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스크

                                                                                                          남기연

 이른 봄 햇살은 믿을 게 못된다. 장미에 가시가 있듯, 따사롭고 화려해 보이는 햇살 속에는 매운 바람이 숨어 있다. 베란다와 거실의 두꺼운 유리문 두 겹을 거치고서도 숨이 죽지 않고 마루 중간에까지 밀려온 싱싱한 햇살을 너무 믿은 게 탈이었다.

봄 햇살에 이끌려 봄 옷으로 갈아 입고 집 근처의 강변으로 나갔다가 강물을 거쳐온 매운 바람을 만나고서야 아직은 온전한 봄이 오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철 이른 봄나들이로 철 지난 감기만 얻어온 셈이다.

심한 기침 감기에 걸려 찬기운이 싫고 남에게 폐를 끼치는 것도 싫어서 외출하는 길에 약국에서 마스크를 한 장 샀다. 하얀 면 네 귀퉁이에 달린 끈을 두 가닥씩 매듭으로 묶어 귀에 걸었다. 몸에 한기가 있어서인지 답답하기보다는 오히려 포근하다. 장갑이나 양말로 손과 발을 감싸면 몸이 따뜻해지는 건 당연하지만 코와 입을 가려도 이렇게 온몸이 따뜻해지리라는 건 의외였다. 갇혀 있는 코와 입에서 조금씩 스며나오는 더운 김이 몸 전체로 퍼져 나가 촉촉하게 데워지는 것 같다.

처음에는 사람들 보기가 조금 쑥스러웠지만 점차 묘한 심리적 안정감을 느끼게 된다. 얼굴의 반을 가린 변신의 즐거움 또한 솔솔하다.

내 얼굴은 완전히 드러내지 않고 다른 사람의 얼굴은 다 볼 수 있다는 것이 게임에서 점수를 선취할 수 있는 유리한 입장에 있는 것 같아 안도감도 들고 유쾌하기조차 하다.

화장을 하지 않아도 옷차림에 신경을 쓰지 않아도 편안하다. 내친 김에 팔도 앞뒤로 마음껏 흔들어 보며 걷는다. 보폭도 한껏 넓게 잡아본다. 덜렁거리며 흔들거리며 걷다 보니 점점 신이 난다.

남을 의식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이렇게도 편안한 것인가. 유명인도 아니지만 익명성이 주는 이런 자유로움이 그 동안 쌓인 스트레스마저 시원하게 날려준다.

남을 의식하면 나의 시선은 밖으로 향하게 되지만 다른 사람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지면 그만큼 내면으로 깊숙이 침잠하게 된다.

입이 가려지면 말을 잘할 수도 없지만 남이 나에게 말을 시키지도 않는다. 자연스럽게 묵비권이 인정되는 셈이다. 말하지 않아도 되는 그만큼 나의 마음은 다른 사람을 향해 열려질 것이다. 손바닥만한 흰 천 한 장이 가려주는 세상의 넓이가 그만큼의 깊이를 덤으로 준다.

짐 캐리가 출연한 ‘마스크’라는 영화가 있다. 말단 은행원 스탠리는 어느 날 우연히 신비한 힘을 가진 골동품 마스크를 발견한다. 이 마스크를 얼굴에 써 보는 순간 스탠리는 초인적 능력이 생긴다. 빛보다 더 빨리 달리며 자유자재로 몸을 변형시킬 수도 있다. 총알도 맞지 않고 떨어지는 폭탄도 삼켜 버린다. 하지만 마스크를 벗으면 본래의 스탠리로 돌아온다. 나이트 클럽 가수 티나를 사랑하지만 순진하고 얼띤 성격인 그는 표현을 잘하지 못하지만, 마스크를 쓰면 성격도 적극적으로 변하여 티나의 마음을 얻게 된다. 특수 효과가 뛰어난 SFX물이지만 마스크라는 도구를 통해서 구별되는 인간의 이중 행동에 대해 한번쯤 생각해 보게 하는 영화였다.

우리는 ‘나’를 나타내 보이려고 노력하기도 하지만 ‘나’를 숨기려고 애쓰기도 한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현시욕은 우리의 행동에 족쇄를 채우기도 하고, 은닉욕은 우리들 마음의 족쇄가 되기도 한다.

이른 봄날 오후, 얇은 햇솜 이불 같은 작은 마스크로 입술 위를 덮고 거리를 걸어가면서 나는 잠깐 갈등에 빠진다. 마스크를 벗어 버리고 소심하고 얼띤 스탠리로 남을까, 아니면 마스크를 좀더 코 위로 끌어올려 먼지와 바람을 피하며, 겉으로는 포근해 보이지만 속이 차가운 설익은 봄기운도 막아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