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

                                                                                            이경은

 서울역 지하도는 항상 복잡하다. 기차를 타러 오가는 이 이외에도, 지하철 1호선과 4호선을 바꿔 타는 환승역이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만나기로 한 남편은 아직 오지 않았다. 약속 시간보다 10분 정도 이르다. 남편이 나를 잘 찾을 수 있도록 지하도 한가운데 표지판처럼 서 있는다. 바삐 스쳐가는 사람들을 무심히 바라보자니 괜시리 내 마음마저 바빠진다.

‘사람도 많기도 하지… 다들 왜 저렇게 바쁠까? 아니 저렇게 많은 사람들 중에 내가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거야? …이 사람은 왜 이렇게 늦어? 좀 미리 와서 기다리면 안 되나? …연애할 때는 안 그러더니 변했네…….’

10분이 지났다. 지하도 한가운데에 서 있는 것은 찻집에서 한 시간 기다리는 것보다 짜증나는 일이다. 목을 빼고 이 길 저 길을 본다. 그때 한 남자가 다가온다.

“저…….”

“……?”

“동전 몇 개만 있으면 좀 주세요.”

낡고 초라한 옷차림에 꾀죄죄한 얼굴로 보아 서울역 지하도에서 노숙하는 남자가 틀림없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코트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어 동전 몇 개를 꺼낸다. 손에 주려고 한 순간 그 남자는 첫 미팅에 나온 것처럼 수줍어하며 말한다.

“저… 제 손이 더럽거든요. 그러니까 만지지 마시고 땅에 떨어뜨려 주세요.”

“…….”

나는 그의 손바닥에 돈을 쥐어주며 일순 정신이 멍해진다. 맥 놓고 사는 인생살이에 갑자기 던져진 화두처럼, 그 한 마디에 내 가슴은 예리한 칼에 베인 듯한 기분이 된다. 정신을 가다듬고 보니 남자는 이미 어디로 갔는지 보이질 않는다.

나는 그 남자가 왜 그랬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비록 지금은 노숙자의 처지이긴 하지만 원래 남자의 성품이 겸손해서일지 모른다. 아니 어쩌면 극한 상황 속에서도 자기 자신을 잃지 않으려는 최후의 자존심 같은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은 내가 그 남자의 손도 덥석못 만질 만큼 잘난 척하는 여자로 보였거나, 돈은 있어 보이나 푸근하지 못해 보인 것 같기도 하다. 만약 그렇다면 아이를 둘이나 낳고도 아직 남에게 그런 경계심을 들게 하는 내 자신에 많은 문제점이 있는 것이다.

사람이 나이가 들어 철이 난다는 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벽 ─ 계급이나 사회적 지위, 돈과 명예 등등 ─ 이 없이 누구에게나 열린 마음으로 대할 수 있는 마음의 그릇을 이루어가는 것이라 여겼다. 그게 바로 진정한 의미의 인격자라고 나름대로의 가치 기준을 두고 살아왔는데, 나는 아직도 멀었는가 싶어 착잡해진다.

또 한편으로 떠오르는 것은 그 남자의 아내이다. 만약 그 남자가 결혼해서 아내가 있다면, 그래서 자기의 남편이 이 지하도에서 노숙을 하며 나 같은 여자에게 돈을 구걸하는 모습을 본다면, 그 심정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나도 한 남자의 아내이고, 이 어렵고 불안한 시절을 사는 평범한 직장인을 남편으로 가졌기에 그 마음이 절실하게 느껴진다. 뒤돌아보면 그 남자의 모습이 내 남편일 수도 있고, 그의 아내가 내 모습일 수도 있기에 말이다.

어느 새 왔는지 남편이 어깨를 툭 친다.

“나오려는데 사장님한테 전화가 와서 말이야. 미안해, 많이 기다렸지?”

사장이 내린 갑작스런 업무 처리를 하느라 늦은 남편은 피곤해 보였다. 이젠 연애 시절과는 달리 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 가장이니 아내와의 약속에 늦는 걱정보단 회사 일을 제대로 끝내고 오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그래야만 이 경쟁 사회에서 밀려나지 않는 것이다. 예전 같으면 신경질이라도 한 번 부려볼 일이지만, 이젠 그의 얼굴에 드리운 힘겨움을 아는지라 그저 웃고 만다.

남편과 팔짱을 끼고 지하도 계단을 내려가면서 내가 서 있던 자리를 뒤돌아보았다. 어느 새 다른 사람이 또 그 자리에 서 있다.

오늘 서울역 지하도에서 만난 두 남자. 그 둘은 전혀 다른 모습의 사람이지만 나에겐 한 모습으로 비추어진다. 오래도록 마음에서 지워지지 않을 것 같은 만남이다.