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요놀이

                                                                                     鄭鳳九

 요요, 전동찻간에서 산 물건이다. 이것이 나의 무료를 달래는 환상의 길잡이 도구로 곁에 온 지도 꽤 오래 되었다.

어느 날 지하철 전동찻간에서였다. 그날 따라 전동찻간에는 승객이 붐비지 않았고 중간 통로도 훤하게 비어 있었다. 차가 서며 경쾌한 차림의 날렵한 젊은 여성이 뛰어들듯 들어섰다. 그녀는 들어서며 가볍게 무엇인가를 허공으로 내던졌다. 공 같은 것이었다. 파릇한 구슬 같은 광채가 던져진 허공을 차고 다시 돌아오면서 그 여인의 손 안에 드는가 싶더니 다시 튀어나갔다. 요요였다. 오고가는 왕복을 거듭하는 그 현란함이 마치 요술의 날개인 양 신기했다.

최근에 부쩍 늘은 전동차 내의 행상이었다. 그녀는 가벼운 손놀림으로 요요를 던지고 받기를 거듭하며 그것을 선보이는 한편 변설을 늘어놓았다. 귀여운 아들, 딸, 손자들에게 놀이감으로 선물하라는 것이었다. 저으기 호기심이 일었다. 이웃에 사는 손자 얼굴이 떠올랐다. 주머니에서 돈 천원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웃음과 함께 내미는 요요를 웃음으로 받아들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그 요요 상자를 서둘러 끄집어 냈다. 그리고 전동찻간에서 본 여자처럼 그것을 던져보았다. 그런데 던져진 요요는 돌아오질 않는다. 부메랑처럼 되돌아오려니 기대했는데 그냥 던져진 채 요요는 꼬이는 줄 끝에 대롱대롱 매달린 대로였다. 나가고 들어오고 하는 요요놀이 곡예는 쉽게 이뤄지지 않았다.

서투른 피에로처럼 혼자서 이렇게 던져보고 저렇게 던져보고 궁리 중에 마침 손자가 왔다. 너에게 주는 선물이노라 얼른 그것을 건네주니 아이는 주저치 않고 익숙한 솜씨로 던지고 당긴다. 옆에서 보고 있던 애 아범이 거든다. 미국에서는 그것이 요즈음 유행이란다. 그러고 보니 며칠 전에 텔레비전에서 그런 뉴스를 본 듯도 하다. 요요를 양손에 쥐고 놀이를 한단다. 그렇게 던지며 그것으로 실뜨기도 한단다. 그것으로 실뜨기를 하다니, 그것이 가능할까? 신기한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또다른 호기심이 집착처럼 일었다.

손자에게는 문방구점에 가서 새로운 요요를 사주고 먼저 산 것을 그대로 둬두었다. 그것을 던지면 아득한 옛날이 살아날 것 같은 환상이 솟았다.

요요를 살리는 기술을 겨우 터득했다. 던지는 듯 당기고 당기는 듯 놔주며 벽치기 하는 테니스 공을 때리듯 잽싸게 놨다 당겼다 해야 한다. 던질 때마다 실 끝에서 되감기는 촉감이 흡사 연실을 당길 때 느끼던 흥분과도 같았다. 어머니가 만들어 주신 얼레의 연실을 튕기던 감흥이 살아났다.

어머니는 사금파리를 빠서 가루를 내고 그것을 아교 끊인 물에 섞어서 연실에 먹여주셨다. 그 실을 한 번 튕기면 활 시위 소리 같은 팽팽한 바람 소리가 일었다. 누구고 연싸움을 하자고 덤비는 놈은 칼날 같이 버지는 그 연실에 잘려나가고 만다. 그 연실에 사금파리에 아교물을 먹이시던 어머니, 나는 그것이 화로전에 칭칭 동여지며 건조되던 과정을 회상한다. 그 화롯가에서 남은 실로 실뜨기를 했던 듯싶다. 마름모판 갓줄을 애기손가락으로 건져올려 엄지와 검지로 거꾸로 떠올리면 방아공이도 되고 젓가락 짝도 되고, 변화무쌍한 가지가지 모양이 짜여진다.

