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  론 ─ 

여로의 문학

─ 김붕구의 수필 ─

                                                                                                                            

                                                                                   최 병 호

 

1. 들어서며

2. 에세이의 목장과 용어 바꾸기

3. 중간지대에 핀 얘기꽃들

4. 마무리

 

1. 들어서며

 

수필과 에세이는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김붕구의 글을 대하면 그런 의념과 함께 새삼 그에 대한 정리의 필요를 느낀다. 누가 보아도 어김없는 한편의 수필을, 틀림없는 일문의 비평을 그는 구분 없이 에세이라는 이름으로 한 책에 담고 있기 때문이다.

 

보통 수필이라 하면, 붓 가는 대로 자유로이 견문, 체험, 감상, 소론 등을 써 모은 것으로 그 내용도 일기적, 기행적, 감상적, 사색적, 고증적인 것 등등으로 실로 가지가지의 각도에 걸치는 것이다.

에세이라고 하는 것도 보통 자기의 감정을 때에 따라 생각나는 대로 서술한 산문이라 할 수 있는 것으로, 그 형태를 크게 나누어 주지적, 객관적인 학술상의 논문에 가까운 것과 주정적, 주관적인 문예작품적인 것으로 대별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 상식이다.

허나 현행 우리 문단에서는 전자의 것보다는 오히려 후자의 것을 수필문학으로 취급하는 것이 상례로 되어 있다.

─ 김열규, 국문학 상에서 본 수필문학(자유문학, 58.6)

 

이런 설명에 따르면 김붕구의 글은 ‘사색적, 고증적인 소론’을 쓴 수필이기도 하고, 그 형태가 ‘주지적, 객관적인 학술상의 논문에 가까운’ 에세이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 문단에서 ‘주정적, 주관적인 문예작품적인 것을 수필문학으로 취급하는 것이 상례’인 점을 고려하면 수필이라기보다는 에세이라고 해야 옳다.

다시 김춘수의 견해를 들어본다.

 

에세이는… 수필이라는 한문자가 의미하는 바와… 다른 또 일면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소론이니 소고니 하는 말로 불려진다. …(이는) 철학적인 또는 사상적인 것을 논리적으로 체계화하지 않고 단편적으로 적은 글을 말한다.…

에세이가 대상하는 대상은…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이다.… 각 과학은 그 과학에 관한 에세이를 가질 수 있다. 철학에 관한, 자연과학에 관한, 문학에 관한 에세이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처럼 문예평론이라는 것이 10~30매 정도의 단편적인 짧은 문장으로 잡지나 신문에 게재하는 경우는 더 말할 나위도 없이 문예평론은 문예에 관한 에세이인 것이다.

─ 김춘수, 에세이와 현대정신(문예, 53.9)

 

수필이 ‘가지가지의 각도에 걸치는 것’이라는 김열규의 견해나 에세이의 대상이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이란 김춘수의 설명이나 사실 비슷한 말이다. 그러고 보면 수필이란 말을 영역한 것이 에세이인지, 에세이를 우리말로 옮긴 것이 수필인지 아리송해진다.

그러나 무릇 체계화하지 않는 단편적인 소론, 소고 따위를 ‘…에 관한 에세이’로 규정한 김춘수의 설명은 명쾌하다. 그것은 ‘우리 문단에서 주정적, 주관적인 문예작품적인 것을 수필문학으로 취급하는 상례’에 비하면 한결 그 폭이 넓다. 그리하여 잡지나 신문에 게재하는 10~30매 정도의 단편적 평론은 말할 나위도 없이 문예에 관한 에세이라고 규정한다. 그런 시각에서 보면 수필은 에세이 속에 내포된 작은 범주의, 같은 장르 같기도 하다.

김붕구의 글은 그런 의미에서 ‘여수’(69), ‘개족보와 핵가족’(72), ‘관악골짜기의 영춘곡’(79) 등 약간의 작품을 제외하곤 수필이라기보다는 주제가 있는, 문예에 관한, 특히 ‘불문학에 관한 에세이’라고 해야 맥락이 선다. 金鵬九 에세이집 『서울과 파리의 마로니에』(79)는 말할 것도 없고, 일반적으로 평론집으로 보는 『現實과 文學의 秘苑』(62), 『佛文學散考』(58)도 저자 자신이 다 에세이집으로 분류하고 있다.

 

 

2. 에세이의 목장과 용어 바꾸기

 

현실을 살면서도 항상 또 다른 현실을 추구하는 것이 우리 삶이다. 의식주에 쫓기면서도 보다 가치로운 삶을 찾고 아름다운 서정에 안기고 싶어하는 게 바로 우리 인생이다. 문학하는 사람들은 그런 의미에서 ‘사회인, 생활인으로서 몸담고 사는 1차적 현실세계’를 살면서 2차적으로는 ‘상상·추상·재구성의 세계, 혹은 그것으로 빚어진 작품들과 그밖의 자신의 추억·연상·몽상의 세계’를 사는, 말하자면 이중 구조를 누리고 있는 것이다.

