許世旭

 벽을 보면 왠지 친근했다. 그 텁텁한 살결이 이웃집 아저씨 같고, 고집불통으로 서 있는 모습은 답답한 선머슴을 보는 느낌이다. 우릴 앞으로 나가지 못하게 막지만 지금도 작은 공을 꺼내 거기다 벽치기 하고 싶다. 우릴 건너가지 못하게 버티고 섰지만 거기엔 누가 누굴 좋아한다고 갈겨놓은 낙서가 심심찮게 보인다. 우릴 더 멀리 볼 수 없도록 막았지만 거기에 식은땀이 흐르는 등짝을 기대고 시원하게 두 어깨를 문지르고 싶다.

그 구조는 별 게 아니었다. 황토에다 지푸라기를 반죽하면 그만이다. 양회벽이라도 철근이나 각목을 촘촘히 세우고 거기에 덕지덕지 흙을 붙이고 시멘트를 바르고, 다시 환한 벽지에다 풀을 멱칠하여 슬슬 손질하면 말끔해졌다.

작은 집에 많은 것은 섬돌 위에 고무신만 아니었다. 작은 초가삼간이라도 안방에 작은 방, 골방에 부엌, 거기다가 광과 헛간, 그것들은 오밀조밀한 오장육부를 닮았다. 거기서 짐짓 할아버지는 아버지를 낳고, 아버지는 아들을 낳으면서 오손도손 살았다. 그렇게 아들 낳고 딸 기르며 대대손손 사는 것이 우리들 장유유서(長幼有序)고 남녀유별(男女有別)을 누리고 지킬 수 있는 까닭도 이 오밀조밀한 벽에 그 공을 돌릴 수 있었다.

어려서 어른에게 야단을 맞거나 어른이 되어 안팎의 싸움이 벌어질 때도 그 보호벽이 되었다. 살짝꿍 벽을 돌아 숨으면 고만이고, 벽을 사이에 두고 불덩이의 화를 가라앉힐 수 있었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많았다. 시어머니 몰래 서방님의 가슴에 머리를 묻거나 모래벌 같은 입술을 축일 수 있는 곳도 벽의 모서리였다.

이십 몇년 전 강남 산자락에 새 집을 사서 입주했을 때였다. 모처럼 작은 뜨락에 둥실한 집 한 채. 그때 한창 개발중인 강남은 군데군데 전원의 형상이 남아 있었다. 앞에는 시냇물, 뒤로는 산자락. 그 산자락을 올라 뿌연 바위에 걸터앉아 우리 집을 내려다보는 것은 나 혼자만의 짜릿한 재미였었다. 그때 내 눈에 잡히는 잿빛 블록의 직사각형 담벼락은 여느 집에 비해 비록 성냥갑의 크기에 지나지 않았지만 처음으로 나의 소유를 대표하는 부동산 제1호로 다가왔었다.

그 무렵 긴긴 장마로 우리 옆집의 담이 버드나무 우거진 시냇가로 폭삭 주저앉은 일이 생겼었다. 그럴수록 아침에 일어나선 우리 집 담벼락을 유심히 살피면서 행여 결렬의 조짐이 없는가 마음졸였고, 그 담벼락 안의 모든 생물이 소중해서 날마다 잡초라도 무성하길 바라곤 했다.

그래서 나의 뜨락에는 잡초에 잡목이 무성했었다. 거기에 덩달아 개도 두 마릴 길렀다. 우리 딸들이 신이 나서 ‘재키’니 ‘리키’니 하는 혀 꼬부라진 이름을 지어 주었다. 그 중 재키란 녀석은 제법 호전적이어서 골목을 지나는 남의 집 개에게 약을 올리곤 했었다. 어쩌다가 골목대장을 만나는 날엔 쨉싸게 우리 집 담벽 안으로 쫓겨와선 길쭉이 목을 빼곤 핏대를 올리면서 마구 짖는데, 그 거드름이란 가관이었다. 영토란 것이 그렇게 든든한 것이었다.

잘못 감기에 걸려 댓새쯤 앓고 나면 휘둥그레 눈이 돌면서 온몸의 뼈마디가 풀어진 듯 무력해진다. 그럴 때 거실의 벽에 기대면 벽은 당장 지팡이처럼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를 부축하고, 차라리 주저앉아 안방의 벽에 기대면 벽은 등받이 홍목 의자처럼 척추에 힘을 실어주었다.

그것 뿐이랴. 젊은이가 좋은 사람을 만나면 갈 곳이 없었다. 기껏 흙담 구석진 곳에 나란히 서서 낮은 소리로 무언가 속삭이다가 그래도 속이 타면 마른 섭 같은 가슴을 무진 비비다가 캄캄한 밤으로 헤어졌었다.

그래서 벽이 없는 대청이나 담벼락이 없는 골목에 들어서면 허허롭다. 왠지 널따란 실내에 들어서면 몸둘 곳을 몰라 저쪽 가상자리를 맴돌았고, 담이 없는 휘휘한 골목에선 해묵은 폐촌인 듯 머리 끝이 쭈뼛했었다.

한때 세상은 자유와 평화가 봉쇄된 상징으로 베를린의 장벽을 커다란 사진으로 보여 주었다. 중국의 만리장성도 장벽임에는 다를 바 없지만 그것이 푸른 청산을 누비고 기암절벽을 뚫고 간지라 봉쇄나 단절로만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튼 민족과 민족을 갈등시키고 국가와 국가를 대치시키는 그 장벽이 싫어서 우리 나라에서 개최했던 올림픽의 노래로 ‘벽을 넘어서’를 구가한 바 있었고, 옛 성현은 소견이 좁은 데다 슬기가 없는 사람을 면벽(面壁)한 사람이라고 비아냥했었다.

그렇다면 분명 벽은 반목과 장애의 불편임에 틀림없겠다. 거기서 막히고 거기서 끊겨서 돌아서거나 영영 끝날 수도 있는 지점인 것이다. 나는 고뇌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 봄, 중국 문화를 답사하는 일행과 함께 중국의 황산을 유람했었다. 이태백이 금빛 연꽃으로 찬미했던 연화봉에서 배운정으로 가는 길이었다. 구름이 몰려오면 바다가 되고, 구름이 지나면 총석들이 솟구치는 해심정을 지나 서쪽으로 10분쯤 퉁탕거리면 하늘에서 곤두박질한 10미터의 비래석이 송이버섯인 양 꼿꼿이 서 있다. 거기서 다시 석계를 밟아 하늘거리면 또 한 번 무시무시한 절벽에 서게 된다. 아슬아슬 얽어놓은 철책 앞에서 간신히 몸을 세우고 건너편 쌍전봉을 보면 그 웅기함에 기가 막히고, 다시 발 아래 수백 미터의 아찔한 협곡을 보면 그만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런데 웬일일까? 나는 그 백척간두에서 수천 척의 암벽을 면대하곤 환상을 즐기고 있었다. 내가 나비가 되고 내가 매나 독수리가 되는 것을 생각했다. 처음에는 훨훨 나비가 되리라 했지만 골짜기를 휘젓고 다니는 매가 되고 싶었다.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고래고래 소릴 질렀다. 그때사 안 일이지만 우리들 메아리가 돌아오는 여기가 ‘회음벽(回音壁)’이었다. 나도 ‘야호!’ 했다. 정말 신기하게도 나의 야호가 저 암벽으로부터 내 가슴에 돌아와서 철썩거리고 있었다. 벽은 결코 막히지 않았고 거기서 다시 시작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