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공의 미소

                                                                                         이종만

 거리는 기쁨과 기대감으로 술렁거리는 듯했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심수관 가의 수관도원(壽官陶院)으로 가고 있었다. 우뚝 솟아 있는 사쓰마야키 4백년제를 알리는 광고탑을 바라보면서 햇빛 쏟아지는 가고시마 거리를 걷고 있자니 나 또한 흥분을 감추기 어려웠다.

우리 가족이 심수관 씨의 안내를 받아 다다미 방에 앉아 있으려니 기모노를 입은 일본 여인들이 도기에 말차(抹茶)를 내놓으며 머리가 바닥에 닿도록 절을 한다. 조금은 당황해서 나도 고개를 숙였다. 말차를 마시면서 내 앞에 놓인 도기를 보니 그 문양과 빛깔이 특이했다. 자세히 들여다보는 나를 보고 심수관 씨가 그 도기에 대해서 조용히 말문을 열었다.

이 도기는 1965년도에 박정희 대통령이 이곳을 방문하면서 한국에서 흙을 조금 가져온 것으로 빚은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 흙으로는 3개 정도밖에 구울 수가 없어서 겉만 우리의 것을 입혀 여러 개의 도기를 만들었다고 했다. 내가 무심히 밟고 다니는 조국의 흙이 참으로 소중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이제는 한 줌의 흙에도 애정을 가지리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도자기의 세계는 첫째가 흙[粘土]이요 둘째가 기(技), 셋째가 가마[窯]라고 알고 있다. 거기에 몸 바쳐서 4백년을 보낸 심수관 씨 가문이지 않은가.

창 밖의 매화나무를 바라보면서 이곳 가고시마에서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을 하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심수관 씨에게 “매화꽃이 피면 다시 돌아오겠소”라고 말씀하셨다던 아버지는 그 꽃이 피고 져도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먼 곳으로 떠나셨다. 이 방에서 심수관 씨와 마지막 우정을 나누었던 곳, 나 또한 이곳에서 차를 마시며 아버지를 떠올리고 있다.

그분은 우리 가족의 마음을 헤아리기라도 하듯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아버지는 심수관 씨와 작별을 하고 택시를 타고 백화점에 가셨는데, 단 7분을 모셨던 일본인 택시 기사가 다음 날 아버지의 비보를 알고 국화꽃 한 송이를 아버지의 영전에 바쳤다는 말을 했다.

금년 4월 부슬비가 내리는 어느 날 심수관 씨가 고향 선산에 모신 아버지의 산소에 성묘를 갔을 때 개나리꽃이 피어 있고, 동네 청년 몇이 우산을 가지고 마중을 나왔었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일본에 살면서 항상 한국인의 정신을 지켜온 심수관 씨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날 처음 만난 두 분은 의기투합하였을 것이다. 아버지의 삶, 그 끝자락에서 마지막 우정으로 만난 사람이 심수관 씨가 아닌가 싶다. 그는 온후하고 인자한 할아버지 모습이었고, 말을 무척 아끼시는 분이었다. 심수관 씨 15대가 되는 그의 외아들을 바라보니 그는 준수하게 생긴 미남자였다. 그 청년이 이제 가문을 이어 묵묵히 물레를 돌릴 것이다.

수장고(收藏庫)에는 심수관 가의 도자기가 시대순으로 진열되어 있었다. 초대 심당길(沈當吉)의 작품 ‘히바카리’라는 다완 앞에서 발길을 멈추었다. 불만 일본 것이고 흙과 유약 솜씨는 조선인의 것이라는 대단한 자부심 앞에 머리가 숙연해졌다.

7대 심당수, 8대 심당원의 관세음상은 정교하고 섬세한 세공이 상아를 깎아놓은 듯했다. 그 모습이 항상 기도하는 마음과 기다리는 자세로 다가온다. 기도는 고통의 순간들을 잊게 해주는 버팀목이 아닌가.

12대 심수관 목동상을 보면서 마음 속에 짜릿한 전율이 느껴졌다. 코뚜레를 낀 얼룩소에 피리 부는 소년이 타고 있다. 우리 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인데, 소년은 일본 옷을 입고 있다. 해질 무렵, 석양을 받으며 농사 일을 끝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고향 풍경을 생각해서인가, 움직이지 않고 엎드려 있는 얼룩소가 눈길을 끈다. 그것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는 도공의 슬픔을 담은 것이 아닐까.

4백년간 줄기차게 지켜온 영혼의 결정체와 만나면서 나는 작품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리고 일본의 문호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가 했다는 “조선 도공의 후예들은 두 가지 가슴과 심장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선진 조선의 도예를 일본에 전했다는 자부심으로 가득한 조선인의 가슴과 타국에서 살아 남기 위하여 모든 것을 일본에 바쳐야 하는 일본인으로서의 가슴”이라는 말을 전시된 작품들을 보면서 떠올렸다.

심수관 씨의 사인을 받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일본인들이 길게 줄 서 있는 맨 뒤에 나도 섰다. 그는 한결같이 붓으로 답례를 하고 있었다. 전기 먹갈이나 먹물을 사용할 수도 있지만 중간 중간에 스스로 먹을 갈고 있는 모습이 여유롭다. 그 여유와 바른 자세 속에 위대한 저력이 숨어 있는 듯도 했다. 턱 밑의 긴 수염 때문인지 미소가 번진 얼굴은 도인 같았다.

옥산궁(玉山宮)으로 가기 위해 지도를 보며 나는 한없이 걸었다. 옥산궁은 그들의 후손이 일본에 동화되어 가는 모습을 보며 조국을 잊지 말라고 지었다는 단군 성조를 모신 곳이다. 옥산궁 앞은 차 밭이었다. 잘 손질된 찻잎들이 해풍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그곳에 서서 시가지를 바라보았다. 지금도 사쿠라지마에서는 화산재가 뿜어 올라 연기처럼 피어 오르고 있다. 그 모습은 마치 도공들의 불타오르는 내면의 표출같이 보인다. 그들은 끝없는 조국에 대한 그리움을 창조의 아름다움으로 승화시켰을 것이다. 그리고 그 예술혼은 지금 세계로 뻗어나갔다.

인간의 의지는 대체 얼마나 위대한 승리를 거둘 수 있는가. 일본인에게 끌려와 4백년의 통한의 슬픔을 뛰어 넘어 이제는 잔잔한 미소를 지을 수 있는 마음의 여유, 그것은 그들만이 할 수 있는 인간 승리가 아닌가.

집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다시 현해탄을 내려다 볼 것이다. 그리고 오늘 가고시마의 거리와 이곳에서 느꼈던 감동을 오랫동안 가슴에 묻어두고 싶다.

 

이종만

수필공원으로 등단(93년).

수필산책회, 산영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