서양 사람들이 즐긴다는 요요놀이의 실뜨기는 어떤 형태로 구성되는 것일까? 내 추리의 한계가 벽에 부딪치며 요요의 환상이 카오스로 연상된다. 3차원의 공간이 n차원으로 전위하며 타임머신을 타고 무형화되는 자신을 의식한다. 사실 이것은 내가 책상 앞에서 피로를 느낄 때면 곧잘 즐기는 자기 최면이기도 하다. 지금은 요요놀이가 그것을 대신했을 뿐이다. 논리적인 모순에 구애치 않고 나는 공상의 퍼즐놀이를 계속 하는 것이다. 한 번 가고 한 번 되돌아오고 그 왕복 율동의 횟수를 환상으로 추적하며 모순 논리의 늪 속으로 빠져보는 퍼즐게임이다.

대학 예과 시절 나는 논리학 강의에 대단한 흥미를 느꼈다. 삼단논법에서 시작하여 외연(外延)이니 내포(內包)니 하는 명제(命題) 설정에 색다른 매력을 느꼈다. 그래서 강의 시간이면 빠지지 않고 중앙 앞자리에 앉아서 열심히 선생님 얼굴을 주시했다. 그런데도 논리학 학점은 C였던가 D였던가.

아이러니한 현상이었지만 아마도 수학 논리의 부족 탓이었으리란 짐작이다. 좋아하는 것과 이해하는 것과의 차이는 의외로 크다. 요요놀이면 그저 놀이로 즐길 일이지 어째서 거기에 카오스니 혼돈이니 주(註)를 다는가. 자기 모순을 탐색하는 일도 언제나 즐기는 퍼즐게임의 일종이다.

논리학을 설명하면서 데카르트는 “未知의 것을 알기 위해 소용된다기보다도 오히려 旣知의 것을 사람들에게 설명한다든가, 류르의 방법처럼 자기가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아무런 판단을 가하지 않고서 남에게 이야기하는 데 소용될 뿐이다”라는 말로 그것을 비판하였다. 내가 알지 못하면서도 남에게 이야기한다는 것은 그것 자체가 설명이고 보면 그것으로 아는 일이 될 법도 하다. 모르겠다고 팔짱만 끼고 있을 수도 없어서 책을 펼쳐본다. 그러나 모르는 것을 모르는 대로 이해하려 해도 그렇게 안 되는 것이 수학이다. 과학을 모르고 기계 이론을 몰라도 웬만한 책을 읽는 데 별 불편이 없었는데 수학의 벽은 그렇지가 않다. 기호논리학(記號論理學)을 펼치고 페이지를 넘기면 생소한 수식이 나온다. 논리연산(論理演算)이니 함수연산(函數演算)이니 하는 수치 계산이 앞을 막는다. n개의 명제에 대하여 시행되는 하나의 논리연산을 산출하는 수식 등등이다. 순열(順列), 집합(集合)의 공식을 활용하는 것일까? 책을 덮고 다시 요요를 던져본다.

파릇한 불빛을 발산하며 구르듯 미끄러지며 나가고 드는 요요 속에서 나의 환상이 리본체조 마루운동을 하는 율동 소녀를 본다. 둥근 실패의 요요공이 유연하게 흔들리는 끝에서 이번에는 아이스 쇼의 군무가 엮어진다.

어느 새 나도 함께 그들의 율동을 헤치고 얼음판으로 지쳐든다. 요요의 팽이치기를 시작한다. 스케이팅의 춤 사위가 요정의 물결처럼 흐르는 파도 속에서 나의 요요놀이 팽이채는 한층 힘차게 움직인다. 나는 계속 팽이를 친다. 요요를 조종하는 손놀림이 아이스 쇼의 군무를 지휘하는 채찍줄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