말이 이중구조지 2차적 세계에 생애를 건 사람들은 거의 1차적 세계의 삶을 최소화한 편향된 사람들이다. 물질적 가난을 감내하면서 고달픈 그 도정을 허위허위 달리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그렇기 때문에 더욱 그 속에서 그들만의 풍성한 삶의 보람을, 진선미를 만끽하고 있다 할 것이다.

프랑스 문학의 세계를 제2의 시·공으로 삼고, 그에 생애를 건 김붕구는 스스로 그 도정을 “참으로 ‘멀고 먼 문학의 여로’” 라고 피력한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의 존재와 기능을 ‘작가의식의 재인식, 경험의 재경험’을 통한 축적 속에 세우면서 “그 동안 설악이나 서귀포, 혹은 소금강 같은 절경에 심취되어 꽤 오래 머무르며 탐방한 것도 더러 있어… 그때그때 메모한 것들, 이를테면 ‘여로 수첩’ 같은 것도 꽤 많이 쌓여 있다.”고 저간의 사정을 털어놓는다.

그러나 그는 그 과정 속에서 제1, 제2의 시·공이 말처럼 확연히 분리되지 않는 흐릿하고 애매한 현실을 경험한다. 그리고 주목할 만한 증언을 한다.

 

그렇게 절연히 갈라놓을 수 있는 것은 관념뿐이고, 실제로는 그 경계도 모호하려니와, 서로 넘쳐 침범하거나 서로 배어드는 중간지대가 있다. 순수와 권위를 고수하려는(의식적이 아니라도 대개는 습관에 끌려), 창작과 비평 양쪽이 모두 무시(혹은 멸시)하거나 기피하는 그 중간지대가 바로 문학 ‘에세이’가 즐겨 차지하는 안성맞춤의 목장이다.

─ 二重의 時·空 , 머리말을 겸하여

 

중간지대? 그게 문학 ‘에세이’의 목장이라고? 그렇다면 그의 ‘멀고 먼 문학의 여로’에서 그가 심취되어 그때그때 메모한 것들은 다 무엇이며 어찌된 것인가? 그것은 순수와 권위를 고수하려는 학문이나 혹은 창작과 비평 쪽에 그 대종을 넘겨주고 이도 저도 아닌 버려진 나머지 것들을 따로 모아 목장을 꾸미고 에세이를 가꾸었다는 뜻이 아닌가. 김붕구는 스스로 그 목장에서 이삭 줍듯 에세이를 모았다고 하니, 그의 에세이는 바로 문학이라는 학문의 낙수 아니면 서제의 여적 같은 문학에 관한 편린들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중간지대는 1·2차적 시·공 어느 쪽에나 다 있다. 이삭도 물론 양쪽에서 다 주을 수 있다. 그러나 대체로 전자 쪽이 현실적이고 동태적인 것이라면, 후자 쪽은 관념적이고 정태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김붕구의 에세이는 이 두 시·공을 부지런히 넘나들며 현실적이고 동태적인 것에는 관념적이고 정태적인 것을, 관념적이고 정태적인 것에는 현실적이고 동태적인 것을 접목하여 그 격을 조율하고 있다.

 

문학이건 사랑이건… 병으로 끝나지 않고… 생애를 걸게 되면… 그것은 이미 정열만으로 되지 않는 필생의 업이다. …지속적이고 건실한 말로 용어를 바꾸어야 한다. 용어를 바꾼다는 것은 지식과 현실과의 거리를 체험의 지혜로 조절한다는 뜻이다.

─ 소년 시절의 문학·사랑

 

김붕구 에세이의 키워드는 바로 이 용어 바꾸기라 할 수 있다. 지식의 용어와 체험의 용어를 활력 있게 섞바꾸면서 지속적이고 견실한 말을, 아니 그런 이삭을, 그런 감동을 형상화하는 일이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것이다.

 

이가 꾀기 시작했다. …그것으로도 부족하다는 듯이 구토 설사에 학질까지 걸리고 말았다.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의 거지도 『놀이의 끝』의 쓰레기통에 갇힌 병신들의 몰골이나 처지도 그보다 더할 것은 없으리라.

─ 보들레르를 찾아서

 

6·25 전쟁 당시, 인민군에게 끌려갔을 때의 자신의 참상을 얘기한 대목이다. 그는 휴전 후 그의 문학의 여로에서 베케트를 만나 스스럼 없이 이를 대응한다. 독자에겐 베케트를 읽지 않고선 그 깊이를 헤아리기 어렵게 한 일이지만, 달리 보면 그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설사 읽지 못한다 해도 연상을 통한 그의 일면을 짐작케 한 일이기도 하다.

