸업사진을 찍던 날의 기억 속에 내가 같이 있고 싶었다.

우리는 점심을 함께 하기로 했다.

 

나용미

수필과 비평으로 등단.

수필집 『타래』 1, 2집 공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