베케트는 거창한 세계의 부조리 속에서 의미 없이 죽어가고 또 그런 죽음을 기다리는 절망적인 인간의 조건을 니힐(허무)하게 묘사한 작가다. 이른바 반연극의, 아니 누보 로망의 선구자이기도 하다. 『고도를 기다리며』나 『놀이의 끝』은 희곡이면서도 오히려 움직임이 적고 대화가 없는 희한한 작품이다. 거기 등장하는 거지·병신들의 몰골이나 처지가 처절한 동족상잔의 부조리에 휘말린 김붕구의 절망을 더없이 부각시킨 것이다. 김붕구는 말하자면 그런 정교하고 치밀한 허구의 세계를 자신의 체험에 접목하는, 바로 그 지속적이고 견실한 용어 바꾸기를 한 것이다.

 

 

3. 중간지대에 핀 얘기꽃들

 

이도 저도 아닌, 아니 이것저것 다 포함된 여로의 중간지대란 대체로 잡답한 곳이다. 가파른 길도 벼랑길도 아닌 반반한 공간, 올라온 길을 굽어보고 또 올라갈 길을 추스르는 그런 지점, 버려진 부스러기도 많고 노상 왁자지껄한 곳이다. 김붕구는 그곳에서 잠시 신들메를 풀고 다채로운 작가들의 의식이나 경험을 느긋하게 다시 사는, 에세이라는 얘기꽃들을 피운다. 그 가운데 1·2차 시·공에서 하나씩 주목되는 얘기를 간단히 살펴본다.

먼저 걸출한 여인들과 작가나 시인 혹은 학자들 사이에 얽힌 얘기다.

김붕구는 멀리 프랑스의 첫 단편집 『칠일담(七日譚)』의 저자이기도 한 나바르 왕비와 시인 클레망 마로와의 관계를 비롯해서 데카르트에게 『정열론』 집필의 계기를 준 스웨덴의 크리스틴 여왕, 볼테르에게 호화로운 생활 속에서 창작과 연구를 전념케 한 샤를레 부인, 루소에게 은신처를 제공해준 에피네 부인, 또 『신 에로이즈』를 낳게 한 우드토 부인, 보들레르에게 왍퓽?꽃들왏?낳게 한 쟌느 뒤발, 마담 사바티에, 마리 도브렁 등등의 사랑과 후원에 대한 이야기를 들먹이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서구사회에서는… 전근대적인 귀족사회 때부터 유명한 사교계의 귀부인들이 대개 문화의 추진 전위 구실을 하는 학자 예술가들의 거의 공공연한 애인 겸 후원자의 역을 담당한 묘한 전통이 개방의 길을 터놓고 있다.

─ 女傑들의 사랑과 재능의 點火

 

과연 19세기 후반, 루 살로메(1861~1937)의 등장은 이를 실증이라도 하듯 구라파 지식계에 파문을 일으킨다. 그녀는 17세의 나이에 벌써 완고한 가정을 빠져 나온 러시아의 한 장군의 딸이다. ‘뛰어나게 총명하고, 비상하게 격정적이며, 무섭도록 의지 강한 미모의 여걸’로 그녀에게 홀린 당대의 명사가 한둘이 아니다. 40대 후반의 저명한 신학자이자 목사가 무릎을 꿇은가 하면, 그녀를 지도한 취리히 대학 교수들이 줄줄이 경탄 매혹된다. 독일 철학자 레와 니체의 열애, 뒤이은 극작가 하우프트만, 이미 결혼한 터인데도 젊은 시인 릴케와의 오랜 내연, 끝으로 프로이트, 그 중간에도 언어·고고학·의학자들이 줄줄이었으니 그녀의 편력은 참으로 놀랍고 희한한 일이다. ‘이같은 개척자가 있기에 20세기 중엽의 시몬느 드 보봐르와 사르트르의 계약결혼도 비로소 쉽게 이루어지고 무난히 세상에 용납된 것’이라고 김붕구는 풀이한다.

묘한 것은 여걸과 열애한 남성들은 ‘마치 그녀의 마력에 감전되어 재능과 생명의 활력이 홀연 접선 점화되기라도 하듯이’ 명저들을 낸다는 사실이다. 38세의 니체가 21세의 살로메에게 빠진 사랑의 환희, 고뇌, 절망 가운데 『자라투스트라』를 낸 것이나 보봐르가 사르트르에게 그 접선 점화작용으로 용기를 불어넣고, 역으로 그로부터선 작가로서의 기량을 지도받아 더불어 명성을 얻은 것은 다 같은 맥의 실례에 속한다. 김붕구는 이같은 시각의 많은 얘기들을 밤 깊은 줄 모르게 들려준다.

다음으로 눈에 띤 건 인텔리 스노브들에 관한 비판이다.

2차적 시·공인 문학의 여로를 편력한지 실로 30여 년, 김붕구는 마침내 그 모태인 1차적 시(1967~68)·공(파리)에 여장을 푼다. 끝없이 펼쳐진 질펀한 평야를 보면서 ‘이 풍요한 농촌이 떠받들고 있는 이 높은 지대는 차라리 하나의 정상’이라고 느낀다. 과연 그는 ‘19세기의 소녀 프랑소와즈 사강이 얄팍한 소설 한 권으로 파리의 화제가 되자, 삽시간에 온 세계로, 까마득히 내려다 보이는 낮는 지대에까지 퍼져 이목을 집중시킴’을 보고 ‘계곡의 거목이 아무리 발돋음을 해 보았자, 도저히 어깨를 겨를 수가 없게끔 되어 있다’고 그 높은 지대의 위상을 자조적으로 긍정한다.

그러나 그 높은 지대에서 김붕구는 뜻밖에 저널리즘이 밀착된 문화 표면층의 ‘지식으로 아는 것’이 판을 치는, 신기취미와 소란스러운 지랄 같은 현상을 목도한다.

 

말끝마다 ‘혁명적’, ‘비상한’, ‘아방 가르드’, ‘미제국주의’… 등 그밖의 그때그때 유행하는 낱말을 입버릇처럼 뇌까림으로써 ‘진보적’ 인텔리인 체하는 부화뇌동배들.

─ 인텔리 스노브들과 사회·정치

 

바로 그 무리들이 미국의 월남전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규탄함을 본다. 까마득히 낮은 지대의 일을 파리가 마치 그 등심원의 중심이나 된 듯 여론을 휘몰고 삽시간에 그것을 온 세계로 퍼치는 왁자지껄한  지랄들을 본다. 그리하여 김붕구는 미국을 규탄하는 이른바 ‘러셀 재판’의 의장직을 맡은 사르트르의 앙가주망을 이런 스노브들에 대한 영합의 일환으로 보며, 그것이 우리 6·25 전쟁을 북침으로 몰았던 어처구니없는 실체라고 지적한다. 말만의 참여에 대한 논리와 도식성을 비판한 것이다. 개인주의를 그토록 자랑하는 프랑스에서 왜 걸핏하면 엉뚱한 한곬으로 여론이 몰리는지, 그 부화뇌동의 실상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가를 낱낱이 들춰낸다.

 

고다르 역시… 영화마다 주제와는 전혀 관계없는 월남전 장면을 삽입하는 상투 수법으로… 아니면 전위예술답게 되도록 지루하고, 되도록 무슨 영문인지 모를 장면을 이어 나간다.

 

로브 그리에는 ‘내 미학은 깊이를 거부한다’, ‘일체 사물에 대하여 의미를 주지 않는다’고 공언한다.

─ 인텔리 스노브들과 영화·문화

 

무슨 영문인지 모르기 때문에 오히려 화제가 되고 해설이 붙고 스노브들이 와르르 몰려드는 현실. 깊이를 거부하는 미학에 대해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사물에 대해서, 한사코 토막들을 이어대며 무슨 상징이니 무슨 의미니 하며 아는 체 폼을 재는 인텔리 스노브들의 그 어설픈 코미디! 김붕구는 바로 그 코미디의 현실을 단호히 비판한다.

 

 

4. 마무리

 

김붕구의 글은 그 대종이 평론 성향의 글이다. 통념적 시각에서 보면 수필이라기보다는 서구적 의미의 에세이다.

그 에세이의 산지는 그가 산 1·2차 시·공의 중간지대다. 잠시 신들메를 풀고 올라온 길을 굽어 보고 또 오를 길을 추스르는 바로 휴식의 목장, 사회적인 나와 창조적인 나가 따스하게 손을 잡는 곳이다. 그래서 얘깃거리가 풍성하다.

방법은 말 바꾸기, 1차적 시·공의 현실 경험을 2차적 시·공의 관념 체계에 접목하여 격을 더하고 역으로도 ‘머리를 통해 안 것을 현실을 통해 익혀 아는’, 말하자면 지속적이고 건실한 말로 그 용어를 바꾸는 것이다. 그의 에세이는 그래서 학문의 낙수, 서재의 여적 같은 ‘문학에 관한 에세이’가 대종이다.

이런 ‘…에 관한 에세이’ 즉 각 과학의 주제 에세이들을 우리 수필 문단이 어떻게 수용해야 할 것인지는 풀어야 할 과